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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19. 2024

DIARY, POEM AND THE MOVIE

SYLVIA PLATH  일기, 시 그리고 영화.

[SYLVIA PLATH] 2005. 4. 16. PHOTOSHOP COLLAGES by CHRIS



실비아’의 영화에 부, 실비아의 딸, Frieda Hughes


MY MOTHER 나의 어머니


Now they want to make a film,

For anyone lacking the ability

To imagine the body, head in oven

Orphaning children


이제 그들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해,

상상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오븐 속에 머리를 넣고,

아이들을 고아로 만드는.


The Peanut eaters, entertained

At my mother’s death will go home,

Each carrying their memory of her

Lifeless- a souvenir

Maybe they’ll buy the video


땅콩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내 어머니의 죽음에 즐거워하며 집으로 가겠지,

각자 그녀의 기억을 가지고

생기 없는 - 기념품처럼

아마도 그들은 비디오를 살 거야.


They think I should give them my mother’s words

To fill the mouth of their monster

Their sylvia suicide doll


그들은 내가 내 어머니의 말들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해

괴물들의 입을 가득 채우도록

그들의 실비아 자살 인형에게



미모의 여자, 촉망받는 지성, 구멍 난 가난, 붕괴된 가정, 극적인 자살. 그것이 이상한 것인가? 터프한 죽음 뒤에 뒤따르는 대중적인 패닉 현상은 개인들이 수고스레 받는 충격보다 꽤나 산만하다. 외부에서 관찰된 자살이란 행위는 한 인간을 극적으로 포장한다. 별것 없는데 섬씽스페셜로 말이다. 방만한 호기심을 가스 오븐 레인지에 구워대고 싶은 육식자들의 통일된 미각은 고린내보다 질퍽하다. 한 사람의 울적한 죽음을 재미있는 입방정으로 처리하는 자들의 부글대는 침샘에선 쉰 냄새가 난다. 지난 삶이나 현재 고민을 들춰보지 못하면서 단지 표면의 이슬을 수다의 꼬투리로 삼으려 도마질한다. 쉽게 짓밟히는 인간의 가치를 보면 힘든 순간에도 선뜻 고기 써는 기계에 정신 나간 머리를 들이밀지 못한다. 사회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개인에게 연대 책임을 던진다. 죽음에 대한 빚은 가족이나 주변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실비아 플라스 영화가 개봉했다. 그냥 별로다. 몇 편의 시나 소설, 일기 정도로만 그녀를 보고 싶다. 프리다 휴스(Frieda Hughes)가 어머니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 제작자들과 매스미디어, 죽음을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대중의 태도를 비판하는 시를 지었던 것처럼, 한 인간의 비극은 평범하고 지루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극적이면서 대조적으로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래서 나는 그런 통렬한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고, 나약하게 굴복하여 이 생을 끝내고 싶지 않다.


응축은 흐르는 피를 굳힌다. 버짐 핀 응고와는 조금 다른 성질이다. 시는 응축이고 일기는 흐름이다. 흐르는 삶을 말리는 것은 가스레인지 위의 폭발적인 응축으로 눈물 젖은 여인의 머리를 말린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을 시적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The Journal of Sylvia Plath》에는 강철 같은 자아와 신의 자존을 부르짖던, 철딱서니 없는 고등학교 시절로 거스르려는 강건한 두상이 숨 쉬고 있었다. 뢰스케와 마찬가지로 독일계 이민자 가정의 그녀. 내가 플라스의 죽음을 읽어가며, 영화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Die Ehe der Maria Braun>을 떠올린 건 단지 머리통을 앗아간 몽롱한 가스 냄새의 결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시는 두세 편 접했지만, 그녀의 일기로 정식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솔직한 고백과 적나라한 문체, 충격적인 감성과 자폐 된 우울, 만성적인 병마와 추락한 시성. 글쎄? 나는 책을 읽고 있으면 모든 것이 일기로 보인다.


소설이든 시든 희곡이든 시나리오든 평론이든 그것을 적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려 귀 기울이는데 실비아의 목소리는 맑지가 않다. 투박하고 모난 영혼이며 그녀의 갈구는 나와 상극되는 면이 있다. 야심이 커서 우울의 늪이 깊었다고 보인다. 상황의 늪이 괴해, 우울증이 생긴 나와 다른 점이다. 사회에서 안정적인 지위를 얻고자 하는 열망, 최상의 조건에서 교육을 받길 원하는 학구적인 갈증, 결혼을 하고 단상으로 떠오른 욕망을 거칠게 실현하고픈 그녀는 욕심이 굉장히 많다. 남들보다 더 갖추려고 하는 필요들이 늘어져 있다. 마취된 의식의 배경을 끌어올리기에 그녀는 얼마나 풍부한 인물이었는가. 창조력이 봉쇄된 가운데, 쟁취하는 삶을 원했던 것 같아서 한마디로, 불편했다. 살아온 날들, 병적인 우울, 주변 관계가 전혜린과 비교될 수 있는데, 전혜린이 더 시원한 느낌이다.


그런데 놀란 사실은 있다. 일기가 요상한 물건이라는 거다. 어질러대는 똥떵어리가 누구의 약이 되기도 한다고, 텅 빈 집에서 딸기 포기들을 세다가 지루하게 찾아오는 나른함에 취해서, 차갑고 달콤한 우유 한 컵에 생크림을 듬뿍 얹은 블루베리 한 접시를 먹는다면, 그녀의 십 대 시절을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싱싱한 포도처럼 입안을 조롱하며 퍼지는 젊음의 마약 같은 성분이여! 그녀의 방대한 독서량은 칭찬한다. 다른 시인의 글귀를 되풀이하지 않고 누군가가 자신의 글귀를 되풀이하며 말했으면 좋겠단 소박한 갈망 정도는 괜찮다. 십 대와 이십 대 초반은 그렇게 귀여운데, 언제부터 단풍크림의 새큼한 맛과 바닐라 달의 광휘를 잃어간 것일까? 습작을 하면 글을 쓰는가? 빌어먹을 시절의 가치에 자신을 질투한 작은 악녀는 “저는 결코, 결코, 결코 그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Je ne l’espuserai Jamis, JAMIS, JAMIS!" 이렇게 외쳤는데 젊고 싱싱한 남자에게 쏠리는 찌걱거림은 시절을 막론하고 불거지는 감정인 것이다. 사람이 마냥 솔직해질 수 없는 건 사실이다. 쓴 걸 찢거나 여전히 돌려 말하며 정직을 고수한다. ‘미미한 기쁨들. 내가 증오하는 여성적인 수다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은 위장된 냉소주의 사이를 오락가락거리던’ 그녀의 대학시절, 의식을 산책하는 여인을 찬미하는 건달이 되지 못해 아쉽다.


심한 불면은 인간의 정서를 파괴한다. 내가 눈을 뜨고 살아가는 건 부비동염에 걸리거나 충수염을 앓는 신경질적인 압박 때문은 아니다. 나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남편이 젊은 여자와 놀아나서도 아니고, 그로 인한 생활고 때문도 아니다. 자괴하는 시간은 재능을 돋아주기도 하지만 한편 굉장히 피폐하게 만든다. 책을 들고 유영하는 단발머리 소녀의 개암나무 빛은 햇살에 바랬다. 실비아가 대학을 마칠 무렵, 가려운 욕망과 쳇바퀴처럼 도는 다람쥐 너울은 건조가 휩쓴 그녀에게 마냥 내리쬐기만 하는 질투의 태양을 가릴 수 있는 줄무늬차양은 아니었다. 양고기 누린내를 아는 것은 먹어본 사람일까, 아니면 맡은 사람일까? 뻐드렁니로 솟은 소멸한 감각들, 쓰고 싶은 갈증은 그녀를 경직된 스컹크로 만들어 버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푸른 먼지의 납골당에서 공명하는 창작의 포진은 진짜 ‘헛되고 헛되도다 Vanitas Vanitaum’. 육체의 덧없음 만큼이나 굴절 돼버린 잘 익은 기름종이들.


흔히 아름다운 입술을 만들려고 바르는 립스틱은, 유혹적인 냄새를 벗겨내면 평소에는 관심 없는 역겨운 재료들로 뭉쳐진 것을 발견한다. 고깃기름, 생선 비늘, 약한 오줌 성분, 싸구려 화학 분진. 서른이 넘은 실비아는 요구가 많은 암고양이 같기도 하고, 이리떼가 모여있는 정원에서 배회하는 고독한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 보이기도 한다. 경직된 목 근육이 부려대는 배타적인 명령은 테드 휴스(Edward James Ted Hughes)가 자주 부르던 ‘Plathiana’의 애칭처럼 그녀의 자아를 남김없이 빨아댄 지독한 흡혈귀였다. 플라스의 쳐진 음성이 가장 마음에 든다. 너무 고통스러운 시기지만 그 전의 넘치던 활기는 가장된 발랄로 힘이 없고 과장되었다는 느낌에 비해 마지막으로 들어선 날, 건조해진 낙엽이 곧 불이 붙을 거란 경고를 외로이 각인시킨다. 창문에 젖은 고사리를 보면서 짓무른 전구를 터뜨리고, 스모그에 싸여 참을성을 계산하는 머리가 어떻게 다음날 고통을 표현하지 않은 것일 수 있을까? 길에 죽은 두더지는 올라설 계단이 높아 죽은 것은 아니었겠지. 용의 주도한 구름들이 퍼져간다. 인생의 마지막은 언제나 씁쓸하다. 괜한 가을이 온 것처럼.



실비아, 이름마저 신화의 여신 같구나.

한 시간 오십 삼분,

꼬박 장승처럼 서서 당신을 보았다.

얼굴은 희미하고 기억만 생생하네.

비릿하고 쪼글대는 녹음은 아스팔트 대지위에

가랑이를 벌린 채로 배신당한 용암처럼 굳어 있구나.

신화라 포장한 박스가 커서 된통 사기를 맞은 기분이다.

당신이 품은 햇살, 꺾인 망상이 한 밤의 빗소리처럼 짤랑 거린다.

허름한 오두막에서 마시는 녹색 원두커피가

꽃무늬치마 주름 따라 눈물처럼 흘러버렸고

맥주 캔에 남긴 너의 붉은 꽃잎은 로즈향만 남기고 분질러버렸다.

어제는 당신에게 집중하느라

오늘 내 왼쪽 어깨가 마구 결린다.

위로할 사람은 떠나버렸고 귀족적인 우울만이 몸을 감싼다.

질투할 여인은 아닌 고로

실비아, 당신에게 슬픔을 건네본다.

당신이 물어 재낀 사과는 이미 썩었고

물고기의 경쾌한 유선은 척추가 망가졌기에

손수 일기장에 적었다던 ‘새벽 연가’, 삭막한 새벽마다 읽어보리다.

당신이 경배하던 조이스도 초라한 남자

당신이 시기하던 버지니아도 초라한 여자

어찌 그리 보는 눈이 누추하고 불쾌한 거지?

바다를 사랑하는 여인들은 배부른 달을 품어야 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실비아, 그대의 두 아이는 임부의 창자를 먹고 자랐고

실비아, 나의 두 아이는 헛된 꿈 먹고 사장되었다.

실비아, 우리는 동지가 되기엔 걸은 길이 너무 멀구나.

물 흘렀던 강박은 놓아두고서 배 따라 이슬 따라 편히 떠나가시게.

실비아, 당신의 이름은 부드러운 버들가지 같구나,

실비아. 실비아.



- 어깨가 결린 봄날, 실비아에게


2005. 4. 16. SATURDAY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The Journal of Sylvia Plath》는 어떻게 읽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책장에 책도 없다. 서점에서 아니면 어디에서 서서 봤나 보다. 분노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는 유약하게 자신을 마감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타인을 어떻게 소리 없이 처리할까 생각했다. 감정 없이 모든 계획과 구상을 도식적으로 짜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가 미쳤나 보다 중얼거렸다. 머리를 몇 번 박고 그런 헛짓거리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실비아처럼 가스 오븐에다 머리통을 날리면서 세상에 충격적인 이슈를 주면서까지 이름을 날릴 필요가 없겠다고 결론지었다. 그녀만큼 두드러진 것도 없었고, 그냥 모든 것이 쓰레기 처리로 파묻혀야 했던 시절에 유명이든 무명이든 죽으면 결과는 한 가지였다. 남겨진 이들은 약간은 그리워할 것이고, 남길 없는 나는 그냥 사라질 것이다. 수많은 희생양들로 이지러진 평범한 삶의 그물 속에서 장애물들을 모두 처리하고 죽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어느 날, 훤한 대낮에 돌아보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들이 너무 가느다랗고 어리석고 보잘것없었다.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쏟았다는 사실이 너무 하찮아서 그렇게 한참을 방황했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와서 빠져나갈 구멍을 꿈꾸었다. 나의 머리를 사랑하긴 하지만 이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생각을 멈추고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순간을 꿈꾸었다. 그때마다 잠이 오질 않았다. 어떻게 그 악한 감정들이 가시었는지 알 수 없다. 나를 찾기로 생각하면서 서서히 격한 파도는 가라앉아갔다. 예전 일기를 보다가 더 이상은 거짓되지 않겠다는 말들을 보았다. 부드럽지 않고 달콤하지 않은 거친 나를 보이고 다듬기로 했다. 오직 나에겐 포장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 난 보이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냄새는 나지만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그냥 상처일 뿐이야.' 이제 불필요한 감정을 거두고 보이는 너머의 삶을 살아가야겠다.   





지금의 나를 이루는 모습은 이전의 시간들이 수만 겹의 파이처럼 겹쳐 있을 것이다. 스스로 마음을 풀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놓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졌다가 날카로웠다가 부드러웠다가 예민했다가 무감했다가 순간순간 변하는 마음의 파도는 무심한 표정과 달리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피곤해서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졸기도 했고 나른했다. 이전에 못 잤던 순간을 지금 누리고 있나 보다. 흐르는 시간이 아쉬워서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날들도 다시 봐야 할 것 같다. 같은 형상인데도 사물의 모양과 느낌이 달라져있다. 나이긴 나인데, 어째 내가 아닌 것 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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