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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Oct 24. 2024

THE MISFORTUNE OF VIRTUE

사드 《미덕의 불운》 한 가지 선이라도 낳지 않는 악은 없다

[Les Infortunes de la Vertu, Marquis de Sade] PHOTOGRAPH by CHRIS


 "철학의 승리는 섭리가 인간과 관련하여 스스로에게 설정했던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는 길을 덮고 있는 어두움 위에 빛을 던져주는 데 있으며, 또한 폭력적으로 마구 이끌어가는 존재의 변덕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이 가여운 두 발 달린 개체로 하여금 그를 짓누르고 있는 섭리의 명령을 해석하는 방법과 이십여 개 서로 다른 이름을 부여하면서도 아직 아무도 그 실체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숙명이라는 존재의 괴이한 변덕을 예견하기 위하여 취해야 할 길을 알게끔 해주는, 몇 가지 행동방안을 개략적으로 제시하는 데 있을 것이다."

 《미덕의 불운 Justine ou Les infortunes de la Vertu,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Donatien Alphonse François, Marquis de Sade




 변태적인 성(性) 개념을 확립했다고 평해지는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의 작품들은 성적인 욕구가 꿀처럼 넘치는 시절에 비갈 수 없는 그물이었다. 여러모로 충동적이고 호기심이 많다는 것은 주변인에게 누누이 지적받아온 나만의 강렬함이지만, 방탕함에 대해 떠올랐던 모든 생각을 저지르는 일은 상상이 가득한 자에게는 일종의 독약이다. 욕망의 끝까지 나가다 보면 벼락을 맞고 온몸이 타버린 고난한 여자의 얼굴이 등장하니까 말이다.


 소돔 120일 Les Cent Vingt Journées de Sodome ou ĽÉcole du Libertinage Lusts of the Libertines》, 《사랑의 죄악 Les Crimes de l'amour》, 《미덕의 불운 Justine ou Les infortunes de la Vertu》 같은 사드의 작품들은 후대의 평가와는 달리 철학적이다. 사드라는 이름이 낳았던 강간, 성 도착증, 변태 성욕, 근친상간, 각종 가학성 음란증은 위정자나 지배권력, 후대 지식인들의 현란한 평가에 의해 정신분석이나 법의학, 사회문학서에 빈번히 거론되면서 그의 자식들을 사악하다고 규정지어진 가공된 틀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된 사드는 종교인, 정치가, 법 제정자, 세습귀족들이 보이지 않는 성역에서 가증스럽게 지속시키는 위선과 생활에서 부유하게 살기 위해 타인을 압박하는 탐욕적인 형상, 그로 인해 한없이 대치된 선하고 정직한 인물들의 기이한 상처와 가시밭길 인생의 극한점을 표현하는데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단순히 성적 체위에 눈길이 박힌 사람들의 벌렁거림을 자극해서 떼돈을 벌려는 출판업자의 상술과, 자신들의 성역을 거북하게 묘사한 이에게 괘씸함을 느낀 지배층의 농간으로 이상한 궁지에 빠졌지만 인간들이 가진 편견을 벗기면 우습도록 절명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다.


 한 사람을 섬기는 정조대는 마음만 먹는다면, 열쇠업자와도 놀아날 수 있는 유인물이 되곤 한다. 사회적인 규범이 불러일으킨 사념과 인간에 내재된 욕망은 관찰자에겐 좋은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세파를 겪는 자에게 이 철학적인 유형의 궤변이 귀중한 불가사의로 작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18세기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세기를 세 번 넘은 사회와 법은 역시나 괴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가난이 있는 곳에 미덕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것은 여전하며 부당한 편견 때문에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는지 확인하지 않은 채 실제 죄를 저질렀다고 믿는다. 현재는 범죄의 가능성만으로 죄를 묻는 시대는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이론상의 경우일 때가 많다. 피의자의 처지에 따라서 변화하는 형법자의 감정이, 사드의 말처럼 작위나 재산으로도 결백을 입증하지 못하면 죄가 되는 옛날 사회와 오늘날이 변함없다는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명예도 재산도 없는 것을.


 부자의 무정함과 가난한 자의 불운들, 중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예속과 선의는 변덕스러운 운명의 장난을 일으킨다. 물론 이것을 바로잡을 힘은 급격한 시간에 놓인 자에겐 없다. 도덕을 찬탈해 간 상습적인 탕아의 혀는 순진함과 솔직함을 비웃으며 잘못된 행위를 돕는 맹목적인 추종자를 길러내기에 명랑하고 소탈한 성격을 내버리게 된다. 나를 해부하는 것도 지쳤고 다시 눈을 뜨면 깜깜한 절벽이라 미덕의 보상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숙명적인 불안과 품행의 방정함이, 결합되지 않는 소문들과 무규칙의 세계로 정갈했던 의식을 발가벗기면서 치욕감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의식의 상태를 안겨주고 있다. 정신없이 부유하는 와중에 삶에 대한 애착이 수면에 떠오르면 백일몽의 애무도 섬뜩해진다. 미덕과 악덕을 삶의 방법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 속에서 회한을 고찰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 습관이, 가야 할 길을 비껴간 행로에서 허욕의 흉물스러움을 탈피하게 만들 수 있을까? 비가 의식처럼 내리는 날, 전동차 창문을 보면 미덕의 불운, 여주인공 쥐스틴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는 자의 오직 하나의 재산이던 탐스러운 미덕의 당황스러운 탄식을.


 "미덕의 감정을 품으면 어김없이 홍수처럼 밀어닥치는 불운은 어이 한 것인가. 도둑질을 거부한 나는 교수대에 위협당하고, 고리대금업자는 여전히 부자이며 숲의 악당과 패거리가 되길 거부한 나는 겁탈당하고, 그들은 여전히 융성하며 음탕한 후작 어미를 독살하기 거부한 나는 체형당하고, 그는 여전히 잘 살고 외과의사 범행을 방지해 준 보상으로 나는 잘린 발로 빵을 구걸하고, 그는 행운을 잡고 영성체에 고해를 탄원한 나는 수치스러운 제물이 되고, 그들은 영광의 극에 달하고 기절한 사나이를 구한 나는 그 수하에서 짐승처럼 일을 하고, 그는 모든 운명의 특혜를 누리고 천박한 범죄의 희생자를 도우려다가 나는 전 재산을 잃고, 그 또한 기나긴 죽음을 맞이하고 내 아이도 아닌 이를 구하다 나는 타인을 죽인 오명을 쓰고, 놀던 이는 자랑스레 죽음을 애도하고 순결을 짓밟은 자에게 나는 불행을 살펴달라 애원했다가 오욕에 조롱당하고, 그는 유유히 떠나는 박해한 자의 악덕은 언제나 이렇게 불길하고 항구하게 타오르는 이유는 무엇이며 안전함을 갈망하는 더럽혀진 순결은 진창에 사정없이 내동댕이 쳐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타인의 불행을 통해서 깨달았던 기질의 밝음과 엄격한 품행이 모범적인 전형을 만들어내지만 혹독하게 변질로 가버린 자는 누군가의 좋은 거름이 되기 위해서 그러한 고행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를 전혀 할 수 없을까? 검은 대기로 퍼져가는 아름다운 불빛이 사람들의 눈속임을 감행하게 하여도 누구에게는 이 고통스러운 행보가 죽음의 심연으로 몰아가는 충격일 텐데 세상에서 박해당하는 미덕은 어떠한 불운으로 기쁜 보상을 준비하는가.


 "한 가지 선이라도 낳지 않는 악은 없다."

 "Il n'y a point de mal dont il ne naisse un bien."

 Zadig, ou la Destinée 1747, Voltaire》


 볼테르의 말이 위로가 되기엔 세상에서 사람을 진실하게 느끼는 자가 적다는 사실로 인해 굉장히 침울해진다.


2005. 4. 11. MONDAY



 선악의 개념은 이론상으로는 완전체를 지향한다. 선만 있어도 반쪽이고, 악만 있어도 반쪽이다. 아수라처럼 선악의 얼굴이 함께 존재해야 선악은 존재와 그 그림자처럼, 혹은 존재와 거울에 투영된 이미지처럼 하나의 온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악한 파급이 강렬하게 존재하고 악행에는 선행의 의지도 낳을 수 있음을 설명하는 수많은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이론과 실행은 생각보다 조화롭지 않다.


 "나는 이 악들을 보았고, 나는 스무 살이 아니다. J'ai vu ces maux, et je n'ai pas vingt ans."


 볼테르(Voltaire: François-Marie Arouet)의 깊은 탄식처럼 인생을 살다 보면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보다 열렬한 염증이 끓어오른다. 세상에 대해 밝은 꿈을 꾸던 스무 살 청춘은 백일몽일 때가 많다. 이 세상은 최선을 다해도 부조리와 악행이 만연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져볼수록 고통과 냉소가 흐르는 구렁텅이는 험악하게 입을 벌린다. 의류 브랜드 <자딕 앤 볼테르 Zadig & Volatire>의 이름을 보면서 볼테르의 디그 혹은 운명 Zadig, ou la Destinée을 상기하나 똘레랑스의 볼테르 철학을 생각하고 있으면 상상이 실없다고 느지기도 한다. 혹은 유연하게 나풀거리는 옷에서 철컥거리며 단칼에 목을 내리치는 기요틴(Guillotine)이나 18세기 혁명 전야에 걸쳐진 어지러운 프랑스의 허름한 뒷골목을 떠올리는 연상은 패셔너블한 형상과는 심히 멀어 보이긴 한다.  


 세상은 보기보다 호락하지 않다. 삶의 열정은 살아 있되 완전히 비관적이지 않고, 인간의 그릇된 행위에 냉소적이지만 긍정적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것은 도전적으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개념과는 다른, 실제 상황에 대해 객관적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개인적 선택의 기호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장애에 부딪혔을 어떻게 문제를 해결을 하는가의 삶의 자세는 중요하다. 비정한 악에서 최후의 선을 끌어낸다는 것은 억지 같긴 한데, 그래도 검고 혼탁한 날들에서 그런 비릿하고 날 것 같은 희망조차 없다면 저토록 미덕이 불운한 인간에게서 어떻게 한 가지의 선함이라도 꺼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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