[Blood Diamonds, Torn by Greed] 2005. PHOTO EDITED by CHRIS
초등학교 다닐 때까진 지구본을 들고 자주 각국의 형상을 그려보곤 했는데 이젠 세계지도를 본 적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잘살던 못살던 사람들은 세계화(Globalization), 이 단어의 사용이 확장될수록 상대방에 대해 물질적인 정복이나 개인적인 욕심 빼곤 진정한 관심을 잃어가고 있으니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자주 듣는 나라 말곤 이름을 들어도 그 나라가 어디에 박혀있는지 모르겠으니 심각하다.
며칠 전 시에라리온 소년 병사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뱃속에서 분토 한 피는 구역질 나게 잔인하다. 시에라리온 RUF(Revolutionary United Front), 혁명연합전선 반군과 정부군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내전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시뻘건 땅은 아픔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간간히 접했던 아프리카 영화, 음악, 그림은 긴박한 리듬과 거친 표현 때문인지 밝지만은 않았는데, 정말 그들의 피부만큼 삶은 어두웠다. 소요는 잠식되었지만 불구가 된 사람들, 배고픔과 질병에 허덕이는 아이들, 검은 대지는 신음을 받지 못하고 붉은 화염을 토하며 슬피 울었다.
식민의 세대가 끝나고 정권을 잡기 위해 벌어지는 살육전. 비옥한 보고(寶庫)는 언제 전쟁터로 바뀌었던가. "풍성한 나무 열매는 먼저 따먹는 자가 임자"라고 세뇌당한 사람들은 추수할 날을 기다리지 않는다. 사다리를 들이대고 트랙터를 밀면서 자본가가 임대비용을 회수할 때까지, 서로의 머리를 밀어댄다. 살을 찢긴 채 마약에 물든 아이들은 무표정하게 총을 들고는 즐겁지도 않은 전쟁놀이에 빠져 있었다. 악몽에서 빠져나오려면 손목을 절단당하고 불구자의 신세로 전락하는데 먼지만 날리는 곳에서 어찌 살란 말인가? 구걸하지 않고선 무엇을 일구며 살아갈 수 있을까? 싸움에 나가지 않은 어린 여자들은 몸을 돌려가며 이름도 모르는 자의 아이를 낳았다. 시간(屍姦)도 서슴지 않는 인간말단의 정신들. 충격의 세월, 그곳의 모두는 웃음을 잃어버렸다. 간혹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자른 경험을 서슴없이 말하는 아이는 회상하는 게 민망한 지 웃을 때 빼곤 다시 표정을 지웠다.
공식적인 협정은 표면적인 합의일 뿐이다. 땅문서가 효력발생을 하려면 돈을 쥐고 있을 때 가능하지 않던가? 언제나 세상 법칙은 그러하다. 평화 또한 말뿐이지 실천으로 정착되려면 수십 년의 시간이, 수백 년의 앙금이 지워져야 할 것이다. 화형의 땅. "아이들은 이 땅의 미래"라고 부르짖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는 누군가의 피로 물들여있다. 아이를 전쟁터로 끌고 가는 이유로 총을 든 자가 말한 이야기는 역시 테러분자의 집요한 다짐처럼 충격적이다.
"성인이 저지른 살인보다 아이가 저지른 살인은 뇌리에 오래 남는다. 그만큼 우리의 의지를 세계인들에게 강렬하게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전범 재판은 역사에 묻히면 교훈이 되겠지만 당시 고통을 겪던 사람들의 통증을 완화시키진 못한다. <사자의 산 Sierra Leone>은 높은 포효를 내지만 이젠 스스로의 용맹함은 접고 울분의 폭풍우만 뿌려대고 있다. 돈, 무섭다. 황금, 괴롭다. 다이아몬드, 잔인하다. 불굴의 투지가 이리도 어리석은 대상에 쏟아지다니.
내부와 외부의 적들과 싸워보니 확실히 적의 대상이 확연할 때는 의지도 확고해지지만 적의 대상이 나의 혈육이나 나의 종족이나 나의 친구였을 땐 모든 회의가 엄습해 온다. 미치지 않고선 견디기 힘든 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망각할 것들에 집중할 수밖에… 불안이 속속들이 박히고 나서 동물 같은 경계심을 갖게 된다면 그것을 육감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해관계가 없으면 멀찍이 사탕 빨며 방관하는 게 상처 난 짐승을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행동이다. 살기 위해선 굴욕적인 환경에 길들여져야겠지만 순간을 잊지 못한 유약한 눈망울은 작은 움직임에도 떨리고 만다. 문서를 찾으려 뒤적거리다 지구본을 발견했는데 시에라리온의 소년 병사들이 생각났다.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은 끓고 있는데 이건 정열이 아니라 분노 같다는 생각이 든다. 터질듯한 슬픔과 질긴 아픔은 즐겁고 기쁜 환호의 반대편에 산재해 있다. 정녕 생의 법칙인가!
2005. 1. 7. FRIDAY
십 대 때부터 전쟁과 관련된 것에 초점이 꽂혀 있었다. 안정된 삶이라고 생각했다가 불안정한 위치에서 살게 되면서 일상에서 사람들과 대화할 거리가 사라졌다. 오직 살아있는 것만이 목표가 되고 기본 생활에 충실해서 살다 보면 자신과 같은 상태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모든 것이 깨져버렸을 때 기분은 그랬다. 깜짝거리는 놀라움이 가신 뒤 파리떼처럼 분노가 들끓었다. 말도 안 되는 모순적인 현실을 파괴하고 싶은 과격한 충동을 억누르기 쉽지 않았다. 본성이 튀어나올 때 감정을 억지로 누르면 반대급부적으로 굉장히 다양한 감정이 파동 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파괴가 밖으로 표출될 때 내부가 망가진다.
아프리카 독립영화나 다큐멘터리에 대한 프레스킷을 작성했을 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현실이 사실적이고 비참하면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주변과 웃음코드가 안 맞는 것인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이 웃기지 않은 걸 어떻게 하겠는가. 매일 닥치는 인성의 죽음 앞에서 쾌활하게 웃는 것은 미친 자나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세상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피를 보면 인간은 돌게 되어 있다. 사지를 모두 잘라서 본말의 규칙적인 배열을 무시하고 이상하게 꿰매어놓는 사람들. 장기를 모두 열어서 근수를 달아 파는 사람들. 열 살도 안 되는 아이에게 마약을 건네며 총알받이 인간을 만들어내는 괴물들은 미개해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순환기적인 악(惡)은 개별적인 인간에서 시작되어 집단화된 문명에서 무감각하게 구름처럼 검은 무리를 짓는다. 탐욕과 질시, 교만과 긍지가 원시의 어리석음과 기초화된 폭력에 반영된 결과가 우리가 바라보는 악(惡)의 모습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서 편치 않는 순간들을 동요 없이 바라보게 되었지만 현재를 이뤄낸 어긋난 세계를 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모습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맞는 것인지 살펴보고 있다. 삶이 화려해질수록 죽음으로부터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전율의 감각들은 모두가 언젠가는 직면하겠지만 현재에선 보고 싶지 않은 진실임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