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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22. 2024

THE MONUMENTS MAN

澗松 全鎣弼 간송 전형필 | 문화의 의미, 존재의 가치

[간송 澗松 전형필 全鎣弼, 신윤복 미인도] 2014. 3. 24.


<간송(澗松:전형필全鎣弼)이 지켜준 보물>이라는 SBS 스페셜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 역사의 한 흔적을 담고 있는 위대한 예술작품을 지켜온 한 남자와 그 작품에 가려진 가족들의 삶에 눈길이 갔다. 우리는 인생을 지탱해 줄 최고의 영웅을 찾아 헤매고, 그가 선사한 머나먼 천국을 동경한다. 그러나 생의 출발점이자 뿌리가 되는 위대한 아버지를 둔 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가 보다. 인터뷰 마지막 간송 선생의 큰 아들 전성우 씨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무슨 의미였을지 뭉글한 아픔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대한 역사전쟁의 암투 뒤에서 인간은 한낱 작은 도구에 불구하다. 그럼에도 그 작은 존재가 자기만의 의식을 가지고 행동한다는 것은 집단적인 체계에서는 불편하고 어려운 삶의 진실일 것이다.  



"한 세대의 문화를 전부 파괴하면 존재 자체가 사라져 보이게 된다.

If you destroy an entire generation of people's culture, it's as if they never existed"

<Lt. Frank Stokes in The Monuments Men>



영화 <모뉴먼츠맨, 세기의 작전 The Monuments Men>에서 미술사학자(Art Historian) 프랭크의 말처럼, 시간의 의식을 통틀어 보존할 가치는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설정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통해 대상에 대한 면죄부와 지속성을 결정해 간다.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일당 5억 원으로 평가된 모그룹 사주의 노역금을 보면서 누구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세상의 면책금이 어느 누구에게는 이렇게 하잘 것 없이 값쌀 수 있구나 느껴진다. 물론 하나의 해프닝으로 지나갈 금권자의 비싸지 않은 일당은 그다지 지켜갈 의미도 없는 하나의 불공정한 이야깃거리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재의 우리 금전 문화가 형성해 가는 세계는 진정한 시대의 가치를 보존하고 유지하기에 많이 녹슬어있다.


2014. 3. 24. MONDAY





보화각(葆華閣) | 시대정신을 담아낸 작품 보고(寶庫), 문화계승에 대한 우리의 태도

"안목이란 꼭 미술품을 보는 눈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생활자체의 안목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안목이란 오랜 시간 좋은 것을 보면서 키워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안목은 특수층의 전유물인 것처럼 여겨져 왔지만, 결국 민도라는 것이 뭔가. 국민 전체의 안목이 높아지는 것이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같은 걸 오래 두고 보는 게 중요하다. 좋은 물건을 봤을 때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안목이 성장하는 것이다. " <전성우, 故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2014. 4. 5 조선일보 강인선의 LIVE 인터뷰 중>



십 년 전, 커피 한잔 하면서 하루를 마감하던 습관에 따라 자연스레 다큐멘터리 <간송(澗松:전형필全鎣弼)이 지켜준 보물>을 봤다. 전체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간송의 업적 뒤로 창고지기 전성우 씨의 인터뷰를 보며 자랑스러운 아버지에 대한 회상에서 목 뒤로 뭔가 걸린 듯 잘 넘어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가 너무 초라해도 문제이지만, 전대(前代)가 거대한 업적을 이루면 후발로 나온 사람들은 일대의 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책임감에 시달리게 된다. 모든 역사에서 보이듯이, 최고의 명장 아래 최고의 후예는 없다. 그리고 성군이나 용장이 이뤄낸 융합의 세계는 부모 세대가 이룬 풍성함을 취하기만 하고 즐기는, 나태하고 게으른 방심에 휩싸인 후예들에 의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프로그램을 본 십 년간, 간송이 지켜온 보물들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SBS 간송특집 문화프로그램은 간송이 지켜온 '삼일 정신'을 기리는 동시에, 2014년 3월 21일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개관을 알리는 영상물이었다. 문화보국(文化保國)을 주창한 간송의 정신을 서울시 정책사업으로 풀어낸 <간송미술문화전>은 간송의 보물이 외부로 공개된 최초의 전시였고, DDP에서 상설전으로 기획되었다. 성북구 간송미술관에서 일 년에 두 차례 보이던 국보급의 전시에서 벗어나 <빗장을 푼 미술관>,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展, 대한콜랙숀>의 이름처럼 다양한 주제로 사람들에게 직접 다가가게 된다.

 

동대문에 마련된 간송미술관은 정식으로 두 번 들렀다. DDP 오픈식 때와 DDP에서 열리는 다른 전시 때 겸해서 둘러보았고, DDP에는 버스 타고 자주 놀러 갔던 터라 한 두 번 들릴 때마다 간송미술관이 잘 있나 돌아보곤 했다. 다만 길게 줄이 선 다른 나라의 유명한 미술관과 달리, 오픈식 이후로 쾌적하고 편안한 공간에 비해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관람료를 냈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다른 인기 있는 외국의 전시에 비해 저렴했다. 과연 정상적으로 미술관 운영은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다. 아쉬웠던 점은 보화각에 들려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보관문제 때문인지 귀중한 보물들의 나들이가 적었다는 것이었다. DDP는 패션전시 및 브랜드 홍보관으로 사용하거나 해외미술을 유치하는 등 문화예술과 상업의 등락이 혼재된 전시를 많이 진행했는데, 거기에 끼워진 간송미술관은 점차 미술의 중심에서 벗어난 위치에 서게 된다.


2018년 4월 6일 전성우 간송문화미술재단이사장의 사후, 삼대 전인건 관장이 운영권을 쥔 간송미술관은 전시확대의 여파와 실패한 콜라보기획, 사립미술관운영으로 인한 누적된 재정난으로 인해 2020년, 2021년 코로나 시기, 각각 국보 2점을 경매에 내놓는다. 2020년에 경매에서 유찰됐던 '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살입상’ 국보 2점은 추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30억에 매입하여 국유문화재가 되었고, 2021년엔 '금동삼존불감’과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2점은 외국계 암호화폐 투자자 모임 ‘헤리티지 다오(DAO)'에 지분기탁방식으로 25억에 판매되었다.


간송과 그들의 후손이 목숨을 내놓고 일평생을 바치면서까지 전재산을 털어 지키던 우리의 보물이 코로나여파로 휘청이던 미술계에 그대로 발맞춰 넘어지게 되었단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대를 거듭할수록 무거워지는 부모세대의 책임을 떨구는 방법은 실질적 운영에서 적자일 수밖에 없는 간송재단의 흔적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2019년 10월 박물관 등록을 한 보화각은 2019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국가등록문화재가 됐다. 당시, 국비와 지방비 12억여 원의 지원으로 보수·복원 작업으로 비지정 문화재 197점에 대한 보존 처리와 훼손 예방 작업이 이뤄졌다. 2022년 1월에 착공한 대구 시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 건립에도 국비와 지방비 400억 원이 투입되었다. 대구간송미술관은 현재, 2024년 하반기로 개관이 연장된 상태이다.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예술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외부에 소중한 보물을 공개하면서 보관문제와 훼손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간송이 지키려던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던 <간송문화전> 현대식 미술관과 연구소, 종합문화관을 건립해 후대의 민족문화예술 연구가 지속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계획이라는 원대한 포부에 다가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 남았다. 보통 우리나라의 문화재 전시는 재미가 없고 흥미를 유발할 면이 없다. 신윤복이 여자라는 가정으로 제작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 유행일 당시, 신윤복의 미인도가 신윤복의 자화상으로 알려져 보화각(葆華閣)에 미인도를 보기 위한 젊은이들의 관람열풍이 불었던 것처럼 그것이 허구(FICTION) 던 사실(FACT)이든, 문화부흥을 위한 팩션(FACTION)에 대한 문화계의 용인은 필요할 것 같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 The Da Vinci Code》의 영화적 배경은 루브르 박물관(Musée du Louvre)이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소설과 할리우드 자본이 결합된 영화의 성공으로 선과 악의 본질을 꿰뚫는 작품들을 루브르가 소유하고 있으며, 그 작품 속에는 암호학적 해석을 가진 시대의 가치들이 풍부하다는 것을 전 세계가 인지하게 되었다. 예술을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 모두 땡볕에 줄을 서고 비행기 표까지 사면서 루브르에서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을 행복해한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을 모방한 이탈리아 카세르타 궁전(Reggia di Caserta)은 영화 <천사와 악마 Angels & Demons>, <스타워즈 Star Wars 1, 2>, <미션 임파서블 Mission: Impossible 3>의 촬영지로 활용되었다. 다양한 문화적 소산을 매체를 통해 보여주는 시도는 문화적 고취와 함께 박물관과 고궁의 티켓가격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촬영지에 가면 영화에서 그렸던 것보다 초라하고 심심해서 상상이 굉장히 반감되긴 한다.  

 

우리의 전시문화는 돈이 되지 않는 전시로 낙인찍히면 자본이 따라붙지 않는 이상 일어서기 힘들다. 또한 국민적 사랑을 받을 정도가 아니면 정권이 바뀜과 동시에 이전 정부의 정책사항을 배격하는 논리의 대상이 되어 정책지원이 삭감되거나 그 방향성을 지속하지 못한다. 문화예술은 정치 이념과 별개로 사상적 자유와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아님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 이 3S를 잘 이용한 땡전시절처럼 문화적 사상이 정치적 수단으로 해석되어 즐거움과 쾌락으로 대중의 정신을 마비시키는데 이용되는 것이 맞을까?


시대정신이 깃든 유산은 우리의 존재가치를 담고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 등에서 정치범 수용소 중에서도 가장 내밀한 독방에 분류된 자들은 펜을 든 자, 아니면 붓을 든 자이다. 정치권력은 독주와 파괴보다는 균형과 조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불균형과 모순에 대해 신랄하게 풀어내는 것은 민간의 문화와 예술의 역할이었다. 지금은 유튜브와 SNS, 가벼운 SHORTS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참을성 없이 모든 것을 빨리 해결하려는 사람들 사이로 길어지면 어떠한 논리도 먹히지 않는 표피의 감각에 집중하는 감각적인 세대, 우리는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서 어디까지 재편해야 할까?    


상대에 대한 부적절한 가치평가에 콧방귀를 뀌게 되는 시니컬한 태도는 오류가 당연시되어 온 사회에서 배워야만 하는 아이가 가질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습관은 무섭다. 어느 날인가, 책을 읽으면서 그 안의 이야기와 사회의 이야기가 다른 것을 발견했다. 사회가 옳다는 것이 옳지 않을 수 있고, 시대가 추구하는 것이 바르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마 처음 대상을 대할 때 모든 것을 부정하는 태도는 긍정으로 추론하기 위한 하나의 역단계일 수 있다.


기록은 중요하다. 누적된 생각들의 길에서 현재에서 찾지 못한 해답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성우 씨의 말처럼 보는 안목, 사물의 현상에서 다른 이면을 읽어낼 수 있기 위해선 그만큼 많이 보고 생각해야 한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서도 "진심으로  바라본 자에게 사물은 자신을 연다"라고 했다. 재벌집 자식들이 배우는 첫 번째 덕목은 다름 아닌 문화예술을 보는 안목이다. 그리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습득이다. 사물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 존재감을 키우는 가장 의미 있는 방법임을 귀를 닫고 눈을 감은 사람들은 아직도 모른다.




확장된 공간 속의 존재 가치

영화 <말모이>에서 보이듯이 한국을 점령한 일본이 국민들에게 잔혹한 언어말살부터 전체주의적 사상교육을 실행한 것은 문화를 이루는 언어의 기본체계를 조정하고 인간의 교류를 실행하는 대화와 글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거기에 지역의 문화재만이 아니라 역사적 유적을 강탈하고, 한국의 정신과 같은 산수와 풍토 속에 단절의 쇠를 박고, 당시 대한제국으로 집성된 궁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운 이유는 자명하다. 점령한 한국땅에서 한국인의 존재를 삭제하고 일본으로 복속시키려는 극악한 탐욕과 폭력적인 지배의 속성을 극도로 발휘한 것이다. 가끔 정신 나간 현재의 지도층만이 아니라 일본의 교육에 길들여진 구세대들이 일본이 현재 한국의 경제발전을 가져왔다는 헛소리를 하는 것은 인간의 소통을 담당하는 언어와 글, 사상적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편견과 한자리 꿰차고 싶은 이기적 자만, 왜곡된 사상적 교육의 잔해 및 좁은 시야로 인한 부족한 시대 통찰 때문이다.  


역시, 현대의 문화강국이라고 불리는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미국처럼 총과 칼, 쇠와 함께 급격한 군사 기술적 발전이 가져온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지배를 일삼던 나라의 뒷면에는 우리와 같은 수많은 민족들의 말살된 흔적과 죽음의 잔해가 존재한다. 이들이 했던 행위는 일본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의 선진문화라고 말하면서 뒤좇는 현대 젊은이와 권력층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인지, 이들의 '추종'의 끝은 피리 부는 소년을 따라가는 마법에 홀린 아이들의 '실종'이 아닐까 한다. 즉, 풍요로운 문화의 이면에는 타문화의 압박과 살해가 존재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은 현재, 20세기 초반까지 탐욕적으로 영토를 확장해 온 결과의 후처리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굉장히 민주적으로 보이는 미국도 유럽에서 건너온 이주민이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 서부로 금을 찾아 떠나던 시절, 그에 앞서 새로운 서인도제도인줄 알고 착각했던 콜럼버스의 길 잃은 후예들이 남의 영토에 깃발을 꽂은 대발견의 시대, 인디언과 토착민들을 잔인하게 살육함으로써 폭력적으로 영토를 획득하고 자유와 평화의 정치적 토대를 세웠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주의적 사상과 평등의 추구, 풍요로운 자본주의 문화의 이면에는 자신의 광활한 자유를 위해 타인의 생명을 빼앗고 그들의 공간을 점령하는 인간의 모순된 욕망이 가득하게 자리하고 있다. 가끔 이런 남성적인 권력의 지향과 지배적인 속성이 없으면 세계는 발전할 수 없고 쟁취 없는 삶은 시들하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는데, 자기 탐욕의 끝은 현세의 몸은 편할지 몰라도 후대의 정신을 병들게 하며, 피의 후회가 패망으로 귀결되는 것은 역사에 자명하게 쓰여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공간이 병들어가고 문제가 생기는 것도 우연히 생겼다기보다는 모든 것이 응축된 산업혁명과 자본의 개념이 도출된 지난 세기, 과로화된 생산과 기술의 남발로 인한 생성적 충돌, 무자비한 개발로 인한 생태계의 불균형이 가져온 만성적인 축적의 결과이다.   


유럽의 이민족 사회의 충돌은 포용될 수 없는 갈등으로 극대화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부는 순혈주의에 대한 재편은 성장하는 이민족들의 권리보장과 그들과 나누기에는 자신의 위치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지배층의 위기감에서 발로 한다. 현재 중동에서 이뤄지고 있는 지난한 싸움 또한 수천 년간 충돌 중이라 종결되지 않은 시점에서 정확하게 분석하기 어렵지만, 우리에게 보도되고 있는 것보다 더 잔인하고 의미 없이 전개되고 있다. 이슬라엘 네타냐후 정부의 실권을 부르짖는 자국 내 항의가 가득할 정도로 이념적 전쟁이 모순임을 실행하는 당사자들도 알고 있지만, 멈출 수 없는 전쟁은 일본의 비약적인 과학과 의술의 발전이 일본 731부대의 만주에서 자행된 인체실험의 결과였던 것처럼, 혹은 독일의 정교한 제조 기술력과 의료발달의 기본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 속에서 자행된 유대인과 타민족의 수많은 살해와 생체실험에서 발생된 것처럼, 우리는 나의 생과 타인의 죽음이라는 모순적 교환 속에서 삶과 죽음의 바퀴를 굴리고 있다.


인간들의 극적인 충돌과 만연한 죽음을 통해 과학과 기술이 미래적 인간의 생명을 어디까지 연장시키고 얼마만큼 안정화된 공간에서 천년만년 살게 할 것인가 의문스럽다. 인간들의 한계적 죽음을 뒤로 미루고 눈을 뜨게 하는 시간을 연장하는 의료기술의 발달과 지구를 벗어날 있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동시에 가지고 오는 인간들의 폭력적인 충돌의 실험은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맞는 것인지 그 또한 고민된다. 제대로 현상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현명한 사람들이 있어야 할 텐데, 가끔 지배층의 권력적 속성과 삶의 태도를 보면 모든 것을 수단화하고, 영토장악과 권력 집중에 대한 포악한 습성만 돌출되어 있어서 정작 삶의 목적에 대한 고찰이나 화합에 대한 구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 때에도 이미 철학은 더 이상 생활의 가치를 주는 실용주의 학문이 아니었다. 실용성만 중시되고 생각이 사라져 가는 사회가 아쉽다. 사회 과학자들은 필히, 생각을 통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세상을 연구해야 한다. 이는 정치인도 마찬가지이고,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글과 그림, 예술적 언어를 겸비한 문화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미래에 대한 의견을 전달할 때 신중해야 한다. 파괴가 수반되는 공간으로 인류가 이동할 때 그 확장된 여유가 행복과 같은 단어라는 환상을 심어주어서는 안 된다. 스피드 있게 가고 싶은 세계까지 왔다면 이제 스피드 있게 저물지 모른다.



문화(文化), 마음과 정신의 기록

묘지, 기념물의 뜻인 프랑스어 모뉴망(monument)은 라틴어 Monumentum에서 유래하며, '기념하는 구조물, 이나 무덤, 기념 기록' 등을 의미한다. '기억나게 하는 것'을 직역한 이 단어는 MONERE '기억하게 하다, 상기시키다, 말하다'의 파생어이다. MEN은 '생각'을 의미하는 프로토 인도 유럽어 뿌리로, 마음이나 생각의 상태와 특성을 나타내는 단어들에서 파생된다. 이 뿌리의 근원과 존재 증거에는 산스크리트어 manas- '마음, 정신', matih '생각', munih '현자, 예언자', 아베스타어 manah- '마음, 정신', 그리스어 memona '그리워하다', mania '광기', mantis '점쟁이, 예언자, 현자', 라틴어 mens '마음, 이해, 이성', memini '기억하다', mentio '기억', 리투아니아어 mintis '생각, 아이디어', 구교회 슬라브어 mineti '믿다, 생각하다', 러시아어 pamjat '기억', 고트어 gamunds, 고대 영어 gemynd '기억, 기억력; 의식 있는 마음, 지성' 등이 있다.


요즘 다시 알고 있던 단어들을 살피고 있다. 묻힌 것들에 대한 의미의 고찰은 현시대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알 수 없었던 선조의 삶을 보거나, 그들이 남긴 기록이나 글, 회화나 조각들을 살피면 의식적으로 감춰둔 내밀함까지 다시 꺼내게 된다. 그냥 흩어져가다가 돌부리에 발이 걸리듯이 의식적으로 작업이 걸릴 때가 있다. 과거의 유물들은 목숨을 걸 정도로 굉장히 귀중할 수도 있고, 전쟁으로 한방에 불타는 기념물들처럼 무가치하게 널려질 수도 있다.


멋진 문화적 가치의 소산들이 돈으로 환산되어 권력자나 부유한 이들의 내밀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때면, 현대의 문화적 형성과 자본의 역할은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생각과 정신의 영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묻게 된다. 루브르나 국립현대미술관, 구겐하임, 혹은 간송미술관 등에 소장된 문화적 작품들은 기억을 그리는 이들에게 유효한 기록이 되고 있다. 생각하지 않고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의 문화적 소산물들도 하나의 권력이나 부유함을 상징하는 유한한 자들의 한낱 소장품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지구에서 벗어나는 공간탈출의 세계가 진행될수록 반드시 보전되어야 한다고 알려진 문화적 소산물은 유한적이기에 우주적 시간 속에서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기억과 마음과 생각으로 띄울 수 있는 작품들을 영원의 세계로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스스로의 가치를 고민하는 예술가들만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를 껴안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사안에 머리를 맞대어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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