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Apr 21. 2024

JUSTICE

우연한 사고와 판단의 오류, DECISION

우리는 걷고 있는 대지가 확고하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론 언제든지 입을 벌려 우리를 삼켜버릴 불안한 대상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인류에게 세계사는 무한히 긴 것처럼 보이지만, 지구의 입장에서는 짧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 차원에선 확인불가능이고 설명하기 어렵고 생채기도 없는 돌발적이고 찰나적인 사건일지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누리는 자유 때문에 멸망해가고 있다. 네시 반, 하늘엔 처음으로 오리온 좌가 보인다. 그것은 누구를 쫓고 있는 것일까. 《법(法),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Friedrich Durrenmatt in JUSTIZ》

                                                              

사고, Die Panne. 무척 얇은 책이지만 그것이 내는 소리는 시끄러운 브레이크의 파열음이었다. 우연히 자동차 사고를 겪게 된 한 남자의 하룻밤이 참혹하게 변하는 과정을 담담하고도 섬뜩하게 묘사하는 글을 읽으며 무척이나 놀랍고 괴로웠다. 새로운 접근이란 희열도 있었다. 공포의 실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음을 목격한 벙어리의 기분이었다.


대학시절, 프리드리히 뒤렌마트(Friedrich Durrenmatt)의 책 처음 본 순간 떨려서 바로 샀다. 집에서 그 얇은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파도가 된 내용과 포말진 충격에 대해 장시간 설명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그의 책을 수집했다. 지금은 거의 절판된 뒤렌마트가 말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하다.


가벼운 언어로 인간의 무자비한 언행과 착오를 거듭하는 오판을 강도 높게 질타한다. 일탈을 꿈꾸는 자의 한가한 오후의 드라이브가 알 수 없는 모터고장으로 불시착한 비행기처럼 하이웨이에서 갑자기 멈추게 되었을 때, 길 잃은 한 인간을 유혹하는 저녁 식탁의 불빛은 보이지 않는 피보다 진했다. 진지한 언어로, 마작 같은 놀이처럼 벌어지는 판결의 장터는 경악, 그 자체였다.


영화 <로스트하이웨이 Lost Highway>보다 더 강렬한 아픔이다. 보이는 겉모습은 가볍기 그지없지만 심도는 강하다. 어쩌다 보니 법의 테두리 권역에서 온갖 구경을 하고 그에 압박받는 인생이 되어버렸지만 모의재판이 될 수도 없는 현실은 책상 위로 올라가 밧줄을 매달고 발길질로 의자를 차버린다고 해서 하룻밤이 저지른 잘못된 만찬을 외마디 절규로 악몽이라 치부하며 쉽게 넘겨버리진 않는다. 그래, 그 이야기가 너무 생생하다. 역하게 또 올라온다.


우리 세 사람은 할 일이 없는 퇴역 노장이다. 우리가 노름을 하던가? 아니, 우리는 너무 고상하다. 전직의 업(業)을 농담처럼 따먹으려 평소처럼 판사와 변호사, 검사로 역할 분담을 하고선 멋진 스포츠카가 고장 나서 집을 방문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다. 우리를 서빙하는 가정부 M을 시켜 맛있는 음식으로 기를 죽인 다음, 그 새로 온 손님을 피고라고 설정하고 재미있는 법정 놀이를 한다. 이방인이 평소에 가지고 있던 신념, 생활태도, 주변관계, 가끔 즐기는 외도까지 파헤쳐 본다. 그의 질린 표정은 조금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한번 느껴보는 것도 좋은 거야. 가볍게 총채질하는 죄(罪)를. 놀이가 끝나고 고개 숙이곤 타박이며 올라가는 그의 걸음이 무슨 의미이던가. 우리는 불을 끄고 잔다.


다음 날 아침, 가정부 M은 오렌지 주스와 흰 빵을 담은 쟁반을 들고선 이방인의 방을 똑똑 노크한 뒤 문을 연다. 창의 눈부신 빛에 어린 검은 그림자. 누군가 혀를 길게 뽑고 죽어 있다. 산산 조각나는 컵과 바닥으로 뒹구는 빵 조각과 잼들. 기나긴 비명을 지르는 가정부. 정원에서 화초를 손질하고 있던 사람들. 째지는 소리에 모두 고개를 돌린다. 어제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었던 사람 중 하나가 급히 뛰어 올라온다. 창문의 빛도 막아버린 움직이는 그림자. 참혹한 광경에 약간의 경기를 보이며 밖을 보고선 소리친다.


"어, 죽었군. 이런. 여보게! 여기 좀 와보게. 그가 그만 죽었지 뭔가!"


짧은 감탄사가 되고 말 한 인간의 생을 누가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보다 보면 소름이 돋는다. 죽인 사람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반대급부로 죽은 이도 깊은 반성의 충동에 목을 매지만 그 연유도 모른다. 참 지랄 같은 인생이다.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뇌파가 던지는 회색 주름은 언제나 나를 그로테스크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사람은 술이다. 한마디로 냉철한 지식의 그릇된 결과에 탁주를 들고서 원샷하게 만든다. ‘법’의 결과 또한 참 황당하다. 영화화된 결과물은 입수하지 못해 못 봤다. 알게 뭔가. 분명 보면 술 먹고 깽판 칠 건 뻔한 노릇이다. 기이하게 조율되는 삼각대에 놓인 인생들.


나는 냉철한 판단의 저울이 진실과 평등에서만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감고 있고 오직 인간들이 법조문에 돋보기를 들이밀고 조작된 눈깔에 정의라고 글씨를 새긴다. 그것도 영원한 진리인가? 웃기는 소리다. 다 자기네들이 만들어 놓고 무엇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가.


범행이 일어났고 그에 대한 변론과 반박이 일어난다. 가운데 낀 판사는 들어보고 도장을 찍는다. 나는 도장밥이 되는 거야. 책임과 평화의 시간을 창문도 없는 네모진 감옥에서 보내야 된다. 트랍스, 주인공 이름처럼 트랩으로 조여 오는 쥐덫은 깜짝 놀래기엔 너무 강렬한 물림이다. 작은 생채기도 방심하고 오래 놔두면 콤콤하게 썩고 만다. 보이지 상처가 어느새 파상풍으로 곪아가며 열을 시퍼렇게 내면서 화딱질나게 죽게 만드는 거다. 난 죽기 싫다. 발악을 해보자. 꼼지락 거리며 "여봐여, 난 작은 쥐야." 하고 외친다.


근데 누가 이 덫을 제거해 주는가. 나에게 쥐약을 먹이며 "더러운 쥐새끼 죽어!" 하고 외치거나 몸뚱이 채로 통에다 넣어 쥐불놀이 인생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이 책. 다시 보고 싶긴 한데 또 없다. 어디로 간 걸까. 세 권 다 누구의 손에 쥐어졌는지도 기억 안 난다. 그들은 잠 잘 자고 있을까. 한마디로 공포가 계속되는 듯싶다. 내가 이 순간 잠을 자버리면 악몽으로 깰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잘 수가 없다. 내 현실은 한마디로 레퀴엠이거든.


2004. 10. 24. SUNDAY




마이클 샌델(Michael Joseph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는 작년에 유튜브로 먼저 강의를 시청하고서, 도서관에서 책으로 읽어보았다. 최고의 베리타스에서 학생과 선생 간에 정의와 진실, 윤리와 도덕, 법과 현실에 대해 다양한 토론을 할 수 있고, 역사상 세계최고 지성들의 철학 사상과 현대의 정치적 이론과 합법적인 경제 논리, 동시대 걸출하고 유명한 인물들과 현실적 생활의 사례를 들어가며 이론적 편견을 깰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의 강의보다는 심도 있는 접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탑스타가 출연하는 토크쇼 무대처럼 이야기가 화려하고 정갈해서 아쉬웠고 그들의 이야기가 돌아서면 잊히는 가십(Gossip)과도 같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야 할 정도로 정의라는 명제와 삶에 대한 이해가 표면에서 겉돌았다.


대학 때 수강했던 법학수업의 과제로 법정참관을 하고 보고서를 쓴 적이 있었다. 참관 포지션은 기자의 시선으로 설정했다. 당시는 나의 일이 아니었기에, 감정 없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 동부지방법원이었고 몇 번 법정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523호 전후였을 것이다. 당시 생활의 텃밭에서 무럭무럭 피어나는 악의 꽃이 있음에도 그렇게 냄새가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나의 역할적인 부분에서는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구속이 동반한 돌봄의 문제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터였다. 삼 학년 때였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심드렁해져서 듣고 싶었던 수업을 한 번에 몰아 듣고 학교생활을 빨리 정리해 버리자는 생각에서 선택한 수업이었다. 


그때 법정은 처음 가봤었다. 그런데 한 섹션만 들었는데도 이상했다. 법의 판결과정이 이렇게 단순하고 서류적인 것이라면 사회적 정의가 가능할지, 그리고 판결의 여파가 인간의 개별적 삶에서 공정하게 발휘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판결을 위한 모든 과정들은 영화에서 그리던 것과 달랐다. 학교나 직장에서 제출하는 보고서 형식처럼 짧았고, 형식적이었고, 건조했다. 법정의 문 앞에 스케줄표가 나열되어 있었는데, 사건 시간배정이 누군가 반론 한 마디 하기에도 짧았다. 일련의 스케줄처럼 열거된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은 어떤 정의의 잣대로 판단이 가능할까 의문이 들었다.  글은 글이요, 학문은 학문이구나, 참관만으로도 감지할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문서와 보고의 세계였다. 곧, 그 속으로 내 삶을 밀어 넣기는 어렵겠다고 여겨졌다. 그런 워밍업을 거쳐, 실전으로 갔을 땐,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실존적 구토 La Nausée)보다 더 심한 역겨움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벌이지 않았던 알지도 못하는 사건에 대해 연구를 하는 것은 스파이나 탐정이라도 된 듯, 여러 인간의 머릿속을 파고드는 일이다. 직업적인 일로써 사건 연구와 사건을 서술하는 것과, 생활 속 현실의 사건 해결은 다른 말이다. 아무리 냉정해져도 아무 가치 없는 빈말을 조합하면서 한때 흥미로웠던 기계적인 산수로의 인간사가 되지 않았다. 착하다, 희생적이다, 똑똑하다, 안타깝다까지 그 모든 말이 비합리적인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변질적인 구속에서 탈출하게 만들진 못한다. 육하원칙에 의해 서류를 꾸미는 행위조차 손을 떨리게 만든다. 맞춤법과 문맥 하나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다른 언어 하나 제대로 말하고 쓸 줄 모르는 인간들이, 수십조 수경으로 올라가는 것은 주워 들어도 알파나 베타와 감마, 델타도 모르는 쥐새끼들이 거대하고 야심 찬 이상을 얻어낼 수 없는 것은 분명한데, 난 또 보이기 와는 달리 지배적이고 권력적이기보단 변덕스럽고 시니컬해서 멍청한 놈들이 좋아하는 것에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법정에 있으면서 냉소적으로 지켜보기만 했지만 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회의에 가득 찬 내적 갈등이 심한 인간이구나.' 슬쩍 봐도 말도 안 되는 수식에 빨간 줄 긋지도 못하고 그 오류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집에 오면 허옇게 변해버린 얼굴에 기분이 상하고 말았다. 그걸 아름답다, 신비롭다, 지적이다, 매력적이다라고 하면 뭐라고 답한단 말인가. 껍데기 바깥 말들과 곪아버린 내부 심사가 지진 나도록 엇갈리는 것은 자명하다.


전쟁을 겪으면 사람들이 평생의 후유증을 앓게 된다. 우리가 현대의 지성으로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직접 전쟁을 겪으며 곪고 썩어 들어갔던 상흔을 적어 내렸다. 나는 아마 최고의 지성이 될지도 모른다. 남들이 평생 경험할 각종 인생의 전쟁을 한방에, 그리고 피가 바위에 스며들듯이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겪었으니까. 거기에 모든 시간적 순서가 전복된 인간사까지 더하면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인생의 아이러니이자 재미있는 점은 모든 것을 수집하고 분류하고 분석했던 그 분노스럽고 억눌린 시간 덕분에 변덕이 심해서 이것저것 하고 싶던 마음도 버리고 한 곳에서 지속적으로 일도 하게 되었고, 주머니에 천 원 몇 장이면 충분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가계부건 출납부건 숫자기록에 전혀 관심이 없던 머리로 회계와 경영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먹고사는 것에 대한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남들이 쉽게 포기하는 일도 한자리에서 오래 지켜보다 보니 기다릴 줄 아는 여유도 생겼다. 내가 참아온 긴 시간에 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며칠 전, 조금은 기다릴 줄 알고 남의 실수를 눈도 찌푸리지 않고 용인하게 되었음을 보았다.


"아니, 정말 몇 번 째야?"

- 뭐 그럴 수 있죠.

"화 안 나세요? 의외네. 난 완전 짜증 나던데."

- 전구 가는 게 어때서요. 수고하기도 했고.

"그래도 며칠을 버렸잖아요. 돈도 더 들고."

- 자기가 실수했으니 그 정도는 마무리하겠죠. 다른 사람 쓰면 절약되겠지만, 누구나 돈도 필요하니까요.

"유해지셨네요?"

- 부장님이 오픈하면 영업 좀 잘 뛰세요. 난 예술하면서 돈 좀 벌어보게.


농담이었지만, 머리는 써야 할 거 같다. 마무리 공사가 며칠 길어진다고 해서 화를 낸다고 갑자기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질 것도 아니고, 창의적 영감이 흘러나올 것도 아니다. 미리 준비하긴 했지만,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서 한 번은 다른 길을 열긴 해야 했다. 구속에서 벗어나 너무도 돌아왔던 세상이 예전보다는 황망하거나 이론적이지 않다. 그리고 현재는 내가 벌인 일을 책임지는 것이라 이전만큼 무겁지 않다. 처음 한국에 와서 시작했을 때처럼 다 한번 밀어 넣어보고, 안 되면 그냥 다 엎고서 원래 마음에 두던 걸로 돌아가야겠다. 


모두 나쁘기만 했다면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다. 긍정의 한줄기가 있어 매일을 다시 바라본다. 불만스럽고 이해가지 않는 삶에서 자신만의 태도와 관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인생은 아름다운가?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다. 인생은 슬픈가? 그렇게 보일 수 있는 사람도 복을 받은 사람이다. 감정이 살아있고, 그 순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복된 것이다. 나 또한 감정까지 극복한다면 인생은 아름다울 것이다. 사실 추함도 아름다움도 같지 않던가. 싱싱했던 어린아이가 누구나 겪는 시간 속에 놓이면 늙고 죽음을 맞이하듯이, 사람은 한 바퀴를 돌게 되어있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의 고리에서 오늘을 건져 올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 


과거와 미래의 저울에서 오늘의 시계추를 다루는 것은 공정함을 위해 율법의 눈을 가린 디케(Dike)도 아니고 유스티티아(Justitia)에게 한복 입히고 법전을 든 한국적 정의의 여신도 아니다. 칼은 보호용으로 차고 정의든 진실이든 인생의 저울추를 만지는 것은 내 인생을 사는 바로, 나 자신이지 않는가.




[GODDESS OF JUSTICE] 2024. 4. 21. PROCREATE IPAD-PRO. DRAWING by CHRIS


한때 만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림이 진지하지 않고 만화 같이 그려진. 책 대여점에 들리면 만화 한 묶음, 로맨스 한 묶음, 일반책 한 묶음 빌려왔다. 친구들과 돌려가며 읽었다. 덕분에 주변엔 책들로 뒤덮여 있었다. 보고 싶은 책 다 보고 나면 다른 책 대여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책을 다 살 수는 없었으니까 서점에서는 신간서적 나오면 서서 읽었다. 학교에서는 공부는 뒷전이었다. 책상 위에 교과서로 성을 쌓아놓고 책상서랍엔 빌려온 책으로 가득 채웠다. 하루에 여덟 권은 기본이었다. 속독으로 쓱 보고선 내용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후루룩 넘겼다. 시간 내에 못 읽으면 책을 베고 잤다. 내용이 머릿속으로 들어오길 기대하면서. 그 당시 난 글이 주는 깊은 뜻은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냥 글자들과 책 냄새가 좋았다. 요즘은 책을 펴면 글자가 따로 논다. 눈에 힘도 주어야 한다. 다른 이의 마음을 보기 힘든 만큼, 글을 편하게 읽기 어려운 것은 왜일까. 한때의 기억으로 머릿속에서 책을 되새김질한다. 기억이 떠오르면 새롭다.





지나온 삶은 희생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고, 원망이 가득했던 시기에 아무도 말을 쉽게 걸지 못했다. 사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희생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기에도 흘러간 시간에 비하면 충분치 않았다. 즉각적으로 반응이 날카로웠다.


그렇게 훈수 둘 거면 네가 해보던지?


아무도 나의 독설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욕망에 휩쓸린 사람들에겐 힘든 짐이었고, 책임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운명은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시간에 놓인 현실적인 좌절과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의 구도에서 살펴보면, 혹여 변화가 있다고 해도 빨리 다가오기를 바라면 그 변화의 시간까지 기다리기 어렵다. 무상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에서 나는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

 

쉽게 포기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길을 가는 것은 힘들다. 매일 숨을 쉬는 것처럼, 먼저 나의 생각과 의식과 감정과 생활을 다듬어본다. 정해진 것을 꾸준히 하면서 비약적인 도약을 꿈꾸는 환상은 제거해 간다. 나를 얽어매는 중독과 환영에서도 벗어나고 세상을 향해 깨어가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진창에서 벗어나서 다시 돌아온 이후, 지금까지의 선택과 결정은 내가 했다. 타인의 말들과 평가에 흔들리지 않게 되면서 타인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노예스러운 삶은 없어졌다. 주변이 변하든 변치 않든 나는 변해갈 것이다. 변덕은 꾸준하겠지만, 그 재미는 간혹 나를 위한 유희로 열어놓는다.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면서 희생 없는 나만의 길을 열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LA CéRéMONI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