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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19. 2024

CHINA's ART DISTRICT

[중국예술구역] 팡리쥔(方力钧), 대량소비시대의 자기 복제와 자아비판

[方力钧 ARTWORKS] SHANGHAI MUSEUM.  PHOTOGRAPH by CHRIS @ CAZA, 춘추풀아트그룹


 중국 현대미술의 발전은 강렬한 풍자와 해학, 독창적인 시대해석에 매진하는 작가들의 노력에 기인한다. 이제 선진의 회화를 모방하는 모습은 선두그룹에 선 작가들에게서만 흔적이 남았을 뿐이다. 현대 중국예술의 거성이라고 불리는 팡리쥔(方力钧)은 자신의 벌거벗은 두상을 노출시킨다. 동시에 부강을 목표로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자화상을 노골적으로 금칠하면서 적나라하게 생육한다. 그는 사람의 인생이 세태에 적응하고 시간에 따라 변해감을 일련의 시리즈물로 승화하고 있다. 자신의 얼굴을 닮은 시간의 흔적들은 삶에 환호하고 인생을 고뇌하며 하루를 노동하고 의식을 찬양하는 인간 자체의 모습이다. 팡리쥔은 금전만물에 휩싸인 인간들 조차 세파에 지워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순간 절망하고 쇠퇴하고 소멸한다는 것을 삶의 행적을 따라 미묘하게 생태 한다.


 곱창처럼 늘어진

 유리병 속의 너

 내가 버렸던 아이

 갓 익지 않았네


 예술은 자기 환기의 기능을 한다. 모두가 예술가로 태어났지만 창작에 대한 꿈틀거리는 열망은 소비의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켜보는 연습으로 잠재워진다. 중국의 예술계는 부단히 자신의 색채를 발전시키는 작가들이 한 무리 군단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높은 가지 위에서 곱상하게 살아왔던 자본주의 시대의 작가들은 억압받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옥죄지 않는다. 뜨거운 삶의 열기가 매일의 생존이 되는 치열한 생산 경쟁의 사회에서 창작조차 짜내지 않으면 도태된다. 우리는 추구하는 대상을 대량으로 소비하지만, 또한 소비한 만큼 만들어내는 것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모두가 소비하는 사이 쉼 없이 자신을 복제하고 생산하지 않으면 어느덧 스스로에게도 잊히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던가.


 우리의 인생에서 호수의 연무보다 짙게 깔린 것은 파리처럼 번식하는 내부의 욕망일 것이다. 언젠가 물에서 태어난 나의 아이는 커다란 박쥐를 타고 푸른 거위와 동무하며 저 세상을 날아다닐 것이다. 그날을 위해 나의 온몸은 다시 한번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2007. 11. 27. TUESDAY




 그러니까, 인생의 여정은 항상 계획을 바꾼다. 2007년, 한국을 나와 중국으로 방향을 튼 나는 상해의 모간산루 예술거리(莫干山路 Muaganshan road, M50 Creative Park)에서 북경의 798 예술구역(大山子798艺术区 798 Art Zone)까지 폐공장 단지 전체가 예술의 현장으로 변한 예술 공장(Art Factory)을 거닐며 삶의 예술로 꽉 채워진 날 것의 도시를 맛보았다. 돈과 시간이 부족하다고 모든 것을 버려버린 나는 중국에서 예술적인 희망을 보았다. 어두운 적재창고는 예술을 논하는 카페로 환하게 바뀌어 있었고, 기계가 놓인 트레이는 갓 생산된 작품을 꽉 채워서 관객에게 실어 날랐다. 직공이 살던 방은 작품제작소로 이용되었고, 업무를 보던 사무실은 작품을 어떻게 거래할지 홍보하고 마케팅하는 아트 트레이더들이 컴퓨터와 전화기를 만지고 있었다. 틀에 찍어 나오는 일률적인 제품을 만들던 공장(Factory)은 버려진 공간을 재활용한 생계형 예술가들에 의해서 생기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루를 돌아도 다 볼 수 없는 예술구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작품들은 애쓰고 힘들게 배운 서구적인 방식의 예술교육을 무색하게 했다. 예술로 밥 먹고 살아야 하는 친구들에겐 예술은 일이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팔러 다니는 예술가들의 모습에서 놀라움을 느꼈다.


 한국에서 일을 하다 보면, 젊은이부터 나이 든 사람까지 자주적이기보다 의존적임을 발견한다. 자기의 재능을 알아봐 주는 이상적인 스폰서를 원하고,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기업에 의지하여 작품생산보단 관계를 맺는데 열중하며, 명망 있는 타인의 목소리에 기댈 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진정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큐레이터와 마케터까지 부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춘다면,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 목소리 그대로, 나의 작품을 세상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중국의 예술구역을 돌아보면서, 마음 한편으론 금전문화를 혐오하면서도, 돈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내가 만든 것이 사라져도 또다시 만들고 그것을 복제할 수 있을 만큼 계속적인 생산에 대한 열정이 나에게 있을까? 내 것을 하려면 돈부터 벌어야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돈에만 매몰되지 않고서 살 수 있는 방법도 고민했다. 그땐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직접 움직이기 전까지 말이다.  

 




 타인의 작업을 바라보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채워진 적 없기 때문에, 그 채워짐도 헛된 희망이었기에, 살리에리형 인간에서 멀어져 있어 다행이다.

2013. 8. 31. SATU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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