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내면을 비추는 거울
사람마다 저마다의 개성이 있고 저마다의 분위기가 있다. 수면 아래에 누워있는 복잡한 자신을 풀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창작자의 몫이다. 꾸준하게 무엇인가를 그리고 쓰고 만드는 행위는 사회적인 체면과 가공된 이미지에 매몰되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외면했던 한스 안데르센의 동화 《황제의 새로운 옷 (벌거벗은 임금님) Kejserens nye Klæder》의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 The Talented Mr. Ripley》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리플리> 속 주인공 ‘리플리’처럼, 외면만 닮으면 본체와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열등한 복제품의 우성개체 살해는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에게 가졌던 살리에리(Antonio Salieri)의 질투처럼 어리석다. 개별적인 존재는 각기 내면의 다른 얼굴과 다른 목소리를 갖고 있다.
자신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인간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생의 본성에 따라 육체적인 생식을 하고 스스로 유사한 분신을 생산하는 지름길을 간다. 이는 생명을 가진 유기체라면 모두 하는 일이다. 다만, 인간이 생물과 다른 점은 온갖 감정의 용광로에서 이성의 한 줄기를 잡아가며 자신과 다른 얼굴의 자아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내면의 이야기를 현실에서 보여준다는 행위는 창작작품 생산이나 문화예술적인 영역의 활동으로 달리 설명되기도 한다. 버릴 수 없는 시간의 편린을 담은 사진을 보고 있으니 자유롭게 세상을 향해 떠나가고 싶던 순간들이 밀려온다. 더없이 심심해지는 마음 앞에서 만들어가야 할 내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창작자는 옷을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선보일 땐 옷이 스스로 입는 이를 선택하도록 생명력이 있기를 바란다. 옷을 입는 동시에 입는 이의 자유로운 개성과 매력이 힘 있게 분출되었으면 한다. 기업들이 수많은 형태의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브랜드가 자신의 사람이 될 사람들을 선택하도록 역전되는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 수명의 시간적인 한계와 자본 증식의 논리가 우선시되는 현재는 창작의 열기가 자본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상표권으로 지적 권리를 알리고 있는 브랜드는 작가의 창작품이 낳은 알맹이로 보기보단 경영자의 입장에서 산업적으로 부여된 기업의 또 다른 소유물로 봐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카자(CAZA)는 유년기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다. 성숙한 얼굴로 단단한 내면을 키워갈 내일을 기약하며, 바삭거리는 크래커처럼 너에게 말을 건네야겠다.
“내게 말해봐. 듣고 있으니까.”
2013. 6. 4. TUESDAY
어렸을 적 니나에 푹 빠진 이후로 전혜린, Luise Rinser, Adeline Virginia Stephen Woolf와 같은 자성적인 목소리를 내는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껴왔다. 고독한 객차 안에서 기적소리를 벗 삼으며 창 밖의 여자로 남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순간은 언제나 귓가에 남아있다.
Ever since I fell deeply for Nina in my youth, I've been drawn to women with introspective voices like Jeon Hye-rin, Luise Rinser, and Adeline Virginia Stephen Woolf. The moment I vowed to myself, cocooned in a lonely compartment, to never remain just a woman outside the window but to become the miraculous sound itself, always lingers in my e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