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들이 보여달라는 건 한마디로 마케팅 실력을 보여달라는 거였다.직역하면 "한방 크게 벌게 해 달라"는 말이다. 판매능력을 갖춘 작가들이 얼마나 있다고 요구도 벅차다. 아닌가? 그들은 나를 한 업체의 대표로 보고 있었다.
얌전히 책상을 지켜야 하는 디자이너가 가판대를 지키는 판매사원으로 분하면 마이너스 요인이 될 게 분명하다.너도 나도 디자이너에 사장님인 시대이지만 사실 디자이너의 작업은 잡무가 가득한 막노동에 가깝다. 발로 뛰는 시장조사와 트렌드 분석, 칼라맵 작성, 패턴 설계, 도식화 구성 같은 서류 작업은 기본이다. 원단배치와 부자재배열 및 제작단계의 자잘한 관리부터 오류수정까지 종합적인 매니저의 역량도 필수적이다. 급할 땐 원래의 것을 해체하여 모든 것을 바꿔낼 수 있는 트랜스포머형의 만능 장인이 되어야 한다. 거기에 자신이 만든 작품이라면 제작의도 및 코디까지 설명도 할 줄 아는 세일즈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즉, 아이디어 구상부터 제작, 판매, 애프터서비스까지 끝내야 제품의 흥망성쇠 순환사이클을 한 바퀴 돌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괜찮아. 살아있는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아저씨처럼 나무토막을 제 자식처럼 여기는 진정한 제작자만이 작품에 한줄기 생명력을 불어넣게 될 거야.' 한바탕 손님들과 전쟁을 치르고 나면 낯 뜨거워진 볼을 만지며 말도 안 되는 기나긴 푸념을 늘어놓았다. 깜깜한 하늘을 쳐다보니 이십 대 어느 자락, 동대문 새벽시장에서한 무더기의 옷을 팔던 시절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기는 왜 여기 나와서 이러고 있어?"
- 겸사겸사요
"안 어울려."
- 그렇긴 하죠.
"그런데 믿음이 가."
- 뭐가요?
"그냥 판매사원 같지 않아서."
판매사원과 판매사원이 아닌 기준은 무엇일까? 쪽 팔리는 경험은 대박이 터지면 한꺼번에 모든 피로를 상쇄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얼굴을 드러낸 판매는사람들에게 바라보는 이미지를 고착시키는 역효과를 주기도 한다. '시크하고 세련된 디자이너'라는 평가는 이십 년 전 '신비로웠다'라고 말한 그의 고백을 듣고 이별을 고했던 이유와 같은 말로 들렸다.
속이 들끓어서 잠 못 이루는 날에는 육체적인 노동을 하고 나면 잠이 왔다. 생각 노동자보단 육체 노동자가 체질인가 싶었다. '아, 내가 직접 팔아야 해?' 직접 판매를 결심했을 때 문득김기덕 감독을 떠올렸다. 확실히 막일에 익숙한 그의 거친 언어를 보고 있다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김 감독은 잘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았다. 사랑했던 남편에게 떠밀려 돈과 함께 익사했던《백치 아다다》의 아다다처럼, '아'와 '다'를 반복하는 그의 절규는 기이하게 후두를 자극했고 목 아프도록 불러도 되돌아오지 않을, 소리가 제거된 메아리로 들렸다. <섬>과 <수취인불명>에서의 신경질적인 자극이<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잠시 편안해졌던 삶에 응시가 다시 <빈 집>에서 비틀린 뫼비우스처럼 신경질적인 그물로 얽혀왔다. 그의 의문과 집착에 숨이 답답해졌다. 난 일어나고 싶었기에 그의 비디오는 꺼버렸다.
아다다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면 살아남았을까? 거칠지만 생기 있는 눈을 가졌던 김 감독이 마스크로 똘똘 입 막힌 2020년 겨울, 이름도 생소한 라트비아에서 코로나로 생을 마감했다는 뉴스를 듣고 잠시 침묵했다. 200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스쳐지나갔던 꽁지머리의 그는 젊었고, 주목받던 다른 감독들과 달리 혼자였으나 백치 아다다의 본명, '김확실' 그 이름이 생각날 만큼 날카로운 쇳소리의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김기덕 감독과 한마디도 나눠보지 못했지만 짧게 서로 응시했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나는 걸 보면 절박하게 하나만 바라봤던 사람에게 절벽에서의 선택은 양자택일밖에 없나 보다. 스스로 바다로 뛰어들거나 아님 그 하나에 떠밀려 살해당하거나. 언어가 다른 세상으로 나가 말없이 자신의 작품을 비디오로 만들어 팔 정도로 용기가 충만했던 그 남자가, 윤리와 도덕을 뒤로하면서까지 외로움과 분노를 담아낸 억눌린 표현이 생의 전부였던 그가 바다를 건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간 사실이 씁쓸했다.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냥 합니다."
요즘은 체력이 바닥나서 피로함을 자주 느낀다. 명상을 하면 개운하기보단 다리에 쥐가 나서 풀고 싶은 욕구가 한가득이다. 요가를 '다시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드는 걸 보니 하기 싫은가 보다. 이래저래 흔들리는 나를 바라본다.
"넌 그래도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잖아."
- 부럽냐? 나처럼 살라면 그렇게 살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난 아직도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 철이 없긴. 지금이 좋은 줄 알아.
친구야,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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