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Apr 20. 2024

AMIOTIC FLUID

반복, 돌이킬 수 없는, 자전적인 血의 洪水

반복, 돌이킬 수 없는


"하늘이란 배경을 잃어버린 새는 더 이상 새가 아니다."   골드 러시, 유미리


금을 찾아갔던 사람들은 금을 발견했을 때 자신이 가슴에서 품었던 시원한 금빛꿈에 샤워를 했을까. 자신의 눈을 괴롭히던 금빛의 나이테가 사금 캐는 자들의 손목에서 희열에 찬 목소리를 내게 했을까. 날씨가 좋다는 건, 구멍을 환히 비춰서 따갑다. 속속들이 파헤치는 빛을 감당할 수 없어 아무에게나 권총을 들고 싶었다. 내가 이토록 종류를 막론하고 기다림을 배척하는 사람인지조차 몰랐을 정도로 인내심이 바닥나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한다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책을 읽었을 뿐이다. 기관총으로 싸질러도 시원찮을 놈들이 몰려있는 그 자리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소년을 다룬 소설을 꺼내든 자체가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열네 살 아이의 손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면 죄가 가벼워질지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준을 하듯이 책을 비스듬히 구역질이 넘치는 얼굴들 위로 올리면서 그 소년처럼 그들을 갈겨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갖는 순수한 사살이 될 수 없게 순간 노쇠해진 감정이 회오리가 된 심연을 억누르면서 말을 걸었다. 그들이 울컥한 핏물이 조금이라도 튄다면 네 온몸의 피를 토해버릴 정도로 경기가 진행될 거라고 그랬다. 증오심이 뻗친 현장을 몰살시키고 싶었는데 그저 확인만 했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는 무거운 증거이다. 몸이 결리는 것은 여전하고, 욕할 힘은 사라졌다. 참, 산다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힘든 반복이다.

2005. 3. 26. SATURDAY




《유미리와 我夢》 자전적 문학이 쏟아내는 揚水


유미리의 글을 읽었다. 안양에 갔을 때도 영등포에 갔을 때도 또다시 다방에 앉아서 나이 든 사람들과 인생놀이를 할 때도, 틈만 나면 신랄한 언어의 고백을 들으려고 했다. 대체로 아무런 생각 하지 않고 시간이 주는 공백을 즐기려고 하지만 괴로움이 도지면 결빙의 상태로 숨으려고 하는 나로선, 그 순간 비정상적인 동굴, 그러나 탁월한 감각의 늪이라고 불리는 그녀의 외딴 방이 철저히 아늑하길 바랐다. 여자ㅡ 그 특유의 냄새가 삶이 지쳐가고 있다는 조급한 기다림을 없애주기만 한다면, 종결되지 않는 이 아득한 싸움조차도 삶의 숨구멍을 조그맣게 틔워주면서 날 구제하는 신호로 변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글들은 참으로 평이했다. 나는 딱딱한 거북이의 등껍질로 숨어버린 것일까? 근원과의 결별, 제3의 존재로서의 자각, 그룹에서의 집단 따돌림, 성추행, 학교 중퇴, 자살시도, 미혼모. 끝없이 쏟아지는 자신의 문제들을 담담한 문체로 서술한 입술은 어떤 동요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탁. 두 권을 모두 읽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가들조차 그녀의 글을 읽고 아픈 세월이 주는 무게에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는 접했었지만 긴 시간 미뤄뒀던 그녀와의 접촉은 기대를 평범하게 만들어버렸다. 남성편력, 비정상적인 정(情)에 대한 갈구, 독특한 자전적인 성토를 보고 있자니 힘이 빠졌다. 개인에 관한 쓸데없는 허구를 생성하고 현실보다 미화된 존재로 바꾸는 것이 ‘글’이 가진 성격이 아닐지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역시나 그랬다. 그녀를 말했던 평들보다 삶 속의 그녀가 더욱 진실했다. 아주 평이하고 재미가 없는 여자였다. 그렇게 잘 된 소설이라 불려지는 책들은 모두 고백서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로 시작되는 자전적인 문체는 사람들에게 사실이 아닌 것들도 진실이라고 믿게 하는 트랩을 깔고 가는 것 같다. 어느 사다리가 날 보여줄 수 있는 통로가 될까? 이 순간 잠시 포르노작가가 되어본다.




쏟아지는 피로를 참지 못하고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쓰러져 버렸다. 그 즉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인기척이 들려왔다. 목이 뜨끈했다. 눈을 뜨니 고급목욕제가 풀어진 욕조에서 발가벗고 누워있었다. 뿌연 안개를 헤치고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균열을 일으키는 스텝은 영락없이 R의 것이었다. 공중에 풀려있던 하얀 수증기는 드라이아이스처럼 머리카락과 얼굴과 온몸을 감으며 끈적하게 조여왔다. 뜨거운 김을 쏘인 발갛게 달아오른 여린 피부 사이로 한줄기 땀이 흘렀다. 입가에 머문 땀을 살며시 혀에다 댔다. 머리를 뒤로 한껏 젖히며 그가 벗어날 수 없는 갈증을 해소해 주기를 바랐다. 철썩. 언제 면도를 했는지 매끄럽게 보이는 다리가 욕조에 들어왔다. 기다랗게 뻗은 근육은 잠시 후에 꺾일 수 있는 모든 관절을 자유롭게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의지를 상실한 구체인형의 힘없는 고개처럼 의미롭게 돌아가도록 만들 것이다. 철썩. 나머지 다리도 들어왔다. 재미있게도 그의 다른 한쪽 다리는 면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나의 검고 굽은 긴 머리칼처럼 그의 기이하게 뻗은 체모는 사타구니까지 굽슬굽슬하게 말려있었다. 움직이는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앉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단단한 복부가 보였다. 마른 골짜기 같은 그곳엔 웃고 있는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평소에 보지 못하던 웃음은 즐거움을 주었다. 나는 목 안에서 작은 거품을 냈다. 보이지 않았던 또 하나의 얼굴, 그립던 그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창백하게 앓은 피부는 실팍하게 보이는 가슴을 덮고 있었다. 두드러진 쇄골. 활처럼 휜 그곳은 잠시 후면, 너무나 두려움에 떨었던 나의 어깨를 안아줄 것이다. 갈라진 턱. 그리고 섬세한 코. 문득, 나는 의심이 들었다. 그는 혹시? 물이 끓었다. 너무 빨리 뭍 가에 도착했다. 경악하며 입을 막았다. 그는, 바로 R의 형이었다.




감각적 욕망이 저질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때쯤, 의식을 분절할 수 있는 기한 상황을 대입하며 포르노를 그럴싸하게 피해 가는 것이나 또한 나를 서술하는 것, 제삼자의 이름을 대입해 쓰는 것은 별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에는 전지적이든 이인칭이든 일인칭이든 형식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 지어진 것이든 아니든 쓰던 이들조차 기억을 변질시킨다. 하루 내내 나는 무엇에 휘둘려가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유미리의 문체적 성질은 내 일기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리고 동일한 벨트에 묶여있단 사실은 기뻤던 것이 아니라 짜증을 불렀다. 왜 우리의 경험은 다른데도 느끼는 행태는 다른 통을 굴리는데도 간혹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녀를 대한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자전적인 절정이 부여하는 혈의 홍수는, 다른 양수에서 불거진 형체도 비슷하게 보이게끔 조정하는 요소가 숨어있는 게 아닐지 의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공감의 새로운 언어가 될지 모른다.

인생은 무릇, 시간을 노래하는 장터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것들을 사고파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장인의 선물이 나의 소유가 되고, 나의 소유가 골동품처럼 팔려 너의 방안에 자리하게 된 반구의 삶으로 펼쳐진다. 그 매매가 대량화의 기계에 돌려지면서 삶은 복잡하게 인식되지만, 결국 넣고 빼는 열쇠의 조직과도, 너와 내가 성(性)을 교환하는 구멍과도, 화분이 수술에 안착하는 비행과도 같은 이 원리는 닮은 꼴이다. 삶을 태동하는 전기는 나의 아이가 될 수도 있고, 너와 한낮에 벌였던 정사 중에 나누었던 입맞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유보하는 길, 아니 더 단단하게 만들려고 생성했던 양수(揚水)는 고백이란 단어를 낳도록 만든 것이겠지. 신랄한 꿈을 꾸고서 그런 생각에 젖어있었다. ‘나는 어디쯤 있을까?’


2005. 3. 7. MONDAY




포르노그라피적 서술에 대한 부연


"익숙함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영화 <북샵 THE BOOK SHOP>


한창 비행시간이 길었던 2017년에서 19년 사이, 출장지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상영되던 영화는 깊이가 있었고 시중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이 많았다. 넷플릭스와 동시에 방영되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보면서 잠자기에 아까워 그때는 눈을 뜨고 있었나 보다. 북샵의 내용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데, 꿈꾸듯이 위로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원래의 세상으로 흘러나가는 여인의 모습 뒤로, 허무한 듯한 한 줄의 목소리만 맴돌았다.


'익숙함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라니, 평범한 일상에서 색다른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하지만 흥미가 떨어지면 낯섦을 몰아내고 익숙함에 눌러앉은 사람들의 심리를 잘 꼬집은 문장이었다. 오래된 시골집이 너덜거리는 만큼 굳어진 생각의 마을에서 사람들이 갖게 되는 편견, 고정적 인식에 대한 강압을 보면, 인간의 본성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곤 한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본다. 영상을 상상하고 시나리오를 적을 땐 말맛에 집중하긴 한다. 혹은 영상화된 형식을 번역할 땐 시각과 청각만으로도 충분히 흥분감을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으므로 굳이 성에 대한 묘사나 폭력에 대한 이질적인 상황을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화면이 제공되지 않는 기술적인 문장에선 인물의 상황을 장면 속에 투영하는 방식이 효과적이다. 감정이 격했을 때는, 유미리의 글을 읽으면서 파괴적인 본능과 동시에 동물적이고 생성적인 느낌이 떠올랐다. 근원에 대한 의문과 배타적 차별이 만성화된 삶에서 존재에 대한 회의감은 대상을 상실한 격렬한 분노와 성적인 흥분으로 변질될 수 있다. 왜 그녀의 책을 봐 놓고 한 단락을 포르노작가처럼 써 놨는지, 궁금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그녀의 책을 안 본 지도 오래됐으니 이유는 잘 모르겠다.


포르노그라피가 인간의 생명을 이어주는 기본 생식을 묘사한다고 해도 포르노와 포르노를 넘어서는 기준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스어 'Pornographos'에서 출발하는 포르노그라피는 '창녀'라는 의미의 포르노(Porno)와 그라포(Graphos)라는 '쓰인 것', '그린 것'을 합쳐서 '창녀의 서술기록'을 뜻한다. 나폴리에 일하러 갔을 때 포르노그라피의 역사가 담긴 폼페이 유적도 둘러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되지 않아서 매번 밤거리만 한 바퀴 느릿하게 산책하고 왔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인간의 성적인 체위와 행위를 묘사한 작품을 본 적이 있었다. 의외로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조각물과 회화는 육욕을 부를 만큼 낯 뜨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의 가장 밑바닥의 생활의 기본이자, 성의 본능에만 의지해서 생활을 꾸릴 수밖에 없는 가난한 매춘부들, 그들에게 연민을 가졌던 수많은 남성들, 혹은 일부의 여성들. 현재 우리나라의 집성촌은 거의 사라져 가고, 그 위로 신축 아파트들이 높게 지어져 있다. 그러나 숨겨진 불빛 속 내면의 변질된 사랑의 의미들은 관계를 복선적으로 꼬면서 인생을 혼돈스럽게 만든다. 매춘부들의 야성적인 삶을 스케치한 툴르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이나 화가들의 누드모델에서 여류화가가 된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  《날개》는 펴지 못하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李箱 金海卿)처럼 수많은 작가와 화가들이 포르노의 본질인 창녀들에게서 재생의 영감을 느끼는 것도 세상에서 생기를 잃어버린 자신의 내부처럼 반복적으로, 하지만 돌이킬 수 없게 노골적으로 비릿하게 곪아버린 냄새에서 터져버린 양수의 질감 같은 본질을 발견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시간을 재어보면 최소 십 분에서 길게 삼십 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시도 때도 없이 살갗이 만연하면서 오직 성의 소비와 유혹만 있는 것은 포르노이다. 처음 우연히 싸구려 포르노를 보았을 때 스토리상 저런 살색 인물이 나올 때가 아닌데 줄기차게 벗는 이유는 무엇인지 의문스러웠다. 정확한 성교육이 없는 상태에서 정상적인 욕망이 안착되지 않은 남성적인 세계에 이런 이야기가 만연한다면 여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형성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포르노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 영상에 심취했던 20대 초반, 일본 야동이나 미국과 유럽의 포르노물을 연구목적으로 한 달 정도 봤었다. 그리고 포르노노출수위가 같지만 시간 할애는 약간 적은, 소위 예술로 분류된 영상도 보았다. 사실 예술이건 포르노건 둘 다 오래 보면 밥 먹을 때 상상이 올라와서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한참 화면을 응시하고 나면 계란 흰자 사발을 연달아 먹은 역함이 올라온다. 물을 마셔도 씻기지 않는 달걀비린내가 연상돼서 그 당시엔 어렸을 적 목이 아플 때 생달걀 하나 먹던 추억조차 밀어내도록 달걀은 잘 먹지 않았다. 가끔 식탁에  접시 나오는 달걀프라이를 볼 때마다 난감할 정도로 말이다.


설명이 길어지는 것을 보니 포르노라는 상상의 늪이 그리 신선하지 않은 모양이다. 포르노그라피를 넘어선 문학으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의 롤리타 Lolita와 헨리밀러(Henry Valentine Mille)북회귀선 Tropic of Cancer을 들 수 있는데 애정의 심도와 변질의 강도에선 롤리타가 승(勝)이다. 인간의 내밀하고 모순적인 본질을 어린 여자와 나이 든 남자의 상호 구원적인 구도를 통해 뒤틀린 근친구조의 폭력적인 사랑조차 아름답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간혹 이런 작가의 잘못된 문학적 상상이 남자들의 그릇된 성가치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싶다. 지난번 머리를 하면서 봤던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의 《총, 균, 쇠 Guns, Germs, and Steel》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수간(姦, Bestiality)에 관한 에피소드였다.


재러드의 친구였던 한 의사가 젊은 시절, 병실에 들어온 한 부부를 만나서 벌어진 이야기였는데, 남성적 호기심이 인간적 사랑을 누르는 내용이다. 한 남자가 정체불명의 세균에 감염되어 폐렴을 앓고 있었고, 그의 아름다운 아내가 통역을 맡게 되었다. 여인은 남편의 병세를 염려했고, 병원생활에 불편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젊은 의사 또한 낯선 질병에 대한 연구로 지쳐있던 상태라 의사의 필수 규정인 비밀을 가족들에게 엄수하는 것을 까먹고 만다. 그는 환자의 아내에게 남편의 병세가 어떤 위험요인 때문인지 밝혔고, 혹시 남편에게 감염을 일으킨 만한 성적 체험을 했는지 물어보라고 하는데, 여자가 남편에게 묻자 남자는 기어들어갈 듯이 대답을 한다. 그리고 여자는 분노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침대 옆에 있던 무거운 유리병으로 남편의 머리를 힘껏 내리치고 병실로 뛰쳐나가버렸다. 남편의 의식을 되돌리는데 한참이 걸렸고, 남편의 엉터리 영어로 다시 해석해 본 봐, 남자는 가족소유목장에 가서 양들과 여러 차례 성교한 사실을 부인에게 이야기해서 그녀의 분노를 산 것이었다.


가로막힌 폐쇄된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시간이 돌아가거나 의식이 건전해지기란 어렵다. 일본에서 자랐던 유미리를 보면서, 혹은 일본의 다른 작가들도 그렇지만 아쿠타가와 상을 탔던 작가들의 글에서 발견되는 양수처럼 흘러내리는 물의 이미지와 자살에 대한 충동은 항상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선가 나는 바삭하지 않고 눅눅한 습기가 가장되게 가려져 있는 일본작가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익숙하지 않은 낯섦은 언제나 긴 설명과 해석을 요구한다. 확실히 삶에 논란이 되는 것은 숨겨진 것들이다.


2024. 4. 20. SATURDAY




도도하고 고요한 의식의 세계


거지가 돈을 벌면 거지는 구걸하던 깡통을 금으로 바꾼다고 한다. 거지라는 직업을 버리지 않고 구걸하는 깡통을 금덩이로 잘 포장한다는 말에 픽, 실소가 터져 나왔다. 습관처럼 잠시 냉소하다가 인간의 욕망이 가진 본질 앞에서 씁쓸해졌다. 흘러가는 시간을 모두 삭게 만들었던 어리석음에 나는 참을 수 없어했다. 영리함과 밝음과 찬란함이 소용없는 순간에 대해서도 고민을 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우리는 돈을 벌면 더 자유롭게 이전의 삶을 지우고 멋지게 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을 벌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다시 돈을 사용하여 꾸미고 돈이라는 허상에 구속당한다.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지폐덩어리 밖에 되지 않는 금빛 샤워에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이십 년 전의, 삼십 년 전의 나는 괴로움에 빠져있었다. 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존재하지도 않는 더 큰 이상을 위해 눈을 감고 귀를 막는지 그 시궁창 같은 속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어떤 의미인지 알기도 어려웠기에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도덕을 찾아, 의미를 찾아 의식의 세계를 돌아다녔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나는 예전보다 많이 정제되어 있고 폭풍같이 휩쓸었던 시간들에서도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잊을만하면 버려버린 기억들이 먼지 섞인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하지만 그걸 무심히 관찰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한 방에 누르면 바로 터지는 실핏줄 같은 심장의 뿌리가 어디로 튈 줄도 모르면서 외부로 감정을 흘리는 게 도움이 안 되는 사실도 인지한다. 내부로 진입하는 악한 것들에 대한 성냄과 악의가 나의 본체를 파괴하고 썩은 내를 풍길 수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모순처럼 보이겠지만 지금까지 행해왔던 불인정은 굉장한 긍정일 수 있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감정이 이미 방향성을 상실했는데 특정인을 향한 것 같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예전엔 이 모든 것이 나만의 생각과 감정이라서 구체화된 형상을 획득한 말을 던져놓곤 구멍 뚫린 의식들을 난사하며 사람들이 충격을 받건 눈물을 흘리건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돌아본다는 것은 의미롭지 않았다. 엇나간 행동에 대한 반사로 나의 눈과 귀를 보호하지 않고 감각기관을 통제하지 않으면 그 심심한 장난과 탐욕이 파리떼를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가르침에 손톱을 깨물어본다. 괴로운 마음을 잠재우고 생각도 결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에 반성한다. 가끔 일상 속에서 감정의 통제를 잊어버리지만 그것은 오직 나의 한 시기를 매끄럽게 다듬고 표출할 때만 유효하도록 해야겠다. 나와 상관없는 타인과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


나름 부드럽게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도 친한 친구한테 쉬크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난 원래 그래.


전쟁의 우울이 한껏 깔려도 무심하고 도도하게 보일 것이다. 천천히 시작한 만큼 누구보다 늦게 걸어가고 싶다. 모두가 멸망한 뒤에도 참을 수 없게 소란했던 의식을 깔고서 잠시 고요한 세계를 맛보게 말이다.


2024. 3. 23. SATURDAY





[GLOOMY SATURDAY] 2004. 8. 18. NOTEPAD. MEMENTO SKETCH by CHRIS



우울하고 덥다.

태양이 너무 눈부셔 답답한 가슴

눈 위로 끓어오르는 열기가 싫다.
조용히 왼쪽 포켓에 넣어둔 쇳조각을 만지작.

지난한 다툼에 깊은 한숨.
이젠 놀이가 되어버린 싸움.
그림도 잘 그려지지 않는다.

마음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숨이 차 오르는

심장의 그림을.



Feeling gloomy and hot.

The sun is too dazzling, suffocating the chest.

The heat boiling over the eyes is unwelcome.

Quietly, I touch the piece of iron tucked into my left pocket.


A deep sigh over the lingering dispute.

The fight has turned into a mere game now.

Even the drawings don't come out well.


I want to draw the picture of my heart.

The picture of breath catching,

The picture of a racing heart.



2004. 8. 18. WEDNESDAY


작가의 이전글 DIARY, POEM AND THE MOVI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