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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Feb 10. 2024

ATTRACTION

매력과 사랑은 별개, 내 남자의 유통기한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좋아?"

- 뭘 말하라는 건데?

"있긴 있어?"

- 있지. 범려.

"이름 특이하다. 그 사람은 누구야? 뭐 하는 사람인데?"

- 그런 사람 있어.

"지금 어디에 있는데?"

- 하늘에.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시기, 사람들이 이상형을 대라고 하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어떤 사람이 매력적일까?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미안한 표정으로 더 이상 묻지 않기에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범려(范蠡)의 매력도는 완벽에 가깝지 않고 한 절반 정도 된다. 이미 서시하고 떠났으니까. 떠난 사람 잡아서 뭐 하는가? 《삼국지》의 제갈량, 나의 공명(孔明) 선생과 김용(金庸)의 소설 《영웅문(英雄門)》의 양과(杨过)도 좋다.


난 군집 형태의 축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기호가 생긴 가장 큰 원인은 목소리 때문인 듯하다. 아나운서들이 긴박하게 설명해 주는 축구경기는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시각적인 관찰면에서는 썩 괜찮은 활극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기 있는 선수들이 개별 인터뷰를 할 때 성대에서 뛰쳐나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확 깬다.


1학년 누가 소개해줬는지 모르지만, 축구선수들과 소개팅을 한 적이 있었다. 먼저 관계의 수식처럼 멀뚱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커피를 시켰다. 커피 한 모금 마시기 무섭게, 육체적인 파워가 좋아선지 목청도 컸던 상대방들이 웅성거리며 소란스레 말하기 시작했다. 재잘재잘 떠도는 목소리 위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커피맛은 곧 방향을 잃었다. 난 상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없었. 아마 서로 관심사가 달라서 그랬을 것이다. 특히 데이비드 베컴처럼 얼굴과 목소리가 따로 노는 불협화음은 눈앞으로 지루함을 끌고 왔다. 지근한 커피를 털어 넣은 뒤 미안하지만 커피값을 내고 얼른 빠져나왔다. 내 인생의 공식적인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이 소개팅의 여파로 비공식은 모두 패스다. 이후 모두가 열광하는 월드컵은 아이스크림 월드콘보다 끌리지 않다.


종합예술의 정점인 영화에서 보듯이 개별로 떨어져 나온 개체들이 매력적이려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가진 무성영화배우들이 유성영화 시대의 개막 이후 급속하게 인기를 상실한 이유는 움직이는 화면을 소리와 동기화시킨 기술의 발전 때문이었다. 관객에게 주어지는 이미지의 매력과 목소리의 공감각적 기대감은 형태와 소리가 같은 공간에 놓일 때 동일시된다는 원칙을 살펴보면 상대에게 투여된 나의 실망은 극히 정상적인 기호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외모에 대한 평가는 하지 말자고 해도 기본적으로 시신경과 뇌하수체가 예민한 만큼, 동공을 흔들고 맹점에 꽂히는 이미지에 대한 갈망은 육체적인 욕망을 자극하긴 한다. 그런데 피크로 올라갈 때 목소리가 문제이다. 탐스러운 풍선과 같은 피사체를 한입 물면 펑하고 매끄러운 구체의 외관은 터져버린다. 손바닥엔 몇 조각의 감정과 귓속을 때리는 잔영뿐이다. 그래서 금세 조루가 되어버릴지 모르게 쉽게 사그라드는 타인에 대한 매력도는 섣불리 평가하지 않는다. 서로 미안하니까. 좀 더 까탈스럽게 굴자면 내면의 목소리가 괜찮은 머릿속에서 앤돌핀을 샘솟게 하는 사람, 사람이 오래갈 있는 사람이긴 하다. 굳이 소리 내서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첫눈에 반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을 넘길 수 없는 것일까? 호르몬의 신비한 작용이 정지하는 시점이 되면 상대방에 대한 인내와 믿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인가? 사랑에 관해 수많은 해석과 연구가 난무하지만, 구속과 자유에 관한 인류의 숙제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그림 형제의 어부와 그의 아내(Von dem Fischer un syner Fru)》, 욕심 많은 아내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는 고전적인 동화에서 발견한 남녀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사랑, 결혼, 행복, 갈등, 위기, 화해라는 규격화된 사랑의 방정식에 도입한 도리스 되리(Doris Dörrie) 감독은 코믹한 소견을 제시하며 현대적 사랑의 유쾌한 난센스를 보여준다.


우리가 사랑한 기억은 피곤한 일상에서 허무하게 지워지는 낙서와 같다. 영원히 함께 하자던 맹세는 새빨간 버블 껌처럼 시고 달콤한 향기를 남기며 허공에서 터져버린다. 생활을 꾸리려고 발버둥 치는 노력은 개인의 성취욕으로 비치기 쉽고, 자신을 위해 일하는 행위는 가족을 외면하는 무관심으로 변해버린다. 양의 뇌를 파먹기 위해서 계획적으로 기생할 숙주를 찾는 아메바 같은 여자의 탐욕은 마음의 안정을 헤집어놓고 만다. 미래에 대한 의지도, 꿈도 없이 안식만 꿈꾸는 남자의 희망은 철이 없고 무력하기만 하다. 여자의 제안으로 찰떡궁합처럼 뭉쳤다가 다시 여자의 변덕에 자석의 N극과 N극처럼 튕겨나가는 두 사람. 이들에게 ‘잉어’가 일본말로 ‘사랑’을 뜻한단 사실이 뭐 중요하겠는가? 


우리는 평소 곱다운 말을 쓰고 살아도, 본심은 예의에서 한참 벗어나있다. 나의 배우자가 싸구려 잉어에서 비단잉어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혹시나’ 같은 가능성에 기대어 온갖 위장을 다해 위태위태하게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부부란, 변화에 익숙해진 카멜레온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혼자서 바뀌면 혼자만 튈 수밖에 없다. 둔갑술은 둘 이상 해야만 더욱 스릴만점인데! 한 편의 인생을 극장용 소극으로 만든 도리스 감독은 'End of May'나 'Dreams Be Dreams'처럼 익숙하고 사색적인 멜로디에 사랑을 휘휘 저어 부담 없이 즐길 점심 샐러드용으로 바꿔놓았다. 동화는 원래 편견 없는 시절에 잘 통하기 마련이다. 두 시간의 엉터리 마술이 먹히는 장소는 순수의 시대로 돌아간 플라잉 피시 닥터 캠핑카. 히피의 기운이 넘치는 이런 곳이라면 고루한 일상의 태도만이 아니라 사랑의 비움에 관해서도 찬찬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2005년, <내 남자의 유통기한(Der Fischer und Seine Frau: The Fisherman and his Wife)>을 보고 한참 글을 적었다. 그때는 영화포스터와 팸플릿에서 광고했듯 '사랑의 유효기간은 3년'이라는 말에 꽂혀있었다. 사랑은 삼 년 동안 썩지 않을 통조림 속 내용물 정도로만 여겼. 젊고 설익었고 생활에 치였던 나는 만남이 삼 년이 지나있으면, 삼 년이 가까워올수록, 아니 일 년도 되지 않아서, 아니 아주 잠깐이어도 이별의 삼년상을 준비했다. 사랑보단 자유를 더 사랑한 바람난 선녀처럼 언젠가는 이 모든 구속에서 벗어날 거라고 탈출만을 꿈꾸었다.


이젠 시간이 지났고 개념도 바뀌었다. 식품도 상품도 유통기한보다 소비기한으로 정정하여 길게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시대다. 사용기능을 상실하면 즉시 폐기되는 유통기한보다 소비기한은 보관방법만 준수하면 섭취해도 안전하다는 개념이다. 전환은 나쁘진 않은데, '사랑'의 개념에 있어선 사라지는 소비기한보다 생존에 가까운 '보존기한'으로 변경하면 어떤가 제안하고 싶다. 보존은 지속적인 사용을 의미하기에 친환경경영(ESG)에 적합하다. 누군가의 장소에 안착한 물체가 미라처럼 보존만 잘되면 천 년 넘게 장수할 수도 있겠지. 소비든 보존이든 잘 보관한다고 해도 사용자의 입장에선 상했을까 먹기가 꺼림칙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고고학자나 미술사학자들은 잘 보존된 시간의 유물과 거장의 그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한 희열을 느끼지 않던가. 별 것 아닌 것도 시간 속에서 살아남으면 천년 여왕처럼 전설이 되듯이, 본체로서의 지속과 살아남는 것이 삶에서의 관건이다.


일전에 W의 집에 갔다가 찬장의 통조림이 15년이나 됐는데도 썩지 않고 고이 존재를 알리고 있는 걸 보고서, 이 통조림의 외형을 인내한 인간의 게으름에 실소를 터뜨렸다. 어쩌면 그의 집에 모셔둔 통조림은 게으름이라는 습관적 나태함의 결과라기보다 대상에 대한 외면이나 무관심의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맥도널드 햄버거는 수십 년 상온에 놓아둬도 썩지 않는다는 기사들을 보다 보면, 감정의 유통기한과 본체의 소멸다른 말인가 싶다.



[THE EXPIRATION DATE of LOVE] 2024. 2. MIXED DIGITAL WORK DESIGNED by CHRIS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요?

사랑 통조림,

난 사랑은 열 수 없어요.

사랑은 슬픔과 기억들을 담고 있어요.

난 사랑 통조림은 열 수 없어요.


Is there an expiry date for love, too?

Canned love,

I can't open it.

Love holds sadness and memories within.

I'm unable to pry open canned love.





통조림의 보존기간을 길게 하는 비법은 통조림 국물 속에 숨겨져 있다. 우리들의 사랑에는 어떤 통조림 국물이 필요할까? 나에게 맞는 통조림 국물을 개발해야 겠다.

2013. 7. 25.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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