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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Feb 10. 2024

LOST IN TRANSLATION

同床異夢,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 제임스 조이스 있잖아. JAMES JOYCE. 거기서 COFFEETEL을 더하라고.

"어렵다."

"난해한데?"


- 왜 더블린 사람들하고 《율리시즈》를 쓴 아일랜드 작가 말이야.

"네가 옛날부터 책은 많이 읽었지. 인정."

"제임스는 처음 듣는데?"


- 중국 출장 가면 거기서 묵곤 한다고.

"근데 한참 커피 이야기하는데 왜 갑자기 호텔이 나와?"

"그래서 그 아일랜드 작가가 중국에 호텔을 차렸다는 거야? 커피숍을 차렸다는 거야?"


- 아니, 호텔이름이 제임스 조이스 커피텔이고, 이런 드립커피가 거기 가면 있어.

"거기에 드립커피가 있는데?"

"너 서양보단 동양사상 좋아하지 않았냐? 장자!"




중국에 출장 갔을 때 '저페이(喆啡酒店: JAMES JOYCE COFFEETEL)',중국어로 된 발음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작가의 이름을 호텔 키에서부터 발견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천천히 눌렀다. 1701호. 갈색 방문을 열자 피로로 한 바가지 튀어나온 입이 다물어졌다. 연한 목재로 된 책상 위엔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된 스탠드와 짙은 마호가니색 가죽 책받침 위에 중국어로 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ULYSSES 한 권이 올려져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침대 위 한가득 18세기에서 뽑아져 나온 커다란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기다란 주둥이를 가진 핸드드립 주전자와 제임스 조이스 이름이 박힌 붉은색 인스턴트 드립커피는 새벽까지 시간의 거리를 쏘다녀도 좋다고 허락하는 문학 초대장이었다. 텁텁한 황토가 부는 중국에서 십 대의 얼굴로 제임스 조이스를 초대할 수 있다니! 아쉽게도 친구들이 제임스 조이스와 율리시스를 기억하지 못해서 대화가 산으로 가 버렸다. 그래. 부연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들의 삶이 언젠가 우리가 꿈꾸던 시절과 달라졌다는 그런 이야기일 테니까.


분명 한국 사람들과 한국어로 이야기를 했는데 통역이 필요할 때가 있다. 타국에서 외국어로 이야기해도 그렇지만, 한국어든 외국어든 이야기를 나눠도 대화가 명쾌하지 않다. 이렇게 심드렁해지는 마음을 안고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처럼, 우리의 말은 길을 잃는다. 귀를 기울여도 상대방의 말이 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넌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Map of the World from the best authorities] JAMES JOYCE COFFEETEL.  2019. PHOTOGRAPH by CHRIS




미래가 안 보인다고 눈을 내리까는 행동은 세상 사는 누구나 한 번쯤 하는 몸짓 같다. 만약 앞날을 알 수 있다면 달라질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운명의 여신이 내게 미래를 보는 망원경을 준다 해도 난 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상황을 알면 싫든 좋든 간에 그대로 행동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유비쿼터스의 시대를 거쳐 점차 몸속에 박힌 칩을 통해 감정도 전달되고 번잡한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통번역을 시도할 노력도 필요 없는 구도가  전개되겠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합일점을 찾는 행위는 미래에도 의식 있는 사람들 간에 돋보기로 태양빛을 끌어모으는 일처럼 하나의 진지한 집중을 요구할 것이다. 서로가 통한다는 것은 같은 언어를 쓰는 것만이 아니라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도 된다. 꼭 끌어안을 필요도 없겠지. 보고만 있다면야.


개인적으로, 통역이 불가한 의식의 공백으로 인해 지루한 면이 없지 않지만 소피아 코폴라가 설정한 부재적 장소는 불면의 밤에 어슬렁거리다가 잠들기에 적당하다. 호텔방, 디너테이블 겸 뮤직펍, 오락실, 엘리베이터, 수영장, 노래방, 나체쇼장, On Air가 켜진 방송국 녹화실, 기자회견장, 택시 안, 샤워장, 음식점, 사우나장. 일본에 대해 갖는 서양인의 입장이란 한계적인 시선은 잠시 접어두고 태도를 전환하여 낯선 탑에 갇힌 외부인의 불편함에 몰입해 본다.


말도 통하지 않고 갈 곳도 없고,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는 지긋지긋한 독방을 탈출할 공범을 찾아서 도시든 나라든 경계 없는 곳으로 날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갇힌 곳을 벗어나고 싶다며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탈옥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던가? 속과 겉의 영혼에 시커멓게 낙인이 찍힌 채 잭팟을 꿈꾸며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카드패의 경쟁자들과 자유로운 터에서 움직이던 사람들은 또한 어떠한가? 물 만난 듯이 유영하던 고기들도 어느 날, 스스로를 발견할 수 없는 태양의 흑점에 봉착할 때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선인장 가시처럼 우뚝 솟아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대 품에 안겨 키스를 나눌 때도 난 외롭다오.' 나만의 여유가 생길 땐 테이프가 늘어지는 무심한 감정에 자주 사로잡힌다. 서로를 사랑하겠다는 일종의 공유를 전제한 뒤에도 여전히 고독감을 갖는다는 것은 둘이 하나라는 접점의 언약을 깨는 것인가, 아니면 개체만의 공간을 유지한 채 깨어날 날을 꿈꾸면서 스스로를 동면시키는 생존책인가. 팩스머신이 누군가의 말을 기계적인 언어로 번역하여 끼역끼역 뱉어내면 수분 잃은 낙엽은 벼랑에서 바다와 같은 파란 술을 마시고 흔들거리겠지.




2004년의 흩어진 책장을 넘겼다. 그땐 마음이 이랬구나 싶다. 누군가 그랬다. 


"넌 머릿속에 오래된 늙은 남자 하나 데리고 사는 것 같아."

- '그래. 맞아. 그리고 가슴속엔 아주 젊은 여자가 하나 있어.'


그래서 CAZA도 세상으로 나오게 된 거겠지.


난 너의 말 밖에 들리지 않았어.

우리에겐 통역도 필요 없었지.

너는 바로 나였으니까.




[ULYSSES, JAMES JOYCE & MAGIC KEY] JAMES JOYCE COFFEETEL. 2019. PHOTOGRAPH by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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