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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31. 2024

SWORD

김 훈 《칼의 노래》 星曲流月河, 劍哭染血海

다양한 인간상이 모인 무도(武道)의 세계는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이치를 칼에 새긴다. 목숨을 앗아갈 만큼 두려운 무기이지만 또한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양면(兩面)의 칼은 방금 무슨 일을 벌였는지, 빛을 인식하기 전부터 후각을 진동하는 흔적을 남긴다. 나는 칼을 잘 다룰 만큼 무예에 뛰어난 재주는 없지만 그 칼을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에 따라 다른 냄새가 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주물에서 바로 꺼낸 땀냄새, 음식을 썬 냄새, 피를 머금은 냄새, 종이를 자른 냄새, 옷감을 끊은 냄새처럼 기억의 곡성을 흘린다.


김 훈의 《칼의 노래》, 이 소설은 어릴 적에 읽었던 위인전기처럼 딱딱하지 않고 그리 정교하지도 않다. 위대한 장수가 세상에 고하는 솔직한 방백으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게 되는 나약한 인생의 고통과 전우의 피로 물들인 바다를 가르는 억한 심정과, 숱한 근심으로 달빛을 품던 한밤의 치열했던 기록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위인을 다룬 소설을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고 두 권의 분량을 자랑하고 있었기에 집어들 때부터 내심 궁금했다. 충무공 이순신, 그는 어떤 인물일까?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을 다른 이의 음성으로 확인하는 작업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멈칫하였다.


《칼의 노래》에는 일반 전기에서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는 개인의 고통과 번민과 좌절이 그려져 있다. 인물을 인터뷰하던 기자의 시선으로 상황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가 이순신인 양, 빙의를 체험하게 하기에 독백이 아니라 방백의 서술로 인식되는 이 소설은, 한 사람의 일생(一生)을 장문(長文)에다 차입했던 많은 소산물처럼, 중립을 지키려던 작가의 목소리가 컸다. 어쩔 수 없는 전기소설의 한계다. 인물을 재조명하면서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쓴다는 자체가 작가가 살아오면서 고수했던 삶의 태도를 집어넣는 것까지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에, 이쯤에서 넘어간다. 모든 후각을 총동원하게 만드는 작가가 마음에 들었다.


전부터 느껴왔던 온갖 비린내와 누린내, 썩은 내를 끄집어내려고 기를 썼는데 때마침 글을 읽던 곳이 병원이라서 그 시도는 어렵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콧속으로 흡수되는 포르말린 냄새에는, 성분이 희석되어 버린 삶과 죽음의 경계가 미묘하게 섞여있었다. 인육이 썩는 고린내, 오랫동안 뒷물 하지 않은 여자의 날비린내, 다리사이의 젓국내, 푸른똥의 덜 삭은 젖냄새, 죽 어머니의 오래된 아궁이 같던 몸냄새, 내장과 선지에서 풍기는 고기 누린내, 젊은 어머니의 비린 젖냄새, 죽처럼 흘러내리는 시체 냄새. 구린 냄새의 대향연은 바로 일상의 전쟁터에서 흔히 토해진 냄새가 아니겠는가. 갑자기 세월의 겁을 두고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고된 운명을 보니 씨를 내렸던 흔적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아서 슬퍼졌다. 매의 눈을 닮았단 소리가 부담스러웠다. 잠시 눈을 감고 짠 바다 냄새를 생각하기로 했다.


김 훈은 글을 적으면서 이순신을 자주 찾았던 모양이다. 바다와 섬의 서술이 단순하면서도 흥미롭다.


바다에서는 늘 먼 섬이 먼저 소멸하고 먼 섬이 먼저 떠올랐다.

먼 산과 먼 섬들의 갈뫼빛 능선.

바다를 건너오는 바람은 산맥처럼 늘 출렁거렸다.

밤이면 술 취한 적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바다.

일출 무렵 아침 바다에서는 숨을 곳이 없었다. 사지에서 죽음은 명료했고 그림자가 없었다.

나의 바다는 쓰레기의 바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쓰레기를 치우는 아주머니를 보며 의자 위에서 발을 들었다.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리고 계속해서 책에 시선을 두다가 방송에서 그녀의 이름을 호출하길 기다리는 도중, 어떤 부부를 보게 되었다. 굉장히 고통스러운지 남편 다리사이에 얼굴을 감싸면서 머리를 묻고 있는 여자. 남편은 흐느끼고 있는 부인의 목덜미를 만져주고 있었다. 홑꺼풀이 검은 동굴로 파였던 눈길은 책에 두었던 시선을 건너뛰어 그들에게 꽂혔다. 마침 마지막을 읽고 있던 중이라서 대기상태 전에 끝내 버리려고 했는데, 앞에 놓인 고통이 충무공의 고통보다 진해 보였다. 가까이 보는 약한 아픔은, 멀리 보는 강한 아픔보다 강렬한 것 같다. 결국 집에 돌아와서야 이순신이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막연했던 기다림은 나의 사람들을 한없이 바다에다 흘려보냈고

예정됐던 기다림은 나의 사람들을 한없이 채찍으로 종용하였네.

나 칼 들어 그대들의 피로 染할 터이니 모든 굴레는 끝날 것일세.


등장하는 이순신도 그렇고, 그를 써 내려간 김 훈도, 나의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나이였다. 젊은 사람에게 욕먹고 제정신을 차리라고 고함 듣는 형벌에서 이들은 멀어져 있을까? 적어도, 우매하지는 않아서 주변의 원망은 없겠다. 나이가 들면 서러운 날이 많아진다. 잘못된 삶을 반성하는 후회일까. 조국을 빼앗겼던 임금의 끝도 없던 회한과 슬픔의 교지처럼, 전쟁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평화가 사라진 세계는 무의미한 곳일 텐데 철없이 목숨을 내놓으면서 칼을 들고 싸워야 하는 일이 왜 생기는 것인지 나 또한 이해할 수가 없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들게 되는 칼이 우는 이유도 다 나를 베는 일이나 다름없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이순신은 등창으로 무척 고생했다고 들었는데, 소설 속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저 서캐와 이, 비듬을 긴히 긁으면서 무거운 갑옷에 숨겨둔 짓무른 싸움을 계속하던 생활에 탄로 난 장수가 보일 뿐이었다. 며칠 전 다리를 긁었다. 피가 날 정도로 긁었다. 봄이라 그런지, 몸 안 수분들이 날아가서 여기저기 버짐이 심히 핀 자리를 긁었다. 그러나 가려움이 가시지 않아서 몹시 울고 말았다. 그러한 것일까? 긁어도 아물지 않는 삶의 회귀는 나를 땅에 메치면서 죽음도 점차 가벼이 여기라고 말하는 것일까?


배는 생선과 같고 사람의 몸과도 같다. 물은 세상이다.

물속을 긁어서 밀쳐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몸이 물에 포개져야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돌아서고 펼치고 오므릴 수 있다.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


세상이 메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속에 놓인 인간이 나를 메치는 것일지 모른다. 좋은 이들과 만날 시간도 모자란 이때에 케케묵은 냄새를 피우는 썩은 환멸의 인간들과 만난다는 것이 나에겐 적잖은 괴리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삶을 많이 살아본 노인네처럼 죽음의 그늘을 지우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끌어 안기에는 종결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암울함이 나에겐 너무 강한가? 김 훈의 속마음이겠지만 가장 큰 적 히데요시가 하룻밤 꿈처럼 사라진 날, 이순신은 이렇게 말했다.


히데요시의 칼은 얻을 것이 많았고, 나의 칼은 얻을 것이 없었다.

나는 히데요시의 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의 무력이 안개처럼 증발된 무기력에서 죽고 싶었다.

아마, 그것은 나의 가망 없는 사치였을 것이다. 가망 없고 단념할 수 없는 사치였다.

그 사치 속에서 히데요시는 나의 적이었다.


이 문장을 달리는 차 안에서 얼마나 되뇌고 씹었는지 모른다.


‘나의 칼은 무기력하고 얻을 것이 없다. 主敵도 없고 名分도 없고 正義도 없는 평범한 자들의 그물에서 나의 죽음이 사치스러울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지금은 그렇다.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가 되는 것인지조차 이젠 경계가 희미해졌다.’


그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에게 며칠의 통한을 잠시 풀려했는데 그는 화창한 봄을 즐겨야 했다. 난 입을 닫아버렸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집에 들어와서 일상의 정리를 한 뒤에 바로 쓰러져 잤다.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히데요시처럼 남의 목숨을 베면서 천하를 얻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순신처럼 충열의 의지로써 사랑을 지키고 싶은 마음도 없다. 줄곧 게으른 자의 무력함일 뿐인가? 그러나 난 전법도 없는 전술에 의지해 칼을 힘없이 휘둘러야 하고 그렇다고 이 칼질이 무의미하다 몸을 방치한다면, 이 생에 기댄 사람들이 너무나 울 것이기에 나는 오늘도 내일도 이름 없는 뭍에다 무용한 칼의 울음을 내던질 것이다. 저녁에 꿈을 꾸었다. 사랑하는 모든 이가 백색 가루로 내려앉는 꿈을! 울지 못했던 칼의 비명을 들은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표정은 벨 수가 없고 타버린 마음도 벨 수가 없지만 상처를 입는 것은 매 한 가지 일터.


현대어로 회생한 이순신이 말했던, ‘멸망을 체험한 자들의 깊은 무기력’은 몸속에 깊게 스며버렸다. 하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가 닥쳐올 하나의 끼니 앞에서 무효가 되는’ 내 삶의 배고픈 허덕임은 매일 저녁, 팔을 벌린 노을 속으로 홀홀히 날아간다. 그러기에 아침마다 세상에 터벅거리며 나서는 거겠지.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대해야 하는 것이겠지. 기계가 심장을 구워대는 소리를 떨구고서 칼의 노래를 듣고 싶다. 누구를 굳이 베지 않아도, 버선발 고운 승무의 춤사위에서 나는 그런 칼의 노래를 말이다. 


2005.3.23. 水





시간에 어울리는 책이 있다. 지금 다시 김 훈의 칼의 노래를 읽는다면 매일같이 나를 찔러댔던 그런 소리는 아닐 거 같다. 아마 책을 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아팠다. 글을 읽고 나면 감정이 파도쳤다. 보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온몸을 엄습했다. 눈은 오랫동안 뜨고 있어 말라있었고 귀에서는 진물이 흘렀다. 콧구멍 안에선 숨 쉴 통로에 피딱지가 두껍게 말라있었다. 입안은 벌릴 수 없게 허물었고 입술은 굳게 닫혀있었다. 연관 없던 대상에서 아픔의 이유를 찾아댔다. 이전의 감정을 손을 대보려다가 그냥 내버려 둔다. '그랬구나.' 새벽에 깨서 잠이 오지 않기에 끄적여본다.




 

[GRIEF, A FLOWER THAT KNOWS ME] 2005. 5. 7. NOTEPAD. MEMENTO SKETCH by CHRIS


 고개 꺾인 이 옆에


 고개 든 꽃


 너만이 나의 슬픔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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