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OHEAD WITH MY FRIEND] PHOTOSHOP. 2024.02. DESIGNED by CHRIS
라디오는 오랜 친구다. 라디오를 온종일 머리맡에 두고 친구들과 전화를 하고 그들에게 전화 수화기로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만화책도 보고 소설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공상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면 카세트테이프를 꽂아가며 녹음을 하기도 했다. 말할 수 없는 일들에 감정이 요동칠 때면 라디오에서 흐르는 소리는 내 안의 파도를 가라앉히는 위안이었다.
얼마 전 스튜디오에서 O 실장이 애호하는 애플 뮤직을 건드리기 싫어서 그냥 계속 돌림으로 틀어놨더니 스텝들이 작업하는 내내 기분이 처진다고 투덜거렸다.
"아, 우울해."
"이게 인디야?"
"홍대 쪽인가?"
일관되게 시를 읊는 건지 속삭이듯이 저음으로 땅을 치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다들 잠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의외로 나는 듣기 괜찮았다. 스무 살청춘의 기억을 소환한 공로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용인했다. 한번 설정한 걸 바꾸기도 귀찮아서 음악을 무한반복 모드로 내버려 뒀는데 커져가는 불평하는 소리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촬영 막바지였다. 유튜브 뮤직 중에서 아무거나 눌렀다.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쩌면 어린애들 놀이 같아
슬픈 동화 속에 구름 타고 멀리 날으는 작은 요정들의 슬픈 이야기처럼
이문세의 '깊은 밤을 날아서'가 흐르자 다들 한 마디씩 했다.
"아! 이게 낫네. 살 거 같네요."
"듣다가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아니, 뭔 저런 음악을 듣는데?"
O 실장은 아름다운 자연을 찍으러 간 거 같은데, 표류하는 구름과 맑게 개인 하늘과 흔들리는 나무를 보면서 뒤통수가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우리는 한 마디씩 라디오와 함께 한 소회를 쏟아내었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황인용의 <영팝스>까지 '그게 누구지?' 수수께끼 한바탕이었다.
요즘은 몰입이 필요 없을 때 라디오를 켠다. 차를 몰면서 듣는 라디오의 음악은 빨간 등으로 빡빡하게 채워진 정체된 길에서 한 발짝 뒤로 마음을 내려놓게 만든다. 남들 자는 시간에 내일의 전시를 준비할때 라디오앱을 틀면 안성맞춤이다. 그렇게 친구가 들려주는 백색 소음을 뒤로하고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우아할 수 없는 모습으로 부산거리면 십 대로 돌아간 기분이다. 내일은 쉬는 시간에 잠시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내 친구를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