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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21. 2024

LA CéRéMONIE

의식 儀式,  선량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겐 혐오스러운 부분이 있다.

[La Cérémonie, The Ceremony, Claude Henri Jean Chabrol] 1995. MOVIE POSTER


소피(SOPHIE), 현명한 여자. 그렇게 현명하지 못한 세계에서 이렇게 불리는 것은 기쁜 일인가? 문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문맹의 핸디캡은 요리에 재능 있고 집안일에 능숙하고 고분고분한 홈메이드가 되면 감각적인 생활의 필요에 의해 사라진다. 사람들은 흔히, 힘이 약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을 일컬어 선량하다고 지칭한다. 그러나 본성만으로 한 인간을 판단하기에 우리의 주변은 많은 것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회적인 지위, 과거의 행적, 주변인, 재산유무, 정치적 영향력, 존경의 척도, 각종 평가와 수많은 속설들. 그렇다면 타인을 보는 잣대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웅장한 전주곡을 틀고서 무위로 돌아가자며 살인을 저지르는 십 대의 행동을 좋다고 말하기엔 그 또한 다른 측면에서 보면 불쾌하고 철없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다들 선량하다고 말한다면 더욱 헷갈릴 것 같다. 서로를 터치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세계. 어떤 식으로도 불편함과 불합리에 대해 항변하지 않는 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세상은 침묵을 고수하는 자에게 진실을 말하길 요구한다는 점에서 강압적으로 느껴진다.


영화 <의식 La Cérémonie | The Ceremony>에서 보이듯이 끌로드 샤브롤(Claude Henri Jean Chabrol)의 복선은 반 부르주아적인 지식인이 견지하는 좌파적인 시선을 그대로 투영한다. 자본화가 진행될수록 그 안에서 파생되는 인간들의 계급의식은 끝나지 않았다고 그는 단언한다. 착취와 억압이 부드러운 말로 포장되지만, 정중한 태도를 들춰보면 자신들보다 하향인 사람들을 선정하고 그들을 지배하려는 권력적인 속성이 동물들의 무리근성보다 체계적으로 완성되어 감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을 타파할 방식으로 자본계급의 내부에 소외된 계층을 삽입시키는 우회적인 방식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격의 뒷면을 조롱하거나, 가정과 사회에서 좋은 모습으로 인식되지만 이중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자들의 모순점을 처단하려고 술수를 꾸민다. 물론 그것은 제삼자가 보았을 때, 죽음조차 우연한 사고처럼 보이거나, 그 행위를 자행한 당사자가 필연적인 이유를 갖도록 타당성이 조정되어 있다. <의식 La Cérémonie> 이 영화에서도 역시 부르주아의 가식적인 이중 불륜을 꼬집는 영화를 삽입하거나 살인을 저지르고도 거짓을 일삼는 자의 비극적인 말로를 암시하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돈조반니(Don Giovanni, K) 2악장을 틀어놓으며 액자적인 수로를 통해 죽음의 의식을 거행하는 사람들의 비도덕적인 행위의 결과를 비껴가고 있다. 결국, 죽이는 자의 도덕적 문제는 이미 사건과 관계된 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파괴했기에 상관할 바가 아닌 것이다. 다만, 보는 자가 해야 할 것은 열심히 어질러진 내부를 지켜보면서 부도덕을 경계하는 '자가 정신 청소(Self-Mental Cleaning)'가 전부이다.


생활에 짓눌려 살아온 나는 사실 지식인도 아니고, 우파나 좌파에 확연한 구분을 둘 만큼 특정의 사상운동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정치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 노력할 생각도 없다. 그러나 굳이 정치권에서의 실세와 허세 다툼에서 머리를 싸매지 않더라도, 실생활에서 자행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저질적인 형성은 주변의 생존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에 자석에 끌린 듯 관심이 간다. 피 선택적 핸디캡이 자주 등장하는 사건의 증거와 인간의 본성, 사실과 진실, 판결의 추이까지 복합적인 인과관계가 없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가 형성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타인을 보았을 때, 선량하게 보였던 사람들에게서 혐오스러운 부분을 발견하곤 한다. 선량하지 않은 그들을 보면 섬뜩하도록 빨간 눈의 쥐새끼가 떠오른다. 한밤의 아리아처럼 한순간에 끝나고 탄식이 되겠지만, 그 순간에는 모든 의식(意識)이 곤두선다. 잠을 잘 수 없게끔!


불규칙한 인간의 내부적 반발과 고발성 종류의 영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생활의 모순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씁쓸했다. 많이 피곤하다. 재미 찾는 것도 시들하다. 분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를 들추는 것도 어느 날은 좋았다가 어느 날은 싫었다가 변덕스럽다. 날은 어둡고 기온은 따스해진 날씨처럼 기분이 우왕좌왕이다. 이성은 언제까지 나를 놓지 않을까?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무력감이 계절이 바뀌면 사라질 춘곤증이길.


2005. 4. 3. SUNDAY




"선량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겐 혐오스러운 부분이 있다."


기본적으로 심층 저변에 깔린 자각적인 인식인 반면에, 일반적으로 단순히 상대를 본다고 해서 평가가 대한 판단은 실행하지 않는다. 실질적 관계를 형성하게 될 때부터 생활의 부딪힘 속에서 타인에 대한 의견이 발생한다. 누가 뭐라고 하던지 간에, 첫 조우한 대상에 대한 좋고 나쁜 이미지는 없다. 그래서 의심하거나 혐오할 것도 없다. 반전을 사랑한다면 일상의 어떤 얼굴에도 패러독스(Paradox)를 가장한 패러디(Parody)가능하다. 진실을 원한다면 가슴을 후벼 팔 수 있도록 참혹하게 이야기할 있고, 그냥 편안한 관계를 원한다면 조용히 침묵할 수도 있다. 아마 편안함 속에서 우리의 관계는 의식적으로 삭제되겠지만 말이다.


프렌치 뉴웨이브(French New Wave)로 불리는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세대의 감독, 끌로드 샤브롤의 우회적이고 대조적인 계급타파 방식은, 직접적인 현실비판을 과감한 예산절감으로 코믹스럽게 화면을 잘라먹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Neo Realism)을 우아하게 차용하여, 풍요로운 세상의 모순을 풍성한 예술적 감각으로 고발한다. 변하지 않는 시궁창 현실을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핸드헬드로 보여주는 극사실주의의 편집에서 벗어나, 감각적인 음악을 틀고 계급의 층위를 복선화 하여 사회를 비판하는 샤브롤의 구성은 심심치 않게 샤브롤리안(Chabrolian)을 제창한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이나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차용하는 역설적인 비판에 과감 없이 사용되곤 한다. 관객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거장에 대한 오마주는 발생하고, 현실을 새롭게 해석하는 시도가 다양하게 전개된다.


극 사실과 현실 간의 괴리에서 발생하는 사유의 문제, 그리고 얼마나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보여줄 것인지가 요즘 영상에서 표현의 기점이 되고 있다. 비밀에 접근하고 싶은 자들은 현상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지나간 역사의 흐름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창의적 시선과 새로운 시도들은 단편으로 전개되기 보단 시공에 누적되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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