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ARM OF BACKGROUND

본성의 발현, Lou Andreas-Salomé, 백그라운드의 묘미

by CHRIS

외향적인 태도가 주를 이루던 어린 시절에는 여자 친구들도 많았지만 남자 친구들도 많았다. 경험이 일천하여 몸으로 부딪혀서 느끼는 것을 실전적인 감각으로 여기고 무모한 실행으로 인해 매일같이 다치던 시절이라 육체를 쓸 때는 남자 아이들과의 전투적인 놀이가 흥미로웠다. 여자 아이들과는 소꿉놀이와 인형놀이를 하다가 누군가를 위해 밥을 차리고 치장하고 상대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역할이 지루해서 책을 읽었다. 작가들과의 대화는 목소리도 다양한 변사의 이야기를 듣는 듯이 재미있었다. 점차 아이들과의 놀이가 시시해졌다. 겉모습만 본다면 조숙한 것은 아니었는데 생각은 노인의 탈을 쓰고 있어서 신체적인 나이로 규정되는 미성숙한 형상의 미성숙한 위치는 성인이 되면 달라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타인들과 놀고 싶을 때면 참여한 사람들의 특징을 파악해서 그들이 놀고 있는 공간에 깍두기처럼 파고들었다. 카드패로 따지면 조커(JOKER) 같은 존재였다. 모든 카드를 능가하는 트럼프 카드의 최강의 패이지만 게임 중에 전혀 쓰이지 않을 수도 있고 위급할 때는 만능패처럼 와일드한 매력을 가진 그런 존재였다. 나는 타인과 섞이긴 하되, 완전히 흡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규칙 속에 참여하긴 하되, 모든 판을 갈아엎는 힘을 원했다.


성향(TENDENCY, 性向)이란 단어가 의미하듯이 기본적인 의식의 배치와 내구적 본성을 향한 편향적인 성격은 성적인 호기심이 시작된 중학교 때부터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보호자가 존재하는 법적인 위치에서 궁금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배출할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파괴적인 마음을 감추고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인간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여기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고, 성(性)은 왜 분리된 것이며, 사회적인 역할은 정신의 성장에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인지 어른들에게 물어봐도 그들 또한 알지 못했다. 주변에서 속 시원하게 마음을 터놓을 사람은 없었다. 논리적이면서 지적이고 탐미적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랑의 색은 다양하다. 좁게 봐서 부모의 사랑과 자식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은 같지 않다. 이성적인 매력과 동성적인 매력은 다르다.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개념이 미덕이던 시절의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내부의 의식은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적절히 혼용되어 있어서 육체적 사랑이 바로 의식의 사랑과 연결되는 서양적인 사고관은 심한 거부감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사회 체제에 고분고분하게 순응하는 동양적인 사고관 또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칸트, 비트겐슈타인, 쇼펜하우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왜 독신으로 지냈을까? 자신과 비슷한 인간, 혹은 완전 정반대의 인간에게 끌리는 것이 인간 본성의 결합을 향한 향수이다.


생을 형성하는 성(性)은 중요하다. 남녀가 만나고 암수가 결합하여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는 세계에서 나는 태어났다. 나는 시각적으로 미적인 관점을 제시해야 하는 디자이너의 사고관에서 더 나아가 넓게 바라보길 원한다. 패션 디자인의 세계에서는 남자 디자이너들이 많다. 크리스찬 디올, 입생 로랑, 칼 라거펠트, 알렉산더 맥퀸, 존 갈리아노, 지아니 베르사체, 톰 포드, 마크 제이콥스, 도메니코 돌체, 스테파노 가바나, 조르지오 아르마니, 알렉산더 왕 등등. 이들은 모두 여성향을 뒤집어쓴 남자들이다. 더불어, 사진의 세계에서도, 그림의 세계에서도, 영화의 세계에서도, 음악의 세계에서도, 소설과 시의 세계에서도, 과학의 세계에서도, 철학의 세계에서도 동성에 매력을 가지는 성의 역발상을 가진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과거부터 현재까지 예술과 의식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신체적 상태를 성적 정체성과 같이 동일하게 변형할 수 있도록 의료기술이 발달한 이후, 성별(GENDER)을 전기자극 스위치처럼 바꿀 수 있게 트랜스(TRANS)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별을 성적 정체성과 동일하게 맞추면 삶이 행복해질까? 사회적인 시선에 맞춘 신체적 변형은 자신의 선택에 회의가 없다면 개인적인 기호 또한 간섭할 바가 아니다. 사랑의 형태는 존재하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상태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한다. 나에겐 세상과의 마찰을 시도하는 육체적 껍질도 중요하지만 정신을 담고 있는 본질 또한 중요하다. 존재를 비추는 거울처럼 상대방과 삶의 순간에서 소통을 꾸준히 할 수 있다면 육체적인 사랑의 감정이 아니어도 상대방과 오래갈 수 있다. 생이 마감될 땐 삶의 신호도 갑자기 끊길 수 있듯이 사랑의 신호도 약해질 수 있다. 전기가 생성되고 유지되는 원리를 살피면 전기적인 자극만이 강할 땐 내외부가 터져버린다. 항상성도 한계가 있다. 삶에는 선택에 대한 책임이 존재한다. 생을 준 원초적인 사랑은 선택이 불가했지만 사회에서 만난 사랑은 선택이 가능하다. 그 신중하고 사유적인 선택 속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윤회의 굴레처럼 선택이 불가능한 존재를 만들어낸다. 존재와의 교감을 통해 서로를 동시에 선택하든 선택하지 않았든 간에 양방은 선택하기로 암묵적 합의한 순간부터 책임이 시작된다. 어떤 사랑이든 각자의 책임이 필요하다. 갑자기 글의 논조가 사랑학 개론이 되었는데, 사춘기적 고민인 육체적 성의 본질과 정신적 사랑에 대한 고뇌는 청장년기 시절에도 항상 있었다.


Lou Andreas-Salomé, 백그라운드의 묘미


인기 영화시리즈 <여고괴담>도 있듯이, 여자 고등학교는 은폐의 상징물이다. 부드럽고 여성스러워 보이지만 상상과 달리 거칠고 폭력이 난무하며 선생님들한테 맞기도 남자학생 못지않게 많이 맞는다. 별난 동성애도 심심찮다. 요즘 순정 만화나 인터넷 소설, 단편 영화들을 보면 그녀들을 자극할 심히 유별한 이야기가 인기다. 마초 성향의 남자들도 쌍욕을 하지만 폐쇄된 장소를 은밀하게 훔쳐본다. 손가락질하면서 동성들의 행위에 하얗고 비린 욕망을 흘려댄다. 결국 <여고괴담>도 남자들이 만들어 낸 폐쇄된 거울의 환상이었지 않은가. 실제와는 다르지만 남자 고등학교나 군대처럼 일방향의 성이 군집된 곳은 여자 고등학교 못지않게 문제가 심각할 것이다. 규율적 사회의 잔재이든 유교적 사상의 여파든 형성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안에서 획일적으로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의 행위에 옳고 그름의 판단은 유보한다. 다양한 사랑도 자유이기에 각자가 책임을 진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는 혼동의 시기, 혼동의 장소에서 사춘기가 왔는지 있는지 없는지 무표정했던 마음을 잡았던 사람이다. 사람들은 초인의 소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와 무의식의 아버지 프로이트(Sigmund Freud), 사랑을 부르짖는 불멸의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을 자극하고 그들을 감질나게 하고 그들을 사로잡았던 음울한 여인을 얼마나 기억할지 모르겠다. 천재도 그녀를 소유할 수 없었다. 자살을 시도하며 곁에 두고 싶어 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용히 웃으며 움찔하지 않았던 그녀 옆에서 신의 정신을 키웠을 뿐 그 무엇도 하지 못했다. 신을 믿었던 영리한 길로트(Heinrich Gillot) 목사조차도 그가 볼 수 없었던 신을 그녀에게서 봤다고 부르짖었다. 자라투스트라(Also sprach Zarathustra) 건 초자아 심리학(Superego Psychology)이던 가을날(Autumn Day)의 편지건 위대한 신의 강연(Stories of God)이던 그녀를 향한 선혈이었다.


사람들은 밋밋한 일상사에서 자극을 추구한다. 생의 진동을 가져올 흔들림을 원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 싸구려 영상에서 혈기를 낭비하고 진실치 못한 말들로 가린 가슴을 토해댄다. 하지만 가려진 곳에는 그 무엇도 없다. 스스로 찾지 않으면 빨려 들어갈 깊은 동굴이 있을 뿐이다. 살로메는 성스러운 요한보다 더 야한 춤으로 스스로를 파괴한 여인이 아닌가 한다. 고대 전설처럼 현대에 받들어져 읽히는 지식아래 가려진 욕망과 금기를 향해 관능의 줄을 당기는 동성(同性)이 된다.


대학 때 심리학 테스트를 한 적이 있었다. 널린 여자들 가운데서 혼자만 남성성이었다. 양성성이 이상적이라고 하지만 글쎄다. 내 안에 남자 목소리가 많아서 여성과 남성이 적절히 혼재된 양성인 줄 알았는데, 남성이 우세라니 약간은 예상 밖이었다. 성(性)에 대한 기울기는 중심을 잃은 팬들럼처럼 남자가 됐다가 여자가 되면서 왔다 갔다 한다. 내면의 성은 외적인 모습에 집중된 인간 사회에서 쉽게 간과되곤 한다. 또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목소리를 바꾸면 상대의 진정한 면모는 알아보기 어렵다. 사람의 속에 감춰진 존재를 넘어 서로 본질이 다르더라도 결합점을 찾아가며 일치하는 순간을 발견할 때 합(合)이 아닐까 한다. 여자든 남자든 달라진 모습을 제대로 비출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백그라운드의 묘미'인 것이다.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의 패션에서의 댄디적 성향은 나와는 차이가 있다. 그녀가 온화한 편이라면 난 무척 과격한 편이다. 생김새를 따져봐도 눈썹이 짙고 머리가 검다는 것 빼곤 날카로움이 가득한 나에 비해 루가 오관이 더 크고 분명한 윤곽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한마디로 여성스럽다. 나는 치마엔 별 관심 없다. 성욕은 비슷한 듯 하지만 생활환경이 지극히 달라서 동일하게 펼쳐지지도 않는다. 지성껍데기도 없지만 유세를 떨칠 만큼 뒷받침도 없고 여유도 없다. 전혜린도 집안 배경이 한몫했지 않은가.


이 세상의 팜므파탈(Femme Fatale)이 다 그렇지만 세상의 정리된 질서와 정갈한 일련의 순간을 뒤집어놓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모두들 안정된 생활이 최고라고 말해도 사실 내부는 생을 전복시킬 전율에 목말라한다. 가끔 흡혈귀처럼 누군가를 확 옭아매고 싶다. 하지만 내 발목도 함께 옭아질까 봐 섣불리 내뱉지 않는다. 불현듯 욕망과 혈기로 누군가의 삶과 가정과 의식과 실체도 모두 파괴하고 싶은 본능이 샘솟는다. 그러나 덜걱거리는 마차에 실린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아픈 줄 알기에 부질없는 느낌은 곧바로 지워 버린다. 광기어림도 세간의 찬사를 받으려면 무감할 준비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광기의 발현이 선천성이라고 하지만 자아가 살아있다면 광기는 죽일 수 있다. 현재는 찬사도 필요 없고 손가락질도 관심 없어 그 무엇도 시도하지 않는다. 아직 그 누구에게 어떤 매력도 뿜고 싶지 않다. 하지만 달리는 순간부턴 생각하지 않고 싶다. 그때는 세상에서 돌팔매질받는 미친년이 될지, 숨겨진 광자가 될는지, 가려진 본성을 드러내며 즐겁게 살지 미지수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백그라운드의 묘미를 안겨주고 싶다.


2004. 10. 7. TUESDAY




A Man in the Shadows of the Dark Side


댕의 생각하는 사람
밤에는 광폭으로 변한다.
내 일부의 형상이기도 하다.
야수의 반만 닮은 기질로 먹이를 노린다.

꽉 낀 사회의 틀도 벗어나지 못한 채
많은 부분 고민에 절게 했던 것은 本性의 문제다.
여자도 남자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외국인도 내국인도
풍기는 향취가 달라서 껍데기는 중요치 않다.

세상에는 규격이 존재한다.
가야 할 방향도 앞질러 길이 나 있고
쉬어야 할 장소도 줄지어 세워 있으며
어둔 숲길은 접근금지 팻말이 꽂혀있다.

變態일까.
一路로 걸어가지 못하는 흔들림은
肉質의 피비린내에 흥건히 취함은
광포한 식성에 숨을 밑저울질함은

빈 광야에 서서 육식만 뒹구는 허탈은
총질에 귀 막은 가슴만 내버리고 만다.
발목을 그은 상처에 쉬어 빠진 냄새는
무료한 사냥의 거미줄에 갇히고 만다.

거세한 갑옷을 내려놓고
갇힌 사면의 철창에서 웅크린다.
허기진 배의 살기로 허덕이는

내 안의 남자, 그는 누구일까.


2004. 9. 19. SUNDAY




외부의 생산적인 활동과 육체적인 본능은 어느 정도 같은 선을 탄다. 다만 도덕적이지 않고 싶어도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자유를 사랑했던 한 인간에게 사람의 선택에 관해서는 굉장한 망설임을 선사했다. 한 미침 했던 나는 생각이 많아서인가 생활이 각박해선가 루 살로메처럼 분방하기 어려웠다. 묶어놓은 십 수년의 생활 때문인지, 이상과 실제의 괴리에서 망부석처럼 서 있던 기억 때문인지, 실제로 공간 밖으로 풀리고 나서도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무료해진 것처럼 물밀듯이 다가오는 사람들에 대해 내버려 두자고 생각했다. 이전의 보이지 않는 막은 치워버렸다. 상대가 마음 내키면 받고 아니면 신경 쓰지 않았다. 그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뒤처짐은 느린 걷기로 할 것 다하는 신중함으로 비춰졌으니 말이다.


사람들의 눈길은 외부로 향해있고 이야깃거리도 다 바깥에 놓여있어 관심사가 타인에게 있을 것 같지만, 내뱉은 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자신에게 쏠려있다. 생활이 무료하면 타인에게서 그 이유를 찾고, 자신이 없으면 타인에게서 그 활력을 얻는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찾는 것, 그것이 평생을 추구할 이상향과 맞닿아 있다면 호응하기 어렵다. 나 또한 스스로 채워야 하기 때문에 타인의 것을 채워줄 수 없는 사람이고, 자기에 대해 연구하고 고민해서 내면을 채우는 사람에게 관대한 편이다. 하루가 걸리든, 평생이 걸리든, 자신을 찾기 위한 방황도 쓸모없진 않다. 망각의 사회 속에서 순간에 놓인 자신을 잊지 않고 자신을 찾는 여행을 지속할 수만 있다면 그는 영원히 젊을 것이다.


생활의 폭풍이 가져온 정신적인 분열의 시기에서 '나(我)‘와 ’ 타자(他者)'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명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하늘도 보고 세상도 바라보면서 내 안에서 오랫동안 묶어 둔 다른 얼굴을 꺼내고 있다. 아마 그림을 그리고 깊게 묻어둔 감정을 표현하려면 나의 다른 모습인 그녀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화석이 된 응어리까지도 흘려보내야 하나 지켜보고 있다. 매일 변하는 세상에서 나도 매일 변해간다. 이전보다 생각의 수면은 잔잔해진 편이다. 꺼내지 않아도 될 수면 밑의 이야기까지 살펴보는 작업이 괜찮은 건지 모르겠으나 한 번은 직면해야 할 일이긴 했다. 현학적이고 지식에 몰두한 언어들은 어리석은 주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택했던 방편이었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남에게 손을 벌리기 싫었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지금은 일을 해야 하니까 연결된 생각의 고리에 따라서 판단하고 행동하려고 한다. 실패의 선상에 올라가면 정리에 몰두하기 때문에 감정에 따라 저지르는 것은 많지 않다. 무엇을 하든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것이고, 그 업무가 끝날 때까지는 성실히 지내기로 했다.


과거 어떤 모습이었건 간에 지금에 존재가 살아있고 현재에 서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덜렁거리고 즐거웠던 시절이 빨리 끝나버려서 하루종일 서류와 씨름했던 시간들, 폐허의 중간에서 순응할 수 없었던 감정들, 죽음의 냄새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기본 성정까지 가라앉게 했지만 머리를 많이 써야 했다는 건 일을 해야 하는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쓸모 있는 실전이었다. 괴로움과 기쁨은 항상 종이의 앞 뒷면처럼 같은 얼굴임을 고통 속에 놓여있던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모든 것에서 괴리는 계속될 수 있겠지만 다행히 정신은 광기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십 년 전 광자(狂者)나 방랑자(放浪者)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고의 끝에만 머물렀다.


요즘 일하다 보면 체력이 달린다. 남들은 배수의 에너지와 열정이 넘친다고 평가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확실히 신체의 공간 선율은 하강하고 있다. 간헐적 기면에 빠지는 노쇠해져가는 시간의 한 자락을 감지하며 노트 한 구석에 이년의 준비기간을 적어두었다. 짧은 시간에 외부적인 기반을 올리고 내부의 발현을 시작하려면 둘 다 할 수 있을까 싶긴 하다. 그래도 한번 끝까지 해보고 안되면 미련 없이 길을 전향할 예정이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것 같다. 나의 백그라운드는 큰 바위 얼굴처럼 시간을 벗어난 다른 얼굴의 나였다.





[INDIFFERENCE] SELF-PORTRAIT. PHOTO & PAINTING MIXTURE. 2005. 3. 17 PHOTOGRAPH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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