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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Apr 02. 2024

HEADACHE

재발(再發)과 안정(安定)

[Authorized Personnel Only] SEOUL. 2024. 4. 2. PHOTOGRAPH by CHRIS


기억회로 중에 뭔가를 건드린 게 틀림없다. 삼십 분 간격으로 세 알. 하얀색 타이레놀 두 알과 파란색 이부프로펜 한 알. 약을 먹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일어날 때부터 머리가 흔들렸다. 전두엽의 한 부분을 차가운 포크가 길게 그어대고 있었다. 뒷목도 두터운 쇠를 올려놓은 듯이 무거웠다. 뒤로 접히지도 않는 목을 스트레칭해 봤다. 승모근도 굳어있다. 아무래도 오늘은 걸어서 출근을 해야겠다. 신선한 공기가 부족하다.



나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의식을 발산하는 템포도 스스로 제어한다. 어렸을 때 어느 정도 타인들과 비슷하게 걷다가 자각이 생기고 나서부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했다. 속마음과 달라서 그 배반적인 동조도 엎어버렸다. 현재는 포커페이스(POKER FACE)가 편하다. 사람들이 나의 감정을 읽을 수 없다고 한다. 나의 감정과 생각을 알려주는 것이 상대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솔직함이 다른 길을 걷는 타인에게 발휘될 이유는 없다. 일을 처리할 때는 감정적인 사고나 비이성적인 판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끔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어도 현재 시점의 선상에서 써먹을 때가 없다. 과거를 들먹이거나 붕 뜬 미래를 제시한다고 해서 현재가 바뀌는 것이 아니다.  


뭔가 꽉 막힌 느낌이 들 때, 극 속에서 배우들을 보면서 그들의 표현을 관심 있게 바라본다. 내부의 감정은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진실과 부합하게 보일까? 시각을 전환하여 일상의 사람들을 바라본다. 곧 회로의 세포들은 동체들의 표현과 현재의 상태, 그리고 내면의 모습이 같은지 비교한다. 미안하게도 동일한 선상까지 오른 이는 정말 드물다. 과장되게 표현하거나 사실과 일치감의 수위가 낮다. 가끔 기분이 저조할 때 짓궂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면 놀라워하고 혹은 도망간다.


스스로는 섬세하고 민감한 편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차갑다'였다. 워낙 튼튼하게 태어나서 약을 먹어본 적 없지만, 정신적 부산함과 호기심 덕택에 심하게 다친 적이 많았다. 그래서 마이신과 진정제, 페니실린, 항생제, 통증감소약을 거의 달고 살았다. 절반이상은 버리다가 나중에 별로 아프지도 않아서 약은 먹지 않았다. 육체가 하루도 안 다친 적이 없었다. 일찍 죽을까 봐 고민했던 부모님이 점쟁이한테 들은 말은 "스무 살 지나면 죽을 고비가 없다"는 거였다. 자식을 신께 바치면 가정이 무탈하다는 말을 안 듣은 것이 나를 위함이었다면, 언젠가 이름 모를 신에게 사로잡혀 노예가 될지 몰랐던 시절, 정신의 불구속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다. 정말 대학 간 이후 몸은 가끔씩 다쳤지만, 죽지 않았다.




열 살 때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좌석버스에 치여서 십 미터를 날아간 적이 있었다. 부딪힘과 동시에 하늘로 부상했다가 땅에 착륙하기까지 갑자기 현실과 분리된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눈을 뜨고 느릿해진 시간을 세어봤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이십구. 삼십.


귀는 한줄기 무겁고 눌린 소리로 먹먹했는데, 정좌측 타격감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푸르기만 하늘을 한가롭게 누워서 바라보고 있었다. 털썩. 그리고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 '정신 차려야지.'


사람들이 다가오기 전에 멀쩡하게 보이고 싶었다. 또 다쳐서 가면 면목이 없었다. 급하게 일어나니 머리가 토할 듯이 어지러웠다. 구역질이 뇌에서부터 쏟아져 나왔다. 휘청거리면서 무릎에 손을 짚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괜찮니?"

- 네.

"병원 가자. 안아 줄까?"

- 아뇨, 제가 탈게요.


나는 비틀대며 좌석버스로 걸어가서 버스 앞자리에 타고 병원으로 갔다. 초록색으로 선팅 된 병원 유리문을 여니 정문과 내부문 사이 왼쪽 한편에 주황색 공중전화 부스가 있었다. 아저씨한테 동전을 얻어서 집으로 전화했다.


"어디야?"

- 병원이요.

"왜?"

- 버스에 부딪혔어요.


대화를 듣고 있던 버스기사 아저씨가 급하게 수화기를 빼앗아서 통화를 시도했다. 병원의 위치와 나의 상태에 대해 설명했다. 갑자기 맥이 풀렸다. 아저씨가 말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긴 나무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이 바빠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모든 것이 천천히 흘렀다. 일어나서 뒤편의 거울을 보았다. 머리는 산발이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도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군데군데 아스팔트 돌멩이에 찍혀 피가 맺혀 있었다. 하나로 묶어뒀던 왕방울 고무줄은 이미 산산조각 나서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 '폐허네.'


부모님이 오시고 나서 엑스레이실로 갔다. 전신촬영, 특히 머리를 집중적으로 찍었다. 플라스틱 왕방울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두피에 박혀있었다. 소독하면서 핀셋으로 조각들을 빼냈다.


"충격이 컸나 봐. 이렇게 큰 플라스틱 구체는 잘 깨지지 않거든. 머리 안 아파?"

- 잘 모르겠어요. 그냥 좀 토하고 싶어요.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모두의 만류로 바로 병실로 직행했다. 뇌진탕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처음 입원이란 걸 해봤다. 바닥생활에 익숙한 나였는데, 침대에도 처음 누워봤다. 삐걱대는 병원 침대가 이국적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 저 괜찮아요. 혼자 잘게요. 내일 오세요.


캠핑 온 기분이었다고 말하면 바로 퇴실할까 봐 간간히 아픈 척을 했다. 학교에는 병가를 처음 냈다. 학기 초라 위문행렬이 매일 구름과 같았다. 귀한 바나나도 한 다발 받았다. 나를 위한 꽃과 과일바구니도 처음 구경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입원한 다음날부터 버스에 부딪힌 몸의 좌측뿐만 아니라 정면, 바닥과 부딪힌 후면까지 거의 몸의 80%에 멍이 올라왔다. 얼굴부터 몸체, 팔다리와 피부들이 검게 변했다. 완전 좀비였다. 멍 빼는 약을 발라야 한다고 해서 하루에 한 튜브씩 부지런히 발랐다. 일어나려고 하면 의사 선생님이건 간호사선생님이건 위험하니 절대안정을 취하고 누워있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릴없이 누워있으니 머리가 무거웠다. 입원한 지 5일이 지날 무렵 피부는 잘 익은 바나나처럼 얼룩덜룩 노랗게 변했다.


"엑스레이 상으로는 괜찮아 보인다만, 머리 아프면 꼭 병원에 들러라."


병원 탈출은 일주일 뒤로 결정됐다. 아프지도 않은데 더 이상 병원생활은 재미없었다. 아프다고 말하긴 싫었다. 아프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STEEL PAIN] SEOUL. 2024. 4. 2. PHOTOGRAPH by CHRIS



"머리 아픈 건 괜찮니?"


일이 터질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머리를 걱정했다. 내 머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어쩔 땐 시니컬하게 어쩔 땐 무덤덤하게 어쩔 땐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 괜찮아.


아침에 일이 터진 게 아닌데도 두통이 재발했다. 봄이니 산책하듯이 회사를 가기로 했다. 천천히 길을 걸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괜히 마음을 보여놓고는 심통이 난 그림도 찾았다. 차가운 두통을 뺄 구멍도 찾았다. 아스피린 꽃도 눈으로 섭취했다. 산책의 효과는 놀랍다. 찔러대던 두통이 사라졌다. 정말 오후부터는 말짱하다.





[Aspirin Flower] SEOUL. 2024. 4. 2. PHOTOGRAPH by CHRIS



기억이란 것은 묘하다. 열 살이라고 생각했는데, 버스에 치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게 생각났다. 그때 생일이 안 지났으니 만으로 여덟 살이었다. 당시, 학급 임원에 당선된 터라 선생님부터 아이들이 자주 문병을 왔었다. 다른 반 아이들도 왔고, 동네 친구들도 왔다. 그때는 다치고 나서 아프다는 개념을 잘 알지 못했다. 아프다고 말하면 다쳐서 온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오 학년 때쯤부터 편두통이 오기 시작했다. 머리 말고 신체의 다른 부분들이 다쳤을 때 쓰라림이나 통각은 어느 정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두통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중학교 때 뭉근하게 아프기 시작하더니 고등학교 때부터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최악으로 변했다.


한꺼번에 상황이 몰리면 정상적인 분류작업을 정지시킬 만큼 구토가 올라온다. 눈앞으로 멀리 있던 사물이 공간감각을 상실하여 빠르게 다가온다. 한쪽 귀는 큰 굉음이 스쳐가고 한쪽 귀에선 날카로운 소리가 지나간다. 피가 빠져나가듯이 머리 위로 현기증이 올라오고 목 뒤와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볼은 뜨겁고 코는 차갑다. 둔탁하게 둔기로 머리를 크게 한 대 때린 듯이 전체적으로 멍해지고 머리 한쪽을 길고 날카로운 꼬챙이가 찌르기 시작한다. 가끔 뇌까지 차갑고 긴 쇠붙이스며들어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정상적으로 서 있기엔 균형감각이 사라져 있어서 일단 앉아야 한다. 눈을 감으면 검정 눈동자가 박하잎을 붙여 놓은 듯이 화한 느낌이 들면서 하얗게 변한다. 굵은 검은 장막은 속도감이 있는 하얀 선들로 갈라져 빠르게 움직이고 빛들도 움직인다. 머릿속은 온갖 색채가 떠돌았다가 순간 검게 바뀌기도 한다. 몽환적이기도 하고 그냥 바닥에 눕고 싶지만 눕기에는 위장이 쏠린다. 비틀대며 구토가 일어서 개수대 앞에서 입을 벌리면 그냥 끈끈함이 없는 물 같은 위액이 쏟아진다.    


십 년 전이었는지 홍콩행 비행기에서 두통이 왔을 때 급하게 약을 찾았는데 챙기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냥 그 순간을 빨리 지나가고 싶었는데, 그때 건너편 옆 자리의 남자가 파란색 이부프로펜 한 알을 주었다. 그리고 스튜어디스한테서 하얀색 타이레놀 두 알을 받았다. 그걸 먹고 두 시간 뒤에는 안정을 되찾았다.   


가끔 사람들이 아프다고 할 때 내가 느끼는 아픔의 강도와 같을까 비교하곤 한다. 일본에서 발생했던 이타이이타이 병(イタイイタイ病 )처럼, 병자들이 '아파아파'라는 말을 할 때, 그냥 아프다는 말인 것인가, 혹은 정말 아픈 것일까 생각하곤 한다. 아프니까 아프다고 할 것이다. 나는 아프다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그 강도가 어느 정도 돼야 아프다고 해야 할지를 아직도 모르겠다.

2024. 4. 6. S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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