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웃음과 배설
"인간은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비극은 희극적 형식을 취하고, 애련과 공포를 통해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시학 詩學, 아리스토텔레스 The Poetics, Aristotle》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일본에 살던 이모할아버지의 대장(大腸)은 활동이 정지되어 있었다. 대장암 수술로 대장을 삼분의 이 이상 제거해서 배출구가 없었기에 죽을 때까지 배꼽에 호수를 꼽고 살았다. 사람은 살기 위해선 음식을 먹어야 한다. 이모할머니 할아버지는 잘 살았기에 먹을 것도 풍족했다. 쓸 돈도 많았지만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 몸 밖으로 퍼져 나오는 오물의 흔적은 더 지독했다. 좋은 음식을 먹어 봤자 밑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역류해 버려서 좋은 것도 좋은 것이 되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어머니를 통해 들었던 이야기다. 어머니의 친척들과는 전화 통화만 해봤지 만나보질 못해서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모르겠다. 성격은 담대했다고 하나 아픈 후로는 편협해졌다고 했다.
배설의 욕구는 나를 지탱해 온 힘이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온몸에 들어오는 것은 많은데 터트릴 곳이 없으면 머리꼭대기까지 헬륨가스로 가득 차버린다. 부풀어가는 몸을 띄우기엔 온몸에 밧줄이 매여있고 공중에 떠있기만 한 상태는 몹시 불안하다. 그럴 땐 울던지 웃던지 말하던지 달리던지 만지던지 쓰던지 그리던지 한 번씩 배설해야 한다.
즐거울 땐 비극적인 것을 좋아했다. 속 안에 가질 수 없었던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괴로움이 한데 있는 곳에서 날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비극적인 것을 볼수록 히스테릭하게 웃어버리는 나 자신에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슬플 땐 즐거운 것을 좋아했다. 가슴을 막아버리는 돌덩이들을 하나 둘 던져버리지 않으면 석상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웃고 싶었는데 오히려 재미있는 것을 보니 막상 더 서글펐다. 현실이 손 닿을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듯해서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지금은 다 좋다. 웃음과 슬픔을 유발하는 수단인 대사와 혀, 그것으로 만들어진 세상도 좋다. 그런데 비극(Tragedy)보단 희극(Comedy)이 좀 더 끌리긴 한다. 사람을 모독하고, 갖가지 인간을 모방하고, 속임수로 관중을 놀라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왜곡하고, 자연의 법칙을 깨고, 엉뚱한 것과 모순적인 것을 대비시키고, 등장인물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천박한 몸짓을 사용하고, 부조화를 야기시키고, 우스꽝스러움에서 고상함을 내리까는 희극은 유명하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천하고 어리석으나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보통 사람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보여줌으로써 나를 위로해 주기에 이 왜곡된 평범함이 괜한 것이 아님을 한줄기 웃음으로 보여준다. 실재보다 못하지만 실재라고 믿던 것보다, 성인(聖人)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준 거대한 서사시보다, 열등한 인간의 세계에 놓인 하찮음이 더 진실에 가까움을 보게 된다.
난 나름대로 삶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게 좋다.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고 손으로 만지고 가슴으로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이 투명한 습기 속에서 영롱하게 비칠 때 그 신비로움은 말할 수 없다. 그게 내 주위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울면서도 웃게 된다.
가슴속이 시원하도록.
사랑하는 마음도 생기게.
방울진 멍에도 털어버리게.
2004. 9. 10. FRIDAY
두더지 게임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이 무던한 길을 지나갈 때 괴이한 소리를 내며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느 날의 내 안의 이야기도 올라온다. 나는 울어본 적이 별로 없다. 어릴 때는 눈물이 하나도 없었다. 통감이 거의 없어서 상처로 피를 줄줄 흘려도 이것이 아프다는 감정인 것인지 피가 나서 아프다고 울어야 하는 것인지 소리를 어떻게 쳐야 하는 것인지 침을 얼굴에 발라서 아픈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이로운 것일지 골똘하게 생각하곤 했다. 맞아도 다쳐도 독하다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울지 않았다. 하도 때리다가 상대방의 팔이 아플 정도였다.
"독하네. 울지도 않냐?"
"다 때렸나요?"
"너 잘못했다고 안 빌 거야?"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왜 때려요?"
"뭐? 한번 더 맞아볼래?"
"더 때리세요. 죽으면 죽었지 그깟 걸로 울지는 않을 거니까."
그때는 오기였나 보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덜렁대는 습관과 순응할 수 없는 규칙에 대한 말대꾸는 맞을 정도의 이유를 갖고 있지 않았다. 상황을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지 않고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하나로 뭉뚱그려서 무조건 따라 하라며 억압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의문이 많았다. 멍이 쉽게 가시는 등짝이나 팔다리를 맞는 것은 그렇다 쳐도 머리를 맞으면 정신이 팍 돌긴 했는데, 부주의하게 얼굴과 머리를 맞기도 했다. 처음 얼굴과 머리를 심하게 맞았을 때 치욕적인 느낌이 스쳤고 잠시 눈이 돌았던 것 같다. 그러나 순전히 어려서였겠지만, 장유유서의 논리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겨 있어 때리는 사람이 나를 책임지는 어른이라면 그들의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은 나이를 떠나 옳지 못한 일이고, 강제와 폭력에 대한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보며 공감했던 터라 자기의 소신을 지키는 것이 폭력보다 더 강하고 바른 태도임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며 불만의 말을 제대로 토해내지 못했다. 실컷 맞고 그다음 날 친구들이 물었다.
"너 얼굴이 그게 뭐냐?"
"아침에 집에서 나오는데 해가 짱짱하고 빛도 눈부셔서 눈뜨고 걷는 게 재미없더라고. 그냥 눈감고 걸어볼까 했지. 걸을 만 해졌을 때 달려라 하니가 되고 싶더라. 아무 생각 없이 세게 달렸거든. 그런데 속도를 내는 순간 전봇대에 꽝하고 부딪혔어. 얼굴을 콘크리트 기둥에 정면으로 박고 정신이 핑 돌았지. 아스팔트를 향해 직진으로 꼬꾸라졌고 정신 차려보니 하늘을 보고 있더라. 높고 높은 하늘에 구름도 뭉게뭉게 아름답네 중얼거리는데 퍼뜩 시계를 보니 학교 올 시간이 늦은 거야. 부리나케 냅다 달렸지. 교문으로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는데 선도 주임이 얼굴 보고 흠칫하더니 잡지도 않데. 입만 벌리고 놀래하기에 웬일이야 싶어 유유하게 여겼더니 지금 보니까 얼굴 절반이 멍이네."
"진짜 얼굴 웃기다. 눈 좀 뜨고 다녀!"
우리의 삶에서 희비극은 언제나 교차한다. 어렸을 때부터 진실과 사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가려있는 진실을 말하기는 부끄러운 것이다.
초등학교 말 중학교 입학 때쯤 갑자기 알게 된 어머니 가계의 흔적은 썩 대단했다. 끊길 줄만 알았던 대갓집의 핏줄이 일본에서 파친코 체인점을 운영할 정도로 성공해 있었다. 이모할머니가 한국에 있는 외할머니의 핏줄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소문은 친척들 사이에서 퍼져갔다. 다들 일본에 가려고 혈안이었다. 당시 최고의 음식과 건강보양식, 옷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친척들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나는 지금까지 일본에 가본 적이 없다. 엔화가 싸니까 면세점 쇼핑을 가거나 미식체험을 하거나 홋카이도에 스키를 타러 간다거나 나리타나 동경으로 골프를 치러 가자고 해도 관심이 없다. 일본어도 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선택했고 대학에서도 일어를 고급까지 해서 항상 A+을 받았는데 써먹을 일이 없으니 이제는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의식적으로 언어를 잊어버린 무관심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문이 가득한 책을 좋아해서 가족 중에서 한자를 가장 잘 썼던 나는 이모할머니댁 주소와 친척들의 이름을 어머니 수첩에 적어드렸다. 그 이외에도 일본어는 어머니가 편지를 쓸 때 편지 겉봉투에도, 여권 뒷면에도 그려 넣었다. 우리는 한자 문화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간단한 히라가나(ひらがな)와 가타카나(カタカナ)만 알면 나머진 모두 한자여서 일본어를 모를 때도 대강 일본어 뜻을 유추할 수 있었다. 나에겐 편지 너머의 그들은 그냥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들의 연락은 나의 스무 살이 되던 때 끊겼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친척들이 모두 자식들까지 데리고 일본을 갔을 때, 우리 집은 어머니만 갔기 때문에 일본의 친척들은 사진으로만 보았다. 전화로만 통화를 했고, 그 당시에는 화상통화라는 것은 없었으니 목소리로 상대가 누구인지 유추하거나 편지 속 내용을 읽으며 심성을 파악했다. 일본에 놀러 가는 것은 나중에 기회가 되거나 마음이 내키면 가기로 했다. 이모할머니가 부산으로 오신 그때, 어머니는 부산의 코모도 호텔로 갔다. 아버지도 갔는지 모른다. 오빠도 갔는지 모른다. 나도 갔는지 모른다. 나에게 남은 것은 어머니 집안 사람들만 있던 사진이었고 그때의 사진도 묻어둔지 몇십 년이 되어서 간 기억이 전혀 없다. 얼굴 사진을 찍지 않던 때라 그때 모두를 보았는지 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보는 친척들의 행렬과 긴 대화들, 관계로 분주했던 사람들도 전해 들은 것인지 나의 기억인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때의 모든 사람들이 두부를 으깨어 구석에다 던져놓은 것처럼 형체도 없이 부서져서 남아있는 인상이 없다.
짠내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기러기 소리가 휘파람으로 흩어질 때 바람 부는 언덕에 서 있던 것은 꼬마의 나였는지 십 대의 나였는지 이십 대의 나였는지 혹은 기억이 만들어낸 어느 날의 나였는지 알 수 없다. 부산에 안 간 지도 수십 년이라 먼 친척들이 살고 있는 그곳은 여행을 가기도 그다지 내키지 않은 그림체로 틀어져 있다.
삶에 대해 생각이 커지던 무렵부터 가족들과의 여행은 재미있지 않았다. 책임과 의무에 사로잡힌 불편한 침묵이 예상되는 자리에서 끊을 수 없는 핏줄이란 무엇인지 생각이 맴돌았다. 질척한 관계로 얽힌 회합의 장소는 겉도는 이야기들의 모음이었다. 조용한 휴식보단 누구나 가는 곳에서 먹고 즐기는 것을 여가라고 여기는 윗세대의 습관은, 그들 나름대로 시대의 조류에 적응하고 대중적인 사회관습에 길들여진 사랑법이었겠지만, 성장하는 인간이 자신의 규칙을 정하는데 반대기제로 작용한다. 타인이 가진 경제력이나 지위, 권력과 같은 성취에 부러움과 열등감을 가지는 인간들의 소유욕과 질투, 욕심에 사로잡힌 어리석음만이 불행의 시작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돈이 몰고 온 관계의 변화가 있었고, 자기 돈도 아닌 그 돈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욕심이 타올랐고,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의 내부에 변질이 있었으며, 인생의 오판이 있었다는 것이다.
돈만이 아니라 욕심으로 어긋난 관계와 인간이 피해 갈 수 없는 생로병사는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발목을 잡았다. 돈을 벌겠다고 선언했을 땐 막막했다. 나하나 먹고사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뭐든지 하면 먹고살 수 있다는 자신감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러나 혼자가 아닌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생산부터 분배, 향유의 문제까지 고민하지 않으면 서로의 관계유지가 힘들어질 뿐만이 아니라, 혹여 그 모두와 단절을 선언하고 고군분투하여 성공의 길을 걷는다고 해도 정상의 위치에 올랐을 때 주변의 모두가 사라진 상태에서는 스스로 기를 쓰고 살아온 의미를 상실하게 되므로 내부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정신적으로 버티기가 어렵다.
한국만이 아니라 현대의 정치 사회 경제구조는 자본의 흐름으로 돌아간다. 구성원의 소비가 예상되는 부분을 책임지겠다고 생각하면 쓰는 것보다 벌어들이는 것이 동일하거나 더 많아야 부도가 나질 않는다. 이 모든 원리는 정상적인 삶의 상태에서도 비정상적인 삶의 상태에서도 공통으로 적용된다. 가끔 농담처럼 다 때려치우고 예술한다고 내뱉는 투정 뒤로 아직은 스스로 서거나 떠나지 않은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홀로 가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스스로 형성한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이상적인 예술로만 먹고살기 힘들다. 희극과 비극은 삶의 기복을 만들어내는 감정선이면서 문화 예술적인 주제를 만들어내는 생명선이다. 삶의 한가운데서 거친 풍랑이 불어올 때마다 어떻게 고비를 넘어가는 것이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줄지 앞으로의 실전에서 계속해서 부딪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