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Oct 25. 2024

A SHORT FILM ABOUT LOVE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Krótki film o milosci)

[A SHORT FILM ABOUT LOVE] MOVIE IMAGE COLLAGES by CHRIS


 가을이라 그런지 전에 없던 아이들의 연락이 잦아졌다. 안부를 꺼내 놓기 바쁘게 고민을 한 두 가지씩 던져댄다. 듣다 보면 보따리가 한 짐이다. 자기를 찾는데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고, 갓난이들 돌보느라 힘들어하는 애들도 있고, 직장 생활 고달프다고 투덜대는 녀석도 있고, 옆구리 시리다고 칭얼대는 놈들도 있다.


 "무슨 약 처방이 있을까. 나도 모르겠다. 내가 뭐가 있냐. 이 몸뚱이 밖에. 그냥 내 어깨라도 빌려주련?"


 사람들의 삶에는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사랑? 우정? 명예? 자유? 지식? 경험? 돈? 외모? 인기? 블루, 레드, 화이트. 다른 색상의 렌즈를 들이대 봐도 우리들 삶에는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현재를 밟고 서 있는 나, 너, 우리라는 한 덩어리의 사람. 지금처럼 정신을 놓고 갇혀 있을 때 망원렌즈를 들이대며 사람들을 가까이 보고 싶다. 두 다리로 맘껏 돌아다닐 땐 걷는 도처에 사람들이 있었기에 굳이 애를 써서 볼 필요도 없었지만 다리 잘린 새 마냥 타인을 위한 발걸음만 재촉하고 있을 땐 하늘보기도 민망하다.


 부끄러운 얼굴을 가리려고 초특급 액정 투시 광학 망원경을 준비한다. 창문 밖에다 까만 눈동자를 굴린다. 뭘 볼까? 부인 잠재워놓고 이웃집 아가씨 옷 벗는 거 지켜볼까. 서방 노닥질 하지 않는지 모텔 입구에서 숨어볼까. 수능 시험 문제가 무엇일지 출제위원 머릿속을 훑어볼까. 사랑하는 그녀가 화장발인지 아닌지 얼굴 정면에 들이댈까. 국가 금융기관 금고 열쇠번호 몇 번인지 알아낼까. 이번 회차 로또 복권 당첨자의 계좌추적을 실시할까. 사람마다 제각각 원하는 게 다를 것이다. 고독한 독신녀의 방안을 망원 눈깔로 매일같이 기웃거렸던 어떤 열아홉 청년처럼.

 생활도 단조롭고 말수도 없는 이 젊은 청년은 따르릉 자명종이 울리면 매일 밤 같은 시간 같은 위치에서 그녀의 일상을 살핀다. 옷도 벗고 샤워도 하고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티브이도 보고 우유도 마시는 그녀.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청년은 진지하다. 한 뼘 회색 건물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무엇이 보고 싶은 거지?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육체적 관계를 원해서? 아니야?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다. 우유를 배달받을 때도, 무슨 송금통지서가 날아올 때도, 자꾸만 마주치는 이 청년은 정말 수상쩍다. 거울 밖 자신을 지켜보는 미지의 존재를 알게 된 그녀는 얼굴만 붉어진 청년을 한껏 조롱해 본다.

 
 "사랑? 흥! 나한테 건질 건 섹스밖에 더 있을까. 이봐 풋내기! 생긴 것도 반반하고. 그래. 나도 외로우니까 우리 같이 한번 놀아볼까?"

 
 고개를 젓는 남자. 사랑하는 그녀를 감히 만질 수도 없다면서 눈물을 흩뿌리며 뛰쳐나가 버린다. 더 이상 그녀를 마주 볼 수 없게 된 청년은 한순간 그녀를 향했던 심장의 붉은 핏줄기를 잘라버린다.

 여느 때와 같은 밤. 자신을 보고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느낀다. 그녀가 있는 그 자리엔 이질적인 바람이 불어오던 숨길은 거둬지고 자신만이 덩그러니 있다는 것을. 갑자기 긴장감도 사라지고 무엇인가 없어진 느낌에 그녀는 남자를 찾기 시작한다. 아, 병원에 입원했었다니! 퇴원한 그를 만나러 집을 찾아가는 그녀. 그곳에는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던 망원경이 있다.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대는 여자. 언제였던가.

 하루 내내 너무나 힘들었던 그때.

 외롭고 지쳐서 물컵조차 들기 힘들었던

 어느 날의 그녀가 보인다.

 바닥에 너질러진 우유를 보며 

 한없이 우는 자신의 모습.

 망원경에 비친 그녀를 보며 

 함께 울던 한 사람을 느낀다.  

 그녀도 흐느끼며 창가에 서서 웃음 짓는다.
 그녀의 어깨를 청년이 살며시 감싼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마음 한 구석이 절름발이로 태어났을까. 한쪽 다리로만 서 있기엔 불안해서 쓰러지지 않게 서로가 서로를 감싸줘야 할까.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Krzysztof Kieślowski)의 영화는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한다. 나라는 한 사람. 그대라는 한 사람. 그리고 우리라는 존재에 대해 묻는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Krótki film o milosci, 1988>은 그의 여타의 영화, 세 가지 색 <블루 Trois Couleurs: Bleu, 1993>, <레드 Trois couleurs: Rouge, 1994>, <화이트 Trzy kolory: Bialy, 1994>라는 삼색의 사랑일기나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Krótki film o zabijaniu 1988>,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La Double vie de Veronique, 1991>에서 보여줬듯이 사람이 살아가면서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아는 어디로 향해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관음증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이들의 사랑 일기 속에는 여타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섬뜩한 스토킹은 없다. 서로를 지켜봐 주고 그 안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조용히 바라보면서 자신의 거울을 발견하는 삶의 이야기가 있다.

 바람 따라 물 따라 흘러가다 보면
 서로 다른 길에서 떠나왔던 것들도

 한 곳에 모일 때가 있다.
 새털구름조차도 먹구름이 되어 
뭉칠 때가 있다.

 다른 곳에서 왔으되 함께 하는 우리들.
 나의 닮은 꼴. 그런 존재도 있겠지.

 내가 아니지만 나 이면서 

 나를 보는 거울 속의 그림자 얼굴.
 서로를 알아볼 땐 함께 어깨를 감싸야 되지 않을까.


2004. 9. 7. TUESDAY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는 개인적인 취향이었다. 90년대 자주 가던 예술 영화관에서 인기리에 상영되던 영화는 보기에도 심심한 시각적인 관성의 태도를 끌고 왔다. 막 애정을 불태우기 시작한 첫사랑의 상처와 죄악을 토로하는 새하얀 신앙적인 고백들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감독들이나 새로운 형태를 만들려는 제작자들, 혹은 시나리오를 써보고 싶은 작가들에게 짧은 일거리와 세속에 가려진 기회들을 마음껏 드러내도록 선사했다. 개취(Personal taste)라고 불리는 생각의 맛처럼 사랑에도 어떤 향취가 있지 않을까 싶다. 타자를 꾸준히 지켜봄에 대해 신과 같은 관대함은 없으나 기대감을 접고서 오롯이 대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삶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다가온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치는 저마다의 다른 높낮이와 기폭을 자랑하는 수평선을 가지고 있다.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시간의 거리는 다양한 감상과 감정을 격렬한 수면 위로 끌고 온다. 인생이 평온해지기까지 생각보다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사랑을 짧은 감탄사로 만들고 싶어도 감정이 한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인생을 감싸 안는 관용의 폭 또한 한 글자로 설명되긴 어렵다. 유광의 필름지가 검은 비단처럼 세상을 향해 한가득 펼쳐지면 사랑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나에 대하여, 당신에 대하여, 우리에 대하여 길게 풀어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THE MISFORTUNE OF VIRTU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