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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14. 2024

PROFESSOR's BELOVED EQUATION

博士の愛した數式 | 박사가 사랑한 수식

[博士の愛した數式, The Professor and His Beloved Equation. 小川洋子 2006]


"사랑이 두려운 것은 깨지는 것보다도 변하기 때문이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오가와 요코(小川洋子)의 글에선 함축적인 영상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바스락대는 메모지 소리가 들리도록 한없이 웅크린 기억은 곪아간다. 박제된 기억은 보는 이에게 커다란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실이 있었다는 존재감과 서글픈 무형의 일들이 나에게도 닥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풍긴다. 허옇게 변색된 머릿속에서 80분짜리 리미티드 테이프가 굴러가고 있다. 한 바퀴 돌아가면 또 다른 영상과 감각이 채워질 것이다. 새로워서 기쁜가? 그러나 다시 새겨진다는 것은 이전의 소중한 것들도 깡그라니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내 기억은 80분 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예순네 살의 수학자. 곰팡이가 올라온 양복 위로 덕지덕지 붙은 클립은 한정된 시간에 대한 보충용 학습들을 연결시켜 놓고 있다. 1975년에 멈춰진 박사의 기억.


새 파출부와 그의 아들 10살…… √


사막 같은 생활에 단비처럼 내리는 소수의 개념을 사랑한 박사가 스물여덟 파출부를 향해 쓴 메모다. 키나 몸무게, 성격, 재산, 에티켓, 외모로 판단되는 한 순간의 인상보다 좀 더 객관적인 표식이다.


6이 완전수라는 것도, 전화번호 567*1455가 1과 1억 사이의 소수의 개수라는 것도, 메르센 소수와 쌍둥이 소수와 페르마의 정의도, 듣기 정겨운 우애수도, 1-1=0의 무한한 박애정신도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는 박사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지만, 복숭아 통조림처럼 고이 저장될 필요 없이 너끈히 닦이고 조여지는 너트와 볼트와 같은 관계는 이 사람의 뇌와 기억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을 하는데 필요한 것은 기억이 아니다. 오늘이라는 짧은 시간에 바쳐질 헌신과 공감대, 그것의 반복이 펼쳐내는 감정 다지기라는 것을 실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는 수(數)를 사랑했던 박사는 다른 사람의 눈과 기억을 통해 재생산해낸다.


우리는 슈퍼마켓 상품의 가격표, 문패의 번지수, 버스시간표, 쨈의 유통기간에서 소수를 즐겼던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야구경기를 즐기고 돌아온 아이가 곤히 잠든 사이, 머리를 쓰다듬다가 평평한 루트의 개념을 각인시킨 수학자를 되새길 수도 있다. 파출부와 수학자의 관계는 흔치 않지만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과의 관계나 다름없다. 쉽게 만날 수 없고 만나도 조합이 어색한 결합수식이다.


책을 읽으면서 ‘기억의 저편’에 살고 있는 질서를 ‘기억의 이편’으로 끌고 오는 것보다는, 220과 284처럼 혹은, 1184나 1220처럼 우애롭게 연결시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졌다. 사랑을 하면 상대를 그대로 내버려 두기가 어렵다. 매번 얼굴표정을 바꿔야 하고 하다못해 대화에서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


"신은 존재한다. 왜냐면 수학에는 모순이 없으니까. 악마도 존재한다. 왜냐면 그것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


올바른 모순과 확실한 증명은 신과 악마의 존재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정점에 서 있다. 당신과 나의 사랑을 증명한다거나 모순 없이 즐기기란 어렵다. 사람들의 만남이 우연에서 시작되었듯이 지속적인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짧게만 느껴지는 이 순간을 반복해서 틀고 재생시키는 노력에 달려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그건 복잡한 수학공식이나 정의가 아니라 생활의 발견 같은 소수의 출현이었다. 언제 있을지 모를 너와 나의 만남처럼.


2007. 9. 9. SUNDAY



영화로도 소개된 《박사가 사랑한 수식, 博士の愛した数式》을 떠올리면, 이 책을 보던 신촌의 한 서점이 생각난다. 홍익문고 옆에 있던 서점이었다. 신촌에 안 간지도 오래되어서 아직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구글지도 보니까 이미 사라진 것 같다. 한국에서의 정리를 준비할 당시, 잠시 창천동에서 살았다. 새로운 곳에 대한 정보를 찾을 겸 들렸던 서점에서 박사가 사랑한 수식, 博士の愛した數式을 봤다. 밤 아홉 시, 문 닫기 전까지 책을 봤나 보다. 내가 적긴 했지만 책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고, 삐딱하게 모퉁이에 기대서 책을 읽던 모습만이 떠오른다.  

  

다행히 감상을 써 놓아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뭔 지도 다시 알게 됐다. 이렇게 써 놓은 이유도 기억의 기능이 떨어질 줄 예측해서일 것이다. 박사의 기억은 80분인데, 그래도 나는 그보다 길다. 하루, 며칠, 몇 달, 몇 년. 다만, 대상에 따라 그 깊이와 강도, 남아있는 파이는 다르다. 단기간에는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데, 이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끈 떨어진 종이연 신세다. 그래도 살았던 어느 순간의 장면 수식이 남아있다는 건 스스로에게 위안을 준다.


 


세계적인 석학한테 누군가가 물었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내용을 잘 기억하시죠?"

"잘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망각을 잘해야 기억을 많이 할 수 있다니, 망각과 기억은 떼기 어려운 친구사이인가 보다.

2013. 6. 26. 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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