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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01. 2024

SPACE AND HUMANITY

절대적 공간의 무의식, 우주와 그 상대적 연관성

[OPEN AIR CITY, 1911: HEPATITIS Z PANDEMIC]  出處記憶不明. 2004. 9. 11. PHOTO by CHRIS


캡슐에서 잠을 자는 시대다. 몸만 겨우 누일 곳에는 온도감지센서와 음향장치 및 기분전환 프로그램을 통해 체온조절, 산소공급, 피로해소, 건강증진 등 숙면을 취할 수 있는 모든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딸칵. 돈만 주고 몸만 집어넣으면 된다. 길쭉한 관을 닮은 안락한 공간에서 우리는 과연 꿈을 꿀 수 있을까? 인간 무의식의 저층 수면 아래 침잠된 꿈은 현재의 생활을 기록한 감각의 메가폰이자, 억눌린 욕구와 열망을 무형으로 읊어대며 현실의 나와 속 안의 인형을 연결하는 사다리이다. 숙면을 방해하는 요소로 꿈을 제거한다고 하니 앞으로 최첨단 수면방에서 몇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캡슐에 몸을 집어넣는 동전이 되겠다.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가상현실 세계도 이젠 손톱 반 평도 안 되는 자그마한 메모리 칩에서 벌어지는 수백만 자기 회로의 연속성과 복합연산의 유동적인 결합을 통해 눈앞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가끔 묻게 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통해 세계를 느끼고자 하는가? 공상으로 펼쳐낸 기계선(機械船)은 과연 사람들이 찾고자 했던 꿈과 이상을 현실화시키는 도구가 될 것인가?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런 질문을 더 많이 던지게 된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에서 보듯이, 호블 망원경 속 지구는 폭발과 동시에 생명을 잉태한다. 곧이어 전쟁과 결합, 파괴와 탄생을 통해 품 안의 사람들에게 자궁과도 같던 공간을 벗어날 기회를 준다. 하지만 광활한 우주에 떠있는 건 역시 캡슐이다. 우주선이라는 깍대기 통 안에 갇힌 사람들은 별과 혹성, 위성과 운하 사이를 방랑하며 신의 비밀에 접근하고자 하지만, 기계가 뿜어주는 산소에 의지하고 첨단 과학이 선사한 정제된 알약으로 허기를 제거하며 중앙 컴퓨터 시스템을 번갈아 관리하기 위해 수명을 지속시킬 긴 수면에 돌입한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숫자적 놀음으로 변용된 컴퓨터에 의지하는 상태가 된다. 영생을 위해 벗어날 수 없는 기계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결국엔 탑승자 모두 죽음을 맞이한 채 우주에 유영하고 만다.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 한계가 잉태한 욕심 때문에 우주를 정복하지 못한다고 치부하기엔 오싹하고 실재화된 공포감을 전한다.

건조하게 우주와 인류의 미래를 풀어낸 스탠리 큐브릭과 달리, 스티븐 소더버그(Steven Soderbergh)의 <솔라리스 Solaris>는 좀 더 감정적으로 절대적 공간에 접근할 하나의 코드를 제공한다. 역시 우주선이라는 캡슐 속에서 일은 벌어진다. 솔라리스라는 미지의 행성에 도착한 정신과 의사 캘빈은 사랑했던 여인을 잃어버린 아픔이 있는 남자다. 그는 행성의 고독한 기운이 뿜어내는 무형의 괴물 비지터(Visitor)의 방문을 받는다. 우리가 상상하듯 에어리언이나 프레데터를 합쳐 논 괴물은 아니다. 그의 닫힌 무의식이 불러내는 하나의 존재로, 바로 너무나 고통스러워 기억에서도 지워버렸던 여인 레아였다. 우주선이란 갇힌 공간에서 지구로 돌아갈 수 없게 마음을 묶어버리게 만드는 비지터들은 잊고자 했던 아름다운 기억이거나 잡고 싶었던 소중한 열망으로 만들어진 형상이기에 쉽게 떨칠 수 없을뿐더러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곧, 자기 파괴의 본능까지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흘러 지구라는 집으로 돌아온 캘빈, 그의 옆에는 죽었던 레아가 있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그럼 캘빈도 무의식적인 죽음의 비지터가 됐는가.

잊고자 했던 슬픔과 뜨거운 사랑의 흔적은 꿈으로도 형상화되거나 현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질되어 나타난다. 그림이나 음악이나 영화나 정치나 집안일이나 바깥일이나 모두 꿈처럼 뭉그러진다. 사람들은 지구라는 작은 공간을 벗어나 우주가 던져주는 신비에 목말라한다. 절대는 무엇일까? 우주엔 신이 있을까? 그곳에는 내가 닿지 못한 꿈을 펼칠 수 있을까? 새로운 신비의 그곳에서는 지구 땅에서 누리지 못했던 새로운 결실을 얻고 허한 마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간혹 순수한 지식의 발로에서 XYZ의 삼면을 벗어난 대체 공간으로서의 우주를 연구하는 사람도 있고, 세계권력을 쟁취할 욕망에 살인무기의 폐기물 실험장으로 공간을 사용하려는 인간들도 있지만 글쎄다. 그곳에 어떤 신비가 있을까? 과연 이 작은 땅에서 발견하지 못한 것이 그곳에는 몇 만 배 희석된 빛으로 나타날까?

제임스 카메론(James Francis Cameron)의 인상적인 영화 <어비스(The Abyss)>를 통해 잠시 바닷속으로 눈을 돌려봐도 그렇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야 하는 심연의 해저 역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장소이다. 몇 천년 고대 유적이 꿈틀대고 희귀한 보석들 검초록 해캄에 묻힌 비밀의 동굴이 숨 쉬고 있다. 하지만 흑요석 해저 안에서 보게 되는 괴물은 바다를 헤엄치는 상어나 해저 동물이 아니다. 석유시추선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갈등과 파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의식이 악귀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서로에게 심연이 된다.

어느 공간에 갖다 놓든 사람은 느끼고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말하는 범위를 벗어날 순 없다. 그리고 육체라는 썩어버릴 갑옷도 입고 있다. 생명, 탄생, 죽음, 변화, 늙음, 변용, 변질이란 유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절대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지식으로, 예술로, 사회적 권력으로, 철학으로, 운동으로, 그리고 감정으로 다양하게 벗어나고자 했다. 가끔은 그것을 잡을 여력이 안 될 땐 하잘 것 없는 물심에 목숨 걸며 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아예 생각도 없고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우주. 절대. 무의식. 스페이스와 인간. 상대적 변화. 불가역성. 복합적 개념을 들고서 이 번잡하고 작은 땅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으로 가면 평화로운 삶을 얻을 수 있을까? 초월(Transcendence)이나 절대(Absolute)나 영원(Eternal)이나 최고(Supreme)나 절정(Pinnacle)이나 이런 단어가 표현되는 것이 있을까? 꼭 캡슐에 몸을 실어 우주 밖으로 나가야 그런 걸 구경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잠을 청해 꿈에서 한바탕 천국을 나뒹굴어야 할까? 마음은 그대로인데 공간만 벗어난다고 달라질까?

요즘 부쩍 몸 안에 우주가 있다는 뚱딴지같은 생각이 든다. 육신이라는 껍질을 벗어나 나를 느낄 때 우주와 바깥세상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사실 고민만 했지 별로 느끼지 못하는 감상이었다. 한데 이젠 다 비워져서 아무것도 없이 밤하늘만 아주 자주 쳐다보게 되는 이 시점에 그 의미가 조금은 다가온다. 생각이라는 것. 나를 느낀다는 것. 타인을 본다는 것. 자연을 듣는다는 것. 삶을 마신다는 것. 공간을 만져댄다는 것. 여기에 참 많은 것이 깃들여있다.

어느 캡슐을 씌워 변호사가 되든 의사가 되든 슈퍼마켓 점원이 되든 리어카 장수가 되든 간에 그건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냥 속 안에서 말하는 느낌을 따라가려고 한다. 비록 현재는 몸이 묶여 있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면 검은 하늘 위 수많은 별들의 축제가 몸 안에서 벌어지는 걸 목격하게 되지 않을까 잠시 기대해 본다.


2004. 9. 11. SAT.





깜깜한 밤하늘을 보며 우주에 대한 생각과 공간에 대한 상념을 그리던 순간에서 이십 년이 지났다. 나는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시절보단 자유로워졌다. 덕분에 밤하늘은 덜 보고 다 정리되지 못한 엑셀도표나 회계장부와 씨름하거나 시도 때도 없이 먼 곳의 사람들과 왓츠앱(WhatsApp)이나 위쳇(Wechat)으로 통화하고 있다.


2024년의 오늘날, 일론 머스크(Elon Reeve Musk)가 우주탑승티켓을 팔고 있다. 화성행표(Ticket to Mars)는 한번 다녀오는데 현 시가로 한국 돈, 삼억이라고 한다.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같은 홍보대사를 포함하여 600명 정도 샀다고 한다. 2019년도에 5억 6천 정도였는데, 현재는 2억 6천에서 3억이고, 이년 뒤 화성여행인원 수요가 더 늘어나면 1억 정도로 떨어진다고 한다. 홍보비 다 떼고 정말 말대로 얼리버드 티켓(EARLY BIRD TICKET)을 팔았으면, 지인들에게 거저 나눠주는 티켓이나 여러 가지 잡비를 떼고 500명만 잡아도, 500*300,000,000 = 150,000,000,000원이라는 소리다. 즉, 아무것도 시작된 것은 없으나 말 한마디로 천억은 훌쩍 넘긴 천오백억을 번 일론 머스크, 한마디로 미국판 '봉이 김선달'이다. 그런데 화성티켓, 일억까지 떨어진다고 해도 우주여행하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가성비도 떨어지고 비싸다. 십만 원 수준으로 떨어질 때 고민해 봐야겠다.




2013년도에 실시한 인류최초 화성정착 프로젝트 '마스원(MARS WON)'은 2022년부터 2024년까지 2년간 우주인 24명을 양성하여 보낸다고 발표했다. 돌아오지 못하는 레떼의 강처럼, 단발성 편도 티켓(ONE WAY TICKET)이었던 이 프로젝트에는 20만 명 가깝게 지원했었다. 그러나 2015년 리들리 스콧(SIR RIDLEY SCOTT) 감독의 <마션(THE MARTIAN)>이 나온 후에도 감감무소식이다가 2019년 말 '마스원(MARS WON)'재단은 파산선고를 했다. 더불어 SNS와 재단을 통해 지속적 연구를 위한 자금은 계속 지원받는다고 덧붙였다.


영화 <마션(THE MARTIAN)>에서, 아레스(ARES) 3팀의 식물학자 겸 기계공학자 마크 와트니가 복부를 거칠게 위협한 붉은 화성과 맞닥뜨릴 때 육두문자가 날아가는 첫 입놀림처럼, "완전 좆됐네(I'm pretty much fucked)"를 , 혹은 그의 외톨이 화성생존기처럼 "좆까, 마르스 (Fuck you, Mars.)"를 험하게 퍼주고 싶다. 진짜 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영화 대사니까. 그래도 상상력이 있고 돈이 있는 억만장자들이 우주탐사 프로젝트를 보고할 때마다 열렬한 관객이자 지지자였던 나는, 상상만 굴리는 것보다 무엇이든지 시도를 하는 의지는 중요하다고 본다. 실패는 나쁘지 않으나 사기만 안치면 된다. 내친김에 구글지도 보면서  화성이나 갔다 올까? 




수요가 많으면 공급가격을 저렴하게 낮추는 도매의 법칙을 적용하여 목돈을 마련하는 적극적인 마케팅맨, 일론 머스크의 화성사랑(LOVE MARS)은 나의 화성사랑과는 좀 다르다. 화성사랑을 언급하기 이전에, 일단 그와 나의 차이는 어둠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다르다. 일론 머스크는 가시파장의 결과인 어둠이 수백 개 나노미터의 광자부족임을 깨닫고 어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했다. 반면, 나는 본래 어둠을 사랑했다. 나는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면 어둠만의 빛이 포근했다. 무서울 건 없었다. 빛은 지구가 잠시 돌고 있어 어둠 뒤에 가려있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나는 인간의 어긋난 탐욕과 욕망이 무섭다.


비디오게임의 열정에서 컴퓨터공학, 자동차제작, 우주탐사까지 일직선으로 달려간 그와 달리, 난 비디오영화의 열정에서 영화, 웹기획, 패션, 디자인, 사진, 제작, 무역, 경영, 마케팅, 판매를 하며 혹은, 이 모든 것을 섞어가며 선로를 인식할 수 없게 꼬아서 걷고 있다. 게다가 나는 비디오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임을 하다 보면 눈이 아프고 실행 버튼을 열심히 누르다 보면 반복된 행위에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자괴감에 빠진다. 컴퓨터를 처음 만졌을 때, 모니터를 켜지 않고 컴퓨터 전원을 켜도 컴퓨터가 안된다고 A/S를 불렀던 나는 성질상 공학으로의 접근이 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일론 머스크의 '인간=사이보그론'을 살펴보면 그는 사고의 지능은 높은데, 철학이 상실되어 보인다. 나는 이 세상이 인간성 상실로 인류가 전멸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판도라의 상자에 남겨진 희망처럼, 최소한 한 명은 인간회복이 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일론 머스크화성탐사에 몰두하게 하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관점, 즉 다행성종(Multiplanetary Species)되거나 지구에서의 멸종은 내가 바라보는 인류의 미래와 배치(背馳)된다. 완전한 우주적 관점에서의 멸망은 안이 파괴되든 밖이 파괴되든 아니면 이 모두가 파괴되든 전멸이다. 모든 것이 불타야 그 검은 잿더미에서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음이 생성된다. 그의 태초에 대한 어둠의 인식이 아무래도 강박적으로 화성으로 사람들을 몰고 가는 게 아닌가 싶다. 


다시 화성사랑으로 돌아와 보면 일론 머스크는 지구와 흡사한 물과 바람과 공기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화성의 역사를 보면서 지구대체제를 찾아낸 듯 보인다. 조금만 동력을 지원하면 화성도 새롭게 발동이 걸릴 수 있다. 그의 상상은 허구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화성으로 지구에 사는 사람을 데리고 가면 지구와 공간만 달라질 뿐 사는 삶이 달라질까?


나는 전쟁의 신 아레스(ARES)를 고대의 신화로 접했고, 나의 꿈에선 내가 아레스였다. 내가 사랑했던 신화의 신들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긴 했는데, 특히 나의 본질과 닮았던 아레스의 전투적이면서 황량한 모습은 무의식의 형상과 일치했다. 아레스(ARES)의 로마식 표기는 마르스(MARS)이다. 피와 죽음이 꿈에서 떠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백과사전에서 화성의 별을 찾아보았는데 붉게 물든 죽음이 가득한 꿈속의 황야의 그림과도 비슷했다.


공간으로 풀리면서 현실과 무의식을 혼재하던 꿈은 점차 뜸하게 찾아왔고, 요즘은 거의 발현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전보다 잠다운 잠도 자는 편이다. 나는 화성이란 공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시공을 억겁 이상 회전하는 별들의 원형은 파괴되고 생성되고 성장하고 무너져야 다시 생성된다. 죽음이란 단어는 어렵지만, 실제적인 죽음은 자연스럽다. 검은 죽음이 다가오면 육체는 소멸될 것이다. 그때서야 본질의 여정은 시작될 것이며 나는 의식의 고향이자 안드로메다 S-1097625번 행성의 반대편 거울인, 화성(MARS)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일론 머스크는 본능에 의해 씨는 잘 뿌리지만 미학적 관점은 별로이며, 정신세계가 철저히 계산된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가 인수한 트위터 앱은 처음 써보고 재미없어서 지워버렸다. 등록이 복잡했던 페이팔은 그가 이미 이베이에 판 뒤여서 불평을 하기 어려웠다. 단기간 기억메모리 같은 텍스트 기반의 X는 단편적이고 쾌활한 영어권 사람들의 성향에 맞아 보인다.


나와 일론 머스크는 MBTI(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가 같다. 나처럼 엉뚱한 생각은 잘하나 보다. 일론 머스크의 혁신에 열광하는 남자들은 많지만, 난 그의 발언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감정이 비어있다. 다만, 작년에 그의 인터뷰와 강연을 유튜브로 들어봤는데, 한 가지 같은 것은 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인생에서 목숨 걸고 매달리거나, 쉽게 포기할 것은 없다. 실패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실패 안 해본 사람은 없다.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완벽하지 않다. 실패를 반복해도 다시 하면 된다. 나도 완벽에 대한 강박은 있다. 그러나 나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예술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와 같은 심리적 지표인 <INTJ>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일론 머스크와의 MBTI 매칭 실망에 대한 위안을 삼아 본다. 


사실 포춘쿠키와 같은 심심풀이 잡다한 심리유형이론과 인생의 진행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상상을 실행하는 추진력이다. 확 저지르지 못하는 머뭇거림은 뭔가 싶다. 게으르고 지친 의식이 쉬고 싶다고 느릿거린다. 방만하고 늘어진 정신으로 인해 아무래도 대기만성(大器晩成)으로 속도를 바꿔야겠다. 아직은 젊으니까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상상하던 걸작 하나 인류에 투척하기로 목표를 전환한다. 생각만 바꾸니 세상 여유롭다. 



The form of expression is still undeterm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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