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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15. 2024

RECORDED IMPRESSIONS

부합된, 부활된 코드 : 시대 앞에서의 기록과 감상의 이데올로기

[Resurrected RE-Code,  One Day in the My Life] 2024. 4. 27. PROCREATE. IPAD-PRO. DRAWING by CHRIS



I. 시대 앞에서의 기록과 감상의 이데올로기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Isayevich Solzhenitsyn)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는 무서운 기록이었다. 한 조각의 빵으로 연명하는 허기짐과 방한되지 않는 몇 평에서의 활동제한, 줄칼로 탈출을 노리는 장구한 투쟁, 늘어나는 일당 작업량, 검은 양배춧국. 인간이 사색할 공간은 나날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 단순하게 작업하는 최소한의 범위로 제한되었다. 조국에 대한 배신은 어떠한 기준에서 가능한가? 또한, 국가 체제의 수호자를 위한 사회는 대체로 어떤 모습이어야만 하는가? 나에게 자유로운 이데올로기는 무엇을 뜻하는가?



방 청소를 하다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주절거린 메모를 발견했다. 책을 읽던 시절과 현재가 달라져서 그런지, 거국적으로 들린다. 나는 기록에 있어서 솔제니친만큼 체계적이지 못한 것 같다. 너질러 놓고는 도대체 정리란 게 없다. 러시아 예술에 대해 많은 작가들이 경의를 표하는 것은 독한 한기로 무력과 전복의 역사를 얼려버릴 정도로 냉철한 사고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년빙이 녹아서 긴 날개로 부활하길 꿈꾸며 장활한 싸움에서 불려지는 처절하고 서러운 노래들이 검은 펜 속에서 흐른다.


오래전에 읽어서 무슨 내용인지도 가물거린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감 생활의 보고서란 실제로 별 내용은 없다. 안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무력한 시간과, 구체적인 물증과 사건으로 사고의 틀을 마련해 놓고 짐승같이 변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작가의 목소리와 다르게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루는 실사의 차이점을 보고, 싱거워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은 무슨 작용일까? 갑갑하던 이야기는 시대 조류를 타고 변한다. 정치범보다는 사회경제사범이 더 많아진 오늘날의 실태에서 호전된 인간의 상태가 정화의 과정이라니 두고 볼 일이지만, 안팎의 마음들이 예전보다 좋아졌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2005. 4. 30. SATURDAY




II. Adopted, Resurrected Code : 부합된, 부활된 코드


어제 술을 마시면서 친구의 친구가 그랬다. 둘 사이든 셋이든 인간 사이의 관계가 발생할 때,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과 사건을 살펴보며 적는(Writing) 사람이 나중엔 승자가 되는 거라고 말이다. 눈을 깜빡이고 있었는데 승자라는 말은 거슬리는 단어지만 순간기록은 유용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뭔가를 해보려고 할 때 백지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타인의 기억을 뒤집거나 아이디어 노출을 기대하며 그들에게 의지하기엔 자존심이 상하고 스스로를 짜내서 물레질한다는 것도 비어버린 시간이 더 공허해지기도 하기에 오늘도 나를 기록해 본다. 넌 너 자신으로 살고 있는가? 무엇으로. 어디서. 왜.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2004. 10. 29. FRIDAY





세계의 발현: 감정적 기록에 대하여

행복하고 좋은 모습이 아닌, 허물이나 실수 같이 잊고 싶은 사실 기억하는 것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들과 그에 관련된 경험과 기억들도 중요하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하고 다듬게 한다. 파괴적인 감정은 타인에게 발산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분노는 스스로를 망가뜨린다. 그래서 잊지 않기 위해서 그 감정적인 기록을 적어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했다. 많은 부분이 모호했고,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말은 잘했는데 그것은 지식적인 관념이지 세상을 이해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대화를 통해 상대를 파악함에 있어서 세상에 분풀이하듯이 상대의 사고를 깨뜨릴 뿐, 타인을 이해할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의 행동을 관찰해 보니, 기호적인 부분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충분히 볼 수 있었던 시간에는 관찰하지 않았다. 지금은 알고 있던 기억의 절반 정도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록된 단서를 보면 그때부터 하나 둘 수면 위로 떠오르긴 하지만, 그것도 날짜가 사라진 이전의 글이나 사진일 때는 언제 그곳을 갔고, 왜 거기를 갔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그림도 없는 곳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 한참 더듬어야 한다. 무언가를 기억해야 하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나던 날, 심각했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하는지, 집안 유전인지 별 생각을 다 했다.


감정이 파괴적으로 극해 있었던 순간에 머리 뒤쪽에 야구 방망이로 세게 맞은 충격을 받았다. 목 뒤가 서늘하면서 커다랗고 세찬 타격감과 함께 굵고 기다란 쇠가 머리 뒤를 후벼 파고 있었다. 그 이물감에 현기증이 일었다.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난 듯이 급격하게 바람이 빠지고 있었다. 무엇인가 터져나가는 폭발과 함께 치밀어 오르는 분노 또한 암흑으로 넘어갔다. 혈관의 압력이 터지면서 두개골이 패이는 듯한 충격은 뼈가 갈라지고 함몰되는 아픔과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STROKE에 맞먹는 충격을 받고선 안구가 뽑힌 듯이 눈 주위가 얼얼했다. 머리뼈와 안구뼈 주변도 욱신거렸다. 눈꺼풀 위의 신경이 계속 뛰었다. 반나절, 한쪽 눈까지 안보였다. 나머지 한쪽은 시야가 뿌옇고 희미했다. 내가 알던 일반적인 두통이 아니었다. 그 순간은 정말 아프다고 느껴졌다. 몇 시간 동안 조이는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듯이 눈물이 맺혔고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못했다. 이틀 정도 얼얼한 잔상의 아픔이 머리 전체에 돌아다녔다. 삼 사일 뒤에는 머리 뒤의 충격이 파스를 붙여놓은 듯 아픈 건지 시원한 건지 구분이 안 갔다.


더 이상 화를 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저 세상으로 넘어갈 것 같았다. 병원에서 내 나이대의 사람이 중풍으로 재활치료를 받는 것을 보았다. 누구한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됐다. 상황을 감정적으로 대하면 여파는 자명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방법은 없었다. 살기 위해선 감정을 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멀리서 감정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가까이에서 터져버릴 물풍선과 바늘 하나를 동시에 쥐고 조바심을 냈다.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힘들다. 그것도 연습이 필요함을 아직도 배우고 있다. 감정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상태를 점검한다. 그것만으로도 자각이 생겨서 감정은 급격하게 올라오지 않는다.


살면서 세 번 정도 정신을 잃은 적이 있었다. 현기증이었는지 머리가 아파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때 아무도 없었다. 정신이 드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 물체가 없던 터라 부딪히진 않아서 다친 곳은 없었다. 이렇게 폼나지 않게 쓰러진 걸 아무도 안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발견되는 것은 의 손 짐을 떠맡기는 무능력과 같았다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죽음은 그리 쉽게 오지 않는구나 싶었다. 왜 쓰러졌는지도 몰랐다. 그냥 천장을 바라보고 한참을 누워있다가 천천히 바닥에 엎드렸다. 현기증이 가시니 일어날만했고, 평소대로 살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았다.



간혹 말을 해놓고, 혹은 글을 적은 뒤 이것은 나의 기억이 맞는지, 화자의 시점은 올바른지, 타인의 말에서 비롯된 것인지 나의 경험이었는지조차 혼란할 때가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는 나에게 기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만의 생각, 나만의 시선을 점검하고 시공에 따라 변하는 나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가끔 내가 민감하게 생각하는 이런 기억에 대한 감각은 보통 사람들 모두 다 겪고 있는데, 나만 이런 상실감을 느끼는 것인지 고민스러울 때도 있다.


나의 논조를 보면 스스로 편하지 않다. 시대적 고민과는 멀어진 탈 인간계의 목소리 같다. 지금도 편하고 맑고 즐거운 이야기들에 그다지 공감이 안 간다. 그리고 아프다고 하는 소리에도 무심하다. 무표정하게 일상적인 태도를 유지하면 그 누구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본인 이외에 타인에 대해 관심이 없다. 어둠에서 탈출을 꿈꾸는 이가 밝고 자유로운 공간에 있는 사람을 굳이 감옥 속으로 데리고 올 이유는 없다.


생존에 대한 압박은 예전보다는 사라져 있다. 가끔씩 자력을 상실한 채 허망함을 보는 사람들 사이로 참을 수 없는 기억의 찌푸림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런 삶은 그들의 몫이다. 거들 필요 없고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아무 기대 없이 타인을 어둠의 늪에서 끌어올릴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처리하도록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삶의 기록들을 정리해 두는 것은 좋다. 결국 자신을 이루는 것들은 타인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아픔과 고통은 부러워할 대상의 것이 아니다. 편안하게 사는 것도 좋다. 사람들에겐 자기만의 생이 있다. 스스로의 발현이 세계로 펼쳐지기까지는 살아남은 시간들의 축적이 필요하다.





본격적으로 의식의 정리를 시작했다. 급해질 필요는 없는데, 생각보다 기억나는 것이 적다. 수족이 잘린 뭉뚱그려진 감각으로 어디까지 기억해 낼지 모르겠다. 한번 헤집고선 손댈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몇 가닥으로 정리된 응축된 정수를 먹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 같진 않다. 머릿속 서랍을 펼치는 손이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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