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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31. 2024

THE MISSION

불분명한 대리자의 세계에서 사명(使命)의 역할

오늘이 부활절(The Day of Resurrection)인지 핸드폰 뉴스 알림을 받고 알았다. 4월 10일 총선이 얼마 안 남아서인지, 정치인들의 부활절 행진이 연신 홍보 중이다. 비행기표가 주말에 곱절로 비싸다고 해서 서둘러 돌아왔더니 그 이유가 부활절(EASTER)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상기한다.


방금, 제22대 국회의원선거 투표안내문과 선거공보를 받았다. 일요일에도 배송되는 부지런한 선거관리위원회 활동이다. 홍보물을 보니 복잡해진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소중한 한 표를 기권할 수 없으므로 선거는 해야 할 텐데, 누구를 뽑을지 모르겠다. '최선(最善)이 되지 않는다면 차악(次惡)을 선택하라'는 최악(最惡)의 회피이론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어버린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의 허점을 보여준다.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선택한 자가 선량하고 성실한 봉사자가 아닐뿐더러 후보자로 등장한 모두가 포식자인 늑대일 때, 연약한 양들은 늑대에게 접대할 아궁이 위로 온몸을 갖다 바치지 않고선 과연 누구를 주인으로 삼아야 할까? 기억의 오늘자에는 절묘하게도 영화 <미션(The Mission)>에 대해 적은 글이 있었다. 그때의 생각과 지금의 생각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THE MISSION> 불분명한 대리자의 세계에서, 사명(使命)의 역할


"빛이 어둠 가운데 빛나고, 어둠이 그것을 이기지 못했다."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

요한복음서 1장 5절 John chapter I verse V


"내가 산을 옳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에 의해 구제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거나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도 아니하다. 내가 어렸을 때 말하던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믿음 소망 사랑 중에 모든 것이 있을진대,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대의를 위해서는 소의를 저버려야 한다"는 용자(勇者)들의 말이, 역사를 거쳐 정치적인 바이블로 전해지지만, 누구의 죽음 앞에서 가장 강한 인간의 재가를 얻은 정당한 살인과 착취가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반문해 본다. 번성하고 융성한 대리석 집에서 호화로운 장정에다 야들 거리는 깃털펜으로 감춰둔 재물들을 기록하고, 자유로운 새떼처럼 뛰놀던 야생의 사람들을 천한 식솔로 부리며, 나는 자도 떨어뜨리는 솔개의 권세로 뒤따르는 무리에게 지상의 허약한 벌레들을 처단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자들, 진정 그대는 누구이길래 이 세상에서 숨 쉬는 모든 산물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교부받았는가? 언제부터? 어디서? 무슨 이유로?


어른들이 벌인 전쟁이 장성한 청년과 싱싱한 처녀와 조는 갓난이와 늘그막에 가린 사람을 삼키고 나면 부서지고 조각났던 피 묻은 무기가 아이들의 손에서 장난감이 되는 걸 본다는 자체가 섬뜩한 발견이다. 균등한 정의를 추구하고 삶을 영유할 권리가 생명을 가지는 인간 누구에게나 고유하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욕심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몫을 존중하는 건 고사하고 태어난 생명까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공평한 세계라는 모토를 구현하기 위한 근 현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다양한 결합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자유를 늘리려면 타인의 자유를 압박할 수밖에 없다는 거대한 모럴(Moral)의 결함을 안고 있는 물질문명(物質文明)과 자본주의(資本主義), 이것들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民主主義)는 모든 문제점을 조절할 신 학설 내지 운영사상이 등장하지 않고서는 소유와 자유, 이익과 분산이란 조절점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산 자들의 세계는 죽은 자의 세계를 안고 간다고 했다. 가장 의로운 정신들이 저승불을 밝힌다 하던데, 우리는 어떤 문명을 죽이고서 산 문명을 이어가고 있을까? 눈을 뜨고 있지만 내 눈에 산 것은 누군가? 내가 살아가는 둘레는 세상의 수많은 것들로부터 보이지 않을 미세한 단면에 지나지 않지만, 이 우물 안의 세상 또한 개인에게 보장받지 못할 대리의 역할을 강요하며 다수의 원칙에 따를 것을 천명하고 있다. 다수주의에 약자들의 권리가 보장된다고 하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La dynamique du capitalisme) 썼던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도 지적했듯이, 문명은 미개라는 언어를 깔고 있으며 원시의 토대를 망가뜨리지 않고선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없게 되었다. 단순히 민중을 대변하는 민주주의의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신의 대리인으로 규정지어진 종교인들까지 타자의 무지하고 이해할 수 없는 미개의 언어를 살해하여 섭취하는 것에 익숙하다.



<미션(The Mission)>은 신의 공식 대리자로 자칭하는 교회 속의 분열과 속인들의 물질에 대한 소유욕, 권력에 대한 압박감, 문명과 비문명을 규정하는 제도적인 인간들의 거침없는 파괴, 이성과 비이성적인 사랑의 신념으로 출발하는 원시적인 투쟁이 영(靈)과 육(肉), 선(善)과 악(惡), 사랑(愛)과 지(知)의 양면처럼 갈등하는 영화다. ‘사랑’이라는 임무수행에서 고통이 번지는 이 필름은 이상하게 나에게 각 인물에 대한 비판이나, 혹은 인물 속에 나 자신을 전이시키곤 했던 여타의 영화에 달리, 그저 문명(文明)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샘솟게 하였다.


문명과 인생, 나를 판단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가치는 굉장히 살육적이다. 페르낭 브로델의 책을 떠올린 것은 페르낭이 물질문명(Material Civilization)과 자본주의(Capitalism)의 기본토대가 다수의 공익을 구가하는 민주주의(Democracy)처럼 정치적이고 사회경제적인 욕망에서 발로한 인간의 소유와 안정이라는, 허구적인 존재를 대리한 체제라고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화 <미션>을 보면서 ‘사랑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신의 대리인이 전했던 몸짓도 물권에 눌려서 살아가는 이기적인 총탄 앞에 무력해질 만큼 허약하고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수긍과 동시에 실망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숭고했던 죽음이 의롭다는 걸 인지한 자들이 존재한다 해도 헛되이 떠나간 자들의 생명은 반복되는 미래의 타임 라인 상에서 가치를 발휘하기 힘들다.


타인과 더불어 사는 마음은 내 것에 대한 보증을 위해선 과감히 버려야 하고 호주머니를 늘리기 위해 문명의 도구를 잔혹하게 재단하는 것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들이 들끓는 작금의 세상을 보면 씁쓸하다. 욕망의 이기가 던져주는 안락함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고 그 비정함은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살 터전을 잃어버리고 기댈 곳 없는 혼혈고아들이 백인의 노예로서 눈물 흘렸던 남아메리카 역사처럼 우리도 타인의 기준에서 쓸모 없어지면 세상이란 물가에서 내버려진 물고기가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을까. <미션(The Mission)>은 본 지도 시간이 꽤 지난 영화다. 가끔 여행의 낭만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남아메리카의 비밀 살육에 대해 언급하면 "아직까지 그런 곳이 있겠어?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다른 곳의 불행이 뭔 상관이지? 우리가 사는 이곳에도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라며 되묻는 사람이 있다. 그럼 반대로 그 가까운 불행을 애정을 가지고 살펴본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편안한 자리가 만들어지려면, 그만큼의 뒷손질이 필요하다. 매끄러운 세계의 보이지 않는 손은 불행과 행복에 똑같이 영향을 끼친다. 삶이야 어떻게든 계속되겠지만, 산 자에게 기억되지 않은 죽은 이들이 많다는 것은 어쩐지 불행해 보인다. 잠시 주어진 행복이 슬픔을 부르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일 것이다.


2005. 3. 31. THURSDAY




죽음과 살육에 대한 이미지는 어렸을 때부터 맴돌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을 꿨는데, 1년 365일 중에 꿈을 꾸지 않은 날은 거의 없었다. 아름다운 꿈보다는 전쟁에 관한 꿈이 많아서 혹시 나에게 카르마가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잔인한 전사(戰士)였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피칠갑을 하고 시체로 뒤덮인 황야를 응시하는 신랄한 꿈을 꾸고 나면 한국이란 곳에서 가죽 잘못 씌워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종교적인 색을 갖고 있지 다. 다만, 삶의 과정에서 맞닿은 순간의 기억 때문인지 기독교인만 아니라 불교인이든 회교인이든 이름도 거룩한 신을 믿는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편견도 없지 않다. 죄를 저지르고선, 혹은 눈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과 살해를 반복하고선,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알라를 찾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타자의 삶을 알지 못한다고 하여 타인을 억압하고 말살하고 자신의 신념만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잘못을 저지르고 신부르면 죄가 씻긴다고 생각하는 자의 기도하는 모습보면서 열이  대거리를 한 적도 있다. 그러나 목 터지게 말해봤자 이미 신을 벗어난 광폭한 믿음은 스스로 선택했으나 끊을 수 없는 습관이 된 니코틴이나 알코올처럼 자동적으로 혈관 속에 인이 박혀있기에 설득은 고사하고 손댈 수 없음을 알게 된 후 내버려 두었다. 그저 나는 그런 맹신과는 별개가 될 테니 다수의 믿음을 강요하지 말라고 선언했다.


그렇다고 완전 무교라고 하기엔 신이 없다고 믿는다던지, 타 종교를 배척하는 감정은 없다. 모든 믿음은 광적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면 약한 자존을 가진 개인을 서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생명에는 영(靈)이 깃들여져 있고 그 순환과 소멸은 시간과 형태를 달리할 뿐, 인간의 삶과 비슷하게 보인다.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믿음과 맹신, 선과 악은 양면의 모습을 지닌다. 현재는 예전보단 과격함은 많이 버렸다. 가치의 차이에 대한 논쟁보단 서로 다름을 보자고 다독인다. 신에게 잘 살게 해달라고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행복하고 싶다고 개인적 소망을 비는 사람들을 봐도 조용히 넘어간다.



영화 <미션(The Mission)>에서도 보이듯이 방향을 상실한 불분명한 대리자의 역할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란 메타포를 전달하기에 부족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사명은 사랑, 믿음, 소망, 행복. 이런 단어로 볼 때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하는데 일조할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 모호한 명제를 진정한 실천적 의미로 만드는 이는 극히 드물며, 문명과 자본의 모순적인 체제에 놓인 인간의 마음과 현실은 이율배반적으로 엇갈려있다.


일을 할 때 정치와 종교에 대한 이야기는 불문율이다. 특히 자신과 삶의 관점이 완전히 다른 해외에선 이 두 가지 주제를 발설하는 것은 사업과 친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엄격한 정치적 종교적 신념과 이익의 경제가 추구하는 논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굳이 연결하자면 황금과 금전이 이상적 신념을 피지배자에게 주입하여 지배자들의 권력을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생활적인 확신과 기반적인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 변질된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물질문명의 자본주의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로 보인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권하는 사람들을 보고 좀 놀랐다. 사업과 종교는 무슨 관계인가? 국제정치관계에 대한 수식을 공부하면서 정경유착(政經癒着)이나 정교분리(政敎分離)를 듣긴 했는데 경교일치(敎一致)는 처음 접하는 신선한 개념이었다. '외로운 개인은 승냥이처럼 무리를 짓고, 돌 같은 단체의 지지를 받고, 파리떼 같은 권력을 형성하고, 만인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소리는 듣기에 기반이 굉장히 허술한 관계이론이었다. 종교에 대한 선택권은 헌법에도 보장된 국민의 자율권이다.

 

<헌법 제20조 1항> 모든 國民은 宗敎의 自由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헌법에선 신앙을 갖지 않을 자유에서 신앙을 강요받지 않을 자유를, 신앙을 가질 자유에선 신앙 침묵의 자유를 부여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런 개인적 자유에 대해 아무런 고려 없이 권유와 강요에 익숙하다. 무리로 편입시키고 그 편입을 거부하는 자에겐 집단 따돌림처럼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사업하는 정치가들 또한 무리를 돈독하게 형성한 종교적 단체에서 표를 얻기 위해 몰두한다. 따라서 자유와 주권을 상실한 정치와 종교에 대한 개인적인 관점은 그냥 듣기만 하고 발설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처세술이다.


간혹 한국에서 정치와 종교로 주제를 논하는 사람들을 보면 조용히 자리를 피한다. 웅성거리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 가벼운 발설자들은 절대로 강력한 권력자가 될 수 없고 그저 불필요하고 왜곡된 소문만 전하는 확성기의 역할로 확신된다. 그들은 사고는 생성과 단절되어 있고, 그들이 써대는 이야기는 권력자에 기대어 정보를 확산하고 돈을 벌어야 유지되는 미디어의 역할에 충실해있다. 참여민주주의를 향하기엔 배웠다는 사람들이 논하는 색조는 단색이며, 화합할 어떠한 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사회를 장악할 자신의 아집과 믿음을 언어적으로 교리화하고 권력에 대한 열망을 선동으로 포장하여 자신들을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듣다 보면 주관적이고 민감한 사설이라 유튜브 알고리즘에는 아예 검색되지 않게 시청금지와 함께 단어를 삭제하고 있다. 일을 해야 하는데 주변에서 계속 떠들면 시끄럽다고 한마디 하기도 한다. 탑다운(TOP DOWN)으로 구성된 엘리시온(ELYSION)신화를 살펴보면 천국에 들어갈 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기한 자가 속하는 운명을 벗어나고자 하면, 혹은 아닌 자가 벗어난 운명에 속하고자 하면, 완전한 초인이 되지 않고선 자신의 길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귀가 얇고 성질도 급한 아주 평범한 인간들은 절대 신화 속으로 편입될 없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 길을 있는 능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길은 그냥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 길을 걷는 것은 사는 자의 몫이다. 정치와 역사를 배웠어도 영화와 기억에 대한 촌평뿐, 전혀 써먹을 데가 없는 이 탐욕스러운 세상을 보면서 차라리 감미로운 음악을 듣으며 어지러운 삶을 환기시키는 것이 하루를 사는 데 더 도움이 될 듯하다.





[THE MISSION]  2005. 3. 31 MOVIE POSTER



시간이 앞으로 다시 복제할 수 없는 창조물이라면 이미 쓰러져간, 아직 성장하는, 곧 저물어갈 산재한 영혼도 그러하리라. 앞으로의 세계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당한 가치는 인생을 통틀어 연구해야 할 새로운 모럴이 될 것이다.


If time is an irreproducible creation moving forward, then shattered souls, fallen, still growing, and soon fading, would be no exception. In the world to come, the rightful values that humanity should pursue will be new morals to be explored throughout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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