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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15. 2024

FILM DOCU | FRANCOIS TRUFFAU

[FILM DOCUMENTARY] 프랑수아 트뤼포, 상처받은 야생의 소년

François Truffaut: The Man Who Loved Cinema - The Wild Child,  Portraits volés | Film Documentary


"절망이 서리면 극단적이 된다. 죽음을 떠올리고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그건 나의 종말이 아니다. 추억을 경험하는 내 본질로의 회귀이며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잠시 상상력을 불 붙이는 일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19세기는 소설과 시의 개화기였고 20세기는 철학과 혁명의 격전장이었다. 21세기는 모든(諸) 이미지와 영상이 충돌하는 대폭발과 핵융합의 시기가 될 것이다. 자유와 구속은 모순되지만,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란 탈출구를 찾아 사는 동안 영원히 방황한다. 하여, 비극은 홀로 즐거워하며 나에게서 끊어질 듯 말 듯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하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을 가지고 부지런히 작업해 본다. 쏟아지는 구토와 뇌리를 스치는 강렬함, 그 뒤의 안도감. 자유 속에서 사는 난 어떤 삶을 담아내고 어떤 진실을 간직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삶이 풍부한 감정과 기억력의 연마로 닦여진다면 서정의 르포는 너무 적나라해선 안 된다. 우리는 뻔뻔한 거짓이 되지 않을 정도의 비밀과 이중적인 유혹을 풍기면서 삶의 다양한 질문들에 대답을 해야 한다. 사랑과 인간의 관계, 감수성의 강박을 시간의 속도에 적용한 프랑수아 트뤼포(François Roland Truffaut),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많은 결함들 때문에 살아 숨 쉰다.” 


완벽한 표현을 위한 투쟁은 결국 미완성을 지향하는 것인가? 나에게 영화는 하나의 관찰주체이다. 각자의 개성이 깃들인 독특함과 끈끈한 열정, 타인에게 던질 수 있는 반향을 내포하는 영상언어는 사람 관계에 쉽게 안정을 찾을 수 없을 때, 일관성 있게 타자를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해 왔다. 


“삶은 덧없다. 우리 인생이 쇠락을 향해가는 반면, 내면은 확실한 것을 바란다. 보여줄 수 없는 것에서 삶의 동기가 생기지만 육체는 점차 힘을 잃기 때문에 욕구는 삶과 반대의 길을 걷는다. 사랑이 절실할수록 더 비통한 이유이다.” <프랑수아 트뤼포>


시간이 촉박하다는 조급한 감정 속에서 만남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자아의 호기심이 다시 일어선다. 나의 존재가 가치 있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신이 하는 일에서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아 헤매고 변화를 시도하면서 자기 삶을 담은 결과물을 얻어내야 한다는 것이 트뤼포의 생각이었다. 그의 영화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내 청춘을 길들이고 다독이던 그의 영상이 떠올랐다.  


2005. 9. 4. SUNDAY



트뤼포 감독의 영화는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 1959>와 <줄 앤 짐 Jules et Jim 1960>, <피아니스트를 쏴라 Tirez sur le pianiste 1961>, 이렇게 초창기 세 편의 영화와 그가 각본을 쓴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아델 H의 일기 L'Histoire d'Adèle H. 1975>, <이웃집 여인 La femme d'àcôté 1981>을 봤다. 트뤼포의 영화적 색상이 녹여진 한 편의 인생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인간의 재능이 발휘되려면 공포와 슬픔, 절망과 불안은 필수적인지 묻게 되었다. 트뤼포의 화려한 영화 인생은 즐겁게 보이는 이면에 우울함을 한껏 담고 있었다. 


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French New Wave)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잘 알려진 프랑수아 트뤼포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실존주의 사상에서 더 나아가 자유를 위한 투쟁, 인간성의 해방을 계승한 프랑스 작가주의 감독의 선봉장이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영화광을 가리키는 시네필(Cinéphile)의 대표주자로, 날카로운 영화 평론을 통해 영화감독들의 의식을 강렬하게 훈련하고 자유롭게 발전시킨 영화비평저널의 아버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이 만든 카이에 뒤 시네마 Cahiers du Cinéma》와 행보를 함께 한다. 


1932년 사생아로 태어난 트뤼포는 당시 전쟁이 만연한 전체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사회에서 극렬한 사회적 저항을 불러일으킨 영화에 빠져 있었고, 소년원을 밥 먹듯이 들락거릴 만큼 문제아로서 거리의 삶에 충실했다. 그러다가 소년원의 상담원이 트뤼포에게 앙드레 바쟁을 소개해줬고, 이들의 만남은 트뤼포 인생의 대전환을 가져온다. 트뤼포의 반항적인 기질과 번뜩이는 영상적 기지를 알아본 앙드레 바쟁의 후원 하에 이들은 영화 속의 아버지와 아들처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한다. 앙드레 바쟁은 누벨바그 시네마의 신호탄을 터트린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를 만들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트뤼포의 영화적 세계는 현실의 부모에서는 사랑을 얻지 못했지만, 그의 정신적 지주이자 사랑이었던 앙드레 바쟁을 통해서 안정감을 갖고 발전하게 된다.


사람들이 추종하는 영상이나 글이나 그림이나 작품들은 인간사의 지루한 일상에서 충격을 선사할 만큼 놀랍고 신선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고통스러운 인간의 방황과 지울 수 없는 삶의 흔적이 있다. 어떤 작가는 편안한 생활에서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엉덩이 아래에 가시덤불을 놓고 극기 훈련하듯이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수고스럽고 구차한 극기(克己)는 아름다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게 만들지 않는다.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마라톤을 뛰면서 정신을 훈련하는 것 또한, 스스로에 대한 기록적인 근육의 일지를 남길 수 있겠지만 인간을 투영하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말도 안 되는 인생의 이야기는 즐비하다. 내가 만드는 서사시가 한 편의 비극이 될지라도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삶을 담아내야 한다. 창 밖의 빗소리가 400번의 구타처럼 의식을 휘몰아친다. 머리를 명료하게 때리는 흔적 속에서도 분노하지 않고 나를 써 내려갈 때까지 타인과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현실을 직시해야겠다.

 



모순 속에 둘러싸인 인간세계에서 살아가는 내가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우리는 상호의지로 살아가고, 상대와의 마찰 속에서 감각뿐만 아니라 의식도 무던해진다. 하루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왼쪽 어깨가 아파온다. 새로운 시도에 대해 하찮게 치부되지 않도록 상대를 부단히 설득해야 하는 피 토하는 토로가 내 안의 에너지를 모두 흡수해 버린 것 같다. 거울을 보니 하루동안 얼굴의 살이 침울하게 내려앉았다. 누울 수 없는 피로가 몰려온다. 

2013. 7. 20. SATU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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