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ONIE DES EORS, Han Byung-Chul] PHOTOGRAPH by CHRIS
모든 색(色)을 끌어안은 검정, '암흑'을 사랑하는 자에게 다가온 다홍빛의 에로스는 당혹스럽다. 찬란한 빛도 아닌 것이 뜨거운 피도 아닌 것이 처연하게 시선을 어지럽힌다.
"사랑이 종말을 고하는 시대에 완전한 타자의 침입으로 모든 재난의 구원이 되는 사랑의 재발명을 위한 투쟁!"
이런, 반항기가 다분한 젊은 청년이자 낭만적인 철부지 시인, 랭보의 어투로 들린다. "뜨겁게 사랑하라"는 광고적인 구호들이 심장에 꽂힐 수 없는 인간들 사이로 난무하는 세상에서 에로스의 세계는 막을 내렸는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렇다고 할 것이고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소수의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한병철(Han Byung-Chul)의 사랑론에 손을 대본다. 아카데믹한 자가논평에 빠져있던 학창 시절, 타자의 정신을 해체하고 타자의 언어와 속살까지 파헤치는 설문해자(說文解字)식의 놀이는 의미로운 시간 때우기 중에 하나였다. 공통의 시간만이 아니라 개별자의 의식까지도 각자의 공간으로 흘러가게 하는 타자의 정례화된 초식과 생각의 늪에서 시간을 건너뛴 자가 건질 수 있는 것은 많을 것이다. 한병철의 이력은 흥미롭다. 일을 하느라 책을 멀리한 지도 오래돼서 그의 존재는 최근에 알게 되었다.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뒤 독일로 건너가 철학, 독일 문학, 가톨릭 신학을 공부한 한병철은 2000년 데리다에 관한 논문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는 《피로사회 2010》, 《투명사회 2012》의 출간 및 하이데거와 헤겔, 폭력과 권력, 죽음과 시간에 대한 다양한 비평으로 문화예술사회에 대한 전방위적 해석을 진행 중이다. 한병철이 책을 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책과는 멀어져 있었다. 문학, 영화, 극, 그림, 춤, 음악까지도 모두 생계를 위한 작업으로서 바라보게 된 이후, 문화 예술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의 근거는 기억 속에 다져두던 의식의 창고에서 꺼내온 것이 전부였다. 《에로스의 종말 AGONIE DES EROS》, 책의 제목처럼, 통속적인 로맨스 소설과는 분명 다른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랑'과 '행복'이란 단어가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했다. '에로스'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나 나오는 신(神)의 이름일 뿐, 그것은 생활과는 전혀 연관 없는 '에로틱한' 육체적인 질감의 단어였다. 그럼, 이런 모든 색을 상실한 무표정함까지도 잘 접어두고 《에로스의 종말》이 없기를 바라며 한병철의 의식세계로 들어가 본다.
1장. 멜랑콜리아
"지구는 사악해.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이유는 없어. The earth is evil; we don't need to grieve for it." <멜랑콜리아 Melancholia>
거대한 우울과 심각한 불안은 불현듯 다가왔다 어느새 사라진다. 사랑이 사라져 갈 위기를 바라보며 불안한 사람들은 사랑을 겪지 않은 이인가, 아니면 사랑을 함유하면서도 사랑이 보이지 않음에 우울한 사람들인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타자의 침식과정이 진행되고 자아의 나르시시스트화 경향이 강화된다는 것은 사랑의 위기를 초래하는 현대의 극적인 변화라고 설명하는 한병철의 말을 들으면서 이것은 인류사에서 언제나 있었던 문제였다고 덧붙이고 싶다.
자본주의 세계로 넘어가면서 급격하게 인구가 불어나기 전엔 인간의 공간적 밀집도가 10 정도였다면 지금은 100에 근접하는 숫자적인 차이가 생겼다. 그로 인해 표면적으로 만나는 타자와의 거리가 감도의 가시성에선 지극히 가까워지고 기계의 발달로 인해 공간이 제약되는 사회로 넘어가면서 현상학적으로는 멀어지는 모순이 생겼다. 이는 인간 개체수의 증식으로 인한 거부할 수 없는 공간적 비선택의 문제와 내부적 의식의 격차와 변화된 현실이 만들어내는 질적인 공간 서비스 문제가 낳은 총제적 난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적하게 커피 전문점에서 서비스되는 커피를 맛보고 싶은 사람이 10년 만에 같은 공간을 방문한다. 십 년 전 그는 열 평이 되는 향기로운 공간에서 한 두 명만 있던 사람들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타자와의 충분한 거리를 갖고서 타자에 대해 상상을 하고 혹시 모를 새로운 대화를 기대하며 면밀히 타자의 외모와 행위를 관찰하고 타자와 실제로 대화하게 되었을 때 그런 기대적인 상상과 경험들을 자기만의 대화방식으로 나눴을 것이다. 십 년 뒤, 같은 공간을 방문한 그는 열 평의 공간에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그가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대화적 공간도 부재한 밀집된 공간에서 타자를 분별할 수 없으며 서비스조차 얻어낼 수 없는 기나긴 기다림 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첫 장부터 한병철과 대립각을 세워서 미안한데 《에로스의 종말 AGONIE DES EROS》이란 단어가 지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혹은 언제나 배반적인 심리로 달리는 심장을 고려했을 때 그 비관까지도 너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대학 때 미학을 수강하면서 미학적이지 않은 외모의 선생님이 미학을 가르쳐서 모순된다고 생각했다. 건곤합일, 물아일체 이런 것까지 바라는 것은 우습다. 우리는 타인과의 대면에서 내면을 봐야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외면이 주는 참신한 충격은 에로스를 형성하는 타자적 거리감을 생성하기 때문에 기호적인 환상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강한 의미의 타자를 향한 것이다.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로 한 에로스적 경험은 부재한다. 내가 갈망하는 타자, 나를 매혹시키는 타자는 장소가 없다. 그는 동일자의 언어에 붙잡히지 않는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소비사회는 무소(無所)적인 아토포스(Atopos)의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 오늘날의 부정성은 도처에서 소멸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평탄하게 다듬어지고 소비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잠시 나르시시즘의 정의를 살펴본다. 나르시시즘 (Narcissism)은 자기 중심주의를 의미하는 심리학적 개념으로 자기 이미지와 자존감에 대한 과도한 관심, 자기애(自己愛, Self-Love)로 특징된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나르키소스 (Narcissus)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요정 리리오페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은 신과 인간 모두 질투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의 부모는 테이레시아스 예언자에게 아들의 운명을 묻게 되는데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면 오래 살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자라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에 무감해진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냉정하게 거부한다. 헤라 여신의 저주로 인해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다른 사람의 말만 되풀이하게 된 요정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지만, 나르키소스는 그녀를 거부했고, 상심한 에코는 결국 몸이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 한편 나르키소스는 아메이니아스라는 청년의 사랑을 받지만 그에게 관심이 없던 나르키소스는 매정하게 대한다. 나르키소스가 아메이니아스에게 칼을 선물한 날, 아메이니아스는 나르키소스 집 앞에서 그 칼로 자살을 하면서 나르키소스가 짝사랑의 고통을 알게 되길 네메시스에게 빌었다. 저주의 원칙대로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너무 아름다워 입맞춤을 하려다가 자신의 모습이 반사된 것을 알게 되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죽은 자리에선 한 떨기 청초한 꽃이 피어났는데, 이 꽃이 바로 수선화(Narcissus)이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와 고결함, 신비와 자존심으로 설명되며 모든 해의 시작점인 1월을 상징하는 꽃이다. 나르시시즘 (Narcissism)은 자신을 특별하고 대단하다고 여기는 자아도취적 성향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부터의 인정과 칭찬을 필요로 한다. 자기중심적 열애는 타인의 감정이나 필요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할뿐더러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이용할 수 있는 착취성에 몰두한다. 권력이나 성공, 이상적 사랑에 대한 과대망상적인 환상에 빠져 자신을 타인이 질투한다고 믿고 오만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성격 특성이다.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하기 위해선 과도한 자기 관계에 빠지는 나르시시즘적인 질병인 우울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의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성공을 겨냥하며, 타자는 타자성을 빼앗긴 채 주체의 에고를 확인하는 거울로 전락한다. 에로스는 타자를 타자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하고 주체를 나르시시즘의 지옥에서 해방시킨다. 에로스를 통해 자기 부정과 자기 비움의 과정이 시작된다. 이 감정은 주체 자신의 업적이 아닌 타자의 선물이다."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의 <멜랑콜리아 Melancholia>에서 사드(Donatien Alphonse François de Sade)의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운, Justine, ou les Malheurs de la vertu》 속 절망적 여주인공 쥐스틴(Justine)을 닮은 '저스틴'의 깊은 우울을 끌고 오는 한병철은 불가능한 사랑이 우울증을 낳고 에로스는 우울증을 제압한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해 속에서 인류에게 구원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and Isolde》의 서곡을 배경으로 사랑과 죽음, 묵시록과 구원의 근친성을 마술적으로 환기하는 역설적인 지구의 구원적인 종말의 근거로,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의 <눈 속의 사냥꾼들 The Hunters in the Snow>과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의 <오필리아 Ophelia>,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브뤼헐의 <게으름뱅이의 천국 The Land of Cockaigne>, 칼 프레드리크 힐 (Carl Fredrik Hill)의 <우는 수사슴>을 끌고 들어온다.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사건(Ent-Eignis)인 변증법적인 재앙은 더 이상의 부재와 불안이 존재하지 않을 구원을 선사한다.
멜랑콜리가 극대화된 <멜랑콜리아>에 숨겨진 인간의 우울과 불안은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부터 예시를 든 모든 화가들이 깊은 우울증에 빠져있는 상태라는 것을 감안해서 우리 스스로 해방의 날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온갖 우울이 집약된 문화예술 종합세트를 맛보면서 파괴적인 지구종말을 구원의 이름으로 역설하는 해석을 바라본다. 문득, 이 글을 쓴 한병철 또한 우리를 에로스의 종말에서 구원하는 해법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또한 에로스의 종말로 다가가는 멜랑콜리아적 디스토피아인 아름다운 '우울증'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간다.
2장. 할 수 있을 수 없음
"해야 한다는 규율사회와 달리 할 수 있다의 성과사회는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다. 성과주체는 자신의 경영자로서 명령하고 착취하는 타자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다. 주체는 자발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자는 피착취자이며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 속에서 이뤄지는 까닭에 타자의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며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
한병철은 경제적 합리성에만 기초를 두어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가 규율사회에 살고 있지 않으며 복종적인 주체가 아님을 미셀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다 해도, 신자유주의적인 구호가 "자유로워져라"라는 역설적 명령을 통해 성과주체를 우울증과 소진 상태로 밀어 넣고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로 여기며 타자 강제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본다. 개인 스스로를 예속된 주체(Subjekt)가 아니라 기획하는 프로젝트(Projekt)로 이해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간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좌절은 자기 탓이며 실패에 대한 책임은 자신 밖에 없기 때문에 모두 타자와의 유대가 없으면서 채무의 위기와 보상의 위기까지 발생하는 상황은 초월적 조건을 이룬다. 성과주체에게 채무만을 만드는 자본주의는 속죄의 가능성, 채무자를 채무에서 해방시켜 줄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채무상황(Solvere)이 불가능한 파산(Insolvenz)으로 심리상태를 몰고 가는 구제할 수 없는 좌절의 우울증을 낳는다. 여기서 에로스는 '할 수 있을 수 없음 Nicht-Können-Können'의 타자적 아토피아(Atopia)가 에로스적 경험의 본질적 성분을 이룬다. 가질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타자는 가질 수 있고 붙잡을 수 있고 알 수 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태의 실패를 상징하며 타자를 타자의 원형적이고 독자적인 상태로 남겨놓는다.
한병철은 예술가들이 몰두하는 거리의 이격성(離隔性)이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과정임을 다시 한번 설명한다. 성과주의의 지배 아래에서 성애(Sexualität)는 증식되는 자본이다. 인간의 육체는 흥분을 일으키는 대상으로 전락하며 소비하는 대상들로 파편 되어 인격성을 상실하면서 부버(Martin Buber)가 말하는 타자의 "근원거리 Urdistanz"는 손상된다. 근원거리(Urdistanz)는 타자성(Alterität)이 성립되는 인간의 원리이며 타자가 사물화 되는 것을 막아줌과 동시에 타자에게 말을 건넬(Anreden) 수 있게 만들고, 타자의 얼굴을 살아있게 하며 타자의 다름을 구성하게 만든다. 타자의 실종 없이 예의바름(Anständigkeit)의 이격성(離隔性)이 살아있기 위해선 긴장을 함유한 '가까움' 속에서 거리의 부재가 가져오는 '멂'이 존재한다는 부정성의 활력을 통해 상처와 고뇌(Passion)로서의 사랑에 접근해야 한다. E. L. 제임스(E. L. James)의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Fifty Shades of Grey》에서 묘사되는 사도마조히즘적인 놀이는 "하드 리미트(Hard Limit)"와 세이프워드(Safe word)" 명령어 사용으로 감각적 향유와 소비의 긍정성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랑의 고통의 모습인 헤겔의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부정성은 존재하지 않는 최적화된 현재가 된다.
"있었던 것은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기억은 앞으로 나아가는 살아 있는 서사적 과정이며, 이 점에서 데이터 저장 장치와 구별된다. 데이터 저장 장치와 같은 기술 매체는 있었던 것에서 모든 생명력을 빼앗아간다. 그것은 무시간적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세계는 전면적인 현재의 지배 속에 놓이게 된다. 전면적 현재는 순간(Augenblick)을 폐기한다. 순간이 없는 시간은 그저 더해지기만 할 뿐 더 이상 상황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클릭(Klcik)의 시간으로서, 결정과 결단을 알지 못한다. 순간은 사라지고 클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동일자의 시간인 현재에서 미래의 아토포스적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타자가 부재하는 부정성은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의 애무와 쾌락의 본질적 계기를 제공함과 동시에 타자의 부정성과 아토포스적 이질성에 주목하게 한다. 한병철은 검색엔진이자 소비 엔진으로서의 오늘날의 사회는 찾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소비할 수 없는 부재자를 향한 갈망을 폐기하며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이질성을 제거한다고 본다. 그는 타자를 주면서 동시에 빼앗는 타자의 얼굴(Visage de l'autre)을 직면할 때 에로스는 깨어난다고 설명한다.
3. 벌거벗은 삶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의 《벌거벗은 진리 DIE NACKTE WAHRHEIT》에서 '벌거벗은' 의미는 무자비한 세계에 에로틱한 신비성을 상실한 진실하지 않은 모습이다. 아도니스를 죽인 수퇘지의 성적으로 흥분된 엄니(Erotikous Odontas)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가 설명하는 성적으로 흥분된 연인의 눈(Erotikon Omma)은 골수에 뜨거운 피를 일으키는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이다. 뮈리누스의 파이드로스에게 반해버린 테베의 연설가 뤼시아스의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은 전염병 중에서 최악의 전염성 질환이며, 한 인간에게 타인의 본성을 불어넣는 변신과 상처를 동반한 불안과 부정적 본질을 이룬다. 상냥하고 친밀하고 부드럽고 조용하며 편안하면서 달콤한 낭만적 사랑은 남자든 여자든 여성적인 감정의 영역으로 낭만주의적인 소비의 모습으로 귀결된다. 속성 섹스,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의 성애(Sexualität)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타자를 향한 갈망은 안락함과 편안하게 늘어진 내재성에는 어떤 초월이나 위반도 없으며, 건강의 절대화와 물신화로 벌거벗은 삶을 촉진한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처럼 자유와 인정, 독립을 갈망하는 마음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근심을 초월한다. 벌거벗은 삶에 귀속된 노예는 오늘날의 성과주체와 유사하며 역사의 종말을 맞이한 시대에서 노예나 주인이 아닐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한병철은 데리다(Jacques Derrida)나 들뢰즈(Gilles Deleuze), 바타유(Georges Albert Maurice Victor Bataille)와 달리 헤겔을 타자에 대한 강한 감수성을 가진 사상가로 인식한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죽음을 감내하고 죽음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하는 '자신의 타자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화해로운 귀환'인 것이며 극단적인 것과 극도의 부정성을 자기 안에 품음으로써 완결을 이루는 절대적 결론이라고 본다. 과도한 개방과 탈경계에서 완결을 짓는 능력이 실종된 시대의 성격적 특징인 우울증은 벌거벗은 삶에 대한 염려에서 생동성을 앗아간다. 에로스적 삶의 충동은 죽음의 충동으로 표출되며, 개별자들의 불연속적 질서를 구성하는 사회 규칙적 형태들의 해체를 가져오는 에로티시즘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영원히 착취하는 성과주체의 시간을 벗어나 시간 속에 영원을 들여오는 결론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4장. 포르노
"유혹에서 사랑으로, 욕망에서 성애로, 마지막에는 단순한 포르노로 전진해 감에 따라 그만큼 더 강력하게 비밀과 수수께끼는 위축된다. 비밀도 표현도 없는 얼굴, 오직 전시성만으로 환원되어 버린 맨얼굴은 음란하고 포르노적이다."
에로스의 적수, 포르노는 벌거벗은 삶과 직결된다. 포르노의 음란성은 살아있는 성애 속에서 진정한 섹스가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모델이나 포르노 스타처럼 매체 위로 전시된 인간의 공통된 얼굴은 에로틱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파괴하고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인스타그램이나 텔레그램 방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고 성(性)적 상징인 근육과 가슴, 엉덩이와 성기만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면서 성을 상품화하는 후킹(Hooking)은 개별적으로 데이타화된 포르노의 도구로 사용된다. 대중적인 연예인의 얼굴을 AI코드나 포주가 고용한 신체에 합성하여 육감적인 섹스머신을 방불케 하는 흔들림을 전시하는 순간, 감각에 취약한 인간은 자동적인 신체적 흥분으로 인해 자위에 몰두하게 되지만, 이는 대상이 없는 실체와의 욕망적인 해소일뿐 에로스는 아닌 것이다.
한병철은 에로스에 대한 환상적인 연출과 가상 형식과의 유희는 이를 파괴하는 해방에서 생겨나며 형식의 해체에서 사랑은 에너지를 얻는다고 본다. 머리가 제거된 포르노는 육체 위로 오직 생식의 성애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번역의 문제인 것인지, 한병철이 설명하는 성애(Sexualität)와 섹스(Sex)의 단어 구분이 모호하게 인식돼서 좀 더 쉽게 언어학적으로 설명되는 구체적인 영화적 예시를 들어본다. 영화 <귀여운 여인 Pretty Woman 1990>에서 주인공 비비안은 매력적인 돌싱남 에드워드에게 말한다.
"키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할 거예요."
영화에서 실제로 표현된 말은 "섹스는 누구와도 할 수 있지만, 키스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겠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비비안이 말하는 키스는 섹스에서 더 나아간 에로스적인 심리 행위의 표현으로 사랑, 애정, 친밀감, 유대감과 같이 감정적 연결을 상징하는 고급 콜걸의 하나 남은 비장의 무기이다. 두 남녀가 사랑을 느끼고 마지막에 키스로 마무리되는 해피앤딩은 비관적 포르노 세계의 클리셰를 무너뜨리는 전형적인 일상세계를 향한 환상적 클리셰로의 직행으로 볼 수 있다. 남녀 관계에서 성(性)적 상상을 할 때 호르몬에 영향을 받는 신체적인 특성이나 사고를 형성하는 사회적인 기초교육의 영향으로 대부분 남자들은 실제적인 성행위인 섹스를 생각하고 대부분 여자들은 감정적인 연결과 친밀한 접촉인 키스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남성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생(生)적인 것과 결부된 성(性)을 떠올리면 감성이 올라오기보다는 직접적인 행위를 연상하기 때문에 타자의 육체적 상태나 심리를 경험하지 못한다는 절대적 고립의 표면적 상태에선 스스로가 형성한 틀에 집중하고 그것에 의해 논리를 형성하는 사고의 한계점에 부딪힐 수 있다.
한병철이 여기서 설명하는 성애와 섹스의 언어적 이해는 남성적인 수사(搜査)로 바라보는 포르노와 에로스의 이분법적인 언어로 봐야 한다. 보통의 여성들이 에로스와 포르노의 단어를 이해한다면 남성들이 이해하는 에로스와 포르노보다 더 분명하게 구분하게 된다. 적극적인 육체의 사랑을 사랑의 필수 과정으로 인식하는 남성들은 포르노와 에로스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한병철이 사용한 성애와 포르노를 향한 비판적인 단어에서 고대 플라톤 시대 철학에서 보임 직한 남성우세의 긍지와 남성성을 향한 동성애적인 우월함과 머리가 텅 비고 감성만 가득한 여성적 요소에 대한 비판으로 들릴 수 있는 소지가 있음을 제기한다. 타자를 향한 '에로스'를 다루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에로스'적인 고도의 심리적 사유를 여성이 읽을 수 있을 거라던지 여성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보통 과학적이고 기계적이며 분석적인 머리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을 살펴보면 자기 성(性)에 대한 긍정성을 높이 산다. 유신론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의 서구적인 사상문화에서 물이나 공기처럼 인간의 삶에 필요한 중성적인 소재로 철학적 사고를 택하지 않는 이상, 성적인 형태가 반영되는 사회심리적 현상을 분석했을 때 균형적이면서 평등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철학자는 드물다. 육체적인 호르몬이 생식의 주를 이루는 남성에게는 <포르노> 섹션은 즉각적인 공감을 얻어내겠지만, 포르노를 봐도 육체적인 성애로 직결되지 않는 신체적 구조의 여성에게는 그 적나라한 진행이 공격적으로 비칠 수 있다.
성(性)에 대한 남녀 차이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젊고 남성적 호르몬이 충만한 자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성애(Sexualität 性愛)와 섹스(Sex)는 인간의 성적 경험과 표현의 측면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성애는 성적 감정과 욕망, 그리고 이와 관련된 심리적, 감정적, 예술적 표현인 에로티시즘(Eroticism)으로 오인되어 설명될 수도 있다. 성애(Sexualität)는 성에 대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개념으로 성적 정체성, 성적 지향성, 성적 욕망, 성적 행동 등의 요소를 포함한다. 이는 곧 개인으로 집중되는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이며, 개인이 성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의사이자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무성애로 구분되는 성적 취향, 개인이 느끼는 성적 욕망과 이를 표현하는 행동이다. 반면 섹스는 주로 신체적 성적 행위와 그로 인한 생리적 반응을 의미하며 보다 구체적이고 신체적인 성적 활동을 지칭한다. 생물학적으로 번식과 생을 태동하는 육체적이면서 본능적인 행동으로 이해되는 섹스는 신체적인 접촉과 행위를 통해 성적 쾌감을 추구한다. 여기서 한병철이 포르노를 설명함에 있어 사용하는 성애(Sexualität)와 섹스(Sex)라는 단어는 감각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여성적인 반응과 남성적인 태도, 환상과 실제, 욕망과 현실적 접근이라는 대조적인 측면을 부각하는 의도로 사용되었으나, 현실에서 사용되는 성애는 상상을 동반한 감정적 표현이며 섹스는 감정 없이도 육체적인 질감이 드러난다는 면에서 이해의 어감상 충분히 혼동될 수 있다. 영화 <부기나이트 Boogie Nights>에서 주인공이 자랑하던 13인치(33cm)의 거대한 남성적 성기는 <헤드윅 Hedwig And The Angry Inch>에서 성전환 수술을 위해 6인치에서 5인치를 잘라낸 후 앵그리 1인치 밖에 남지 않은 헤드윅 로빈슨(hedwig robinson)의 것보다 13배는 크긴 했어도, 화면을 가득 채우던 동물적이고도 자극적인 섹스는 반복된 행위에 전혀 뇌파에 자극을 주지 못하고 지루한 졸음을 몰고 왔다. 대다수 지적인 남성들이 설명해 온 성(性)에 대한 본성적 비판과 철학적인 해석은 정숙하고 부드럽다고 인식되는 여성들이 말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구조상 분명 일방의 의견을 게재하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한병철이 말하는 진정한 섹스의 의미는 좀 더 밀접한 인간과의 교류와 생리적 반응을 통한 육체의 결합처럼 적극적인 남성의지의 진행적인 에로스적 표현으로 봐야 한다. 포르노는 지적인 동물에게는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다는 것에는 동조한다.
5장. 환상
"사람들은 사물에서 의미를 몰아내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나의 이야기들은 일종의 눈 감기다."
《밝은 방, 롤랑 바르트 Die helle Kammer, Roland Barthes》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문장 인용 중에서
오늘날의 인터넷 상상은 본래의 인간보다 '이상화'의 과정을 심화시킨다.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누군가를 바라볼 때 과대평가와 실제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며 존재를 이상화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욕망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비문화를 설명함에 있어 《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의 여주인공 엠마의 환상을 끌고 온다. 엠마가 초래한 낭만주의적 갈망과 비생산적 탕진은 그녀의 근대적 생산 자아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무한정한 선택의 자유는 타자에 대한 욕망의 종말을 재촉하고, 과대한 가시성은 기대상승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회적 환멸을 몰고 오며, 시각적인 정보를 최대화하는 포르노는 에로틱한 상상을 파괴한다. 제임스 G 밸러드 (James Graham Ballard)의 《한낮 어스름의 지오콘다 The Gioconda of Twilight Noon》의 예시는 흥미로운데, 눈병을 치유하려다가 다른 감각이 날카로워진 메이틀랜드(Maitland)는 스스로 시력을 제거함으로써 꿈의 이미지들과 갈망이 떠도는 어둑한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메이틀랜드의 환상이 현실을 제압하는 상황은 각박하고 건조한 세상에 대한 개인의 반항적인 선택이며 적극적인 거부의 몸짓이자 이상이 현실 위에 놓인 가분수적 형태이다.
"오늘날 예술과 문학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은 환상의 위기, 타자의 소멸, 즉 에로스의 종말에서 찾을 수 있다."
자신을 다 털고 나면 남는 것은 벌거숭이 몸뚱이이다. 따라서 타자에게 환상을 심어줄 한 가지 비밀한 것만이 인간이 가져야 할 필수 덕목이 되었다. 경제적 법칙만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동일자 지옥은 타자에 대한 환상을 철폐하고 아토포스적 타자가 등장하는 비밀스럽고 수수께끼와 같은 문턱과 다리까지 파괴해 버린다. 자본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와 직업적인 현상으로의 개인의 지표는 에로스와 에로티시즘의 유혹을 파괴할 수 있다. 거기엔 타자를 타자로 남겨두기보단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욕망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순간적 현실에 대한 실재적인 관찰과 그에 대한 과거의 사유와 현재의 직시, 미래에 대한 직관은 모두 거짓된 환상을 제거함과 동시에 타자의 환상을 초대하는 방식이다.
6. 에로스의 정치
정치와 에로스의 관계를 설명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콧방귀를 뀌며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도대체 사랑과 정치는 무슨 관계야?"
조금 더 세속적인 표현을 끌어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사랑과 전쟁", 혹은 "전쟁과 평화", 아님 "사랑과 평화". 이 세 가지 표현은 모두 정치와 에로스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이지만, 드라마 제목이자 소설의 핵심이며 음악 밴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보편화된 단어들은 상상력이 부족한 시대에 이르러 그 범용성을 하나의 인지적 대상에 제한시킨다. 한병철이 설명하는 <에로스의 정치>는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아서 핵심적인 문장만 정리를 해본다.
보편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생성되도록 영혼에 자극과 동력을 가하는 에로스는 아름다운 행위를 산출한다. 이는 오늘날 성애로 비속화된 사랑과 구별되며 플라톤적인 에로스로 설명될 수 있다. 충동(Epithymia), 용기(Thymos), 이성(Logos)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에로스는 영혼을 조종한다. 쾌락적인 충동과 다른 용기는 기존 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이며, 짜증과 불평과는 다르다. 에로스가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이다. 따라서 용기와 에로스가 사라진 현대의 정치는 단순히 사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한다. 충동을 토대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하면서 사회의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고립된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는 불구화되며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적대적인 성격을 지니는 정치는 모종의 차원에서 에로스와 폭넓은 소통이 이루어진다.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전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이 있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에로스를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면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사랑은 타자와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사건은 진리의 계기로써, 기존 상황 속에 살아가는 습관 속에 완전히 다른 존재 방식을 도입한다. 사건의 원리는 타자를 위해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키고, 사건의 본질은 단절의 부정성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출발시키며, 사건적인 성격을 통해 사랑은 정치나 예술과 결합된다. 모두 사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초월적인 충실성은 에로스의 보편적 속성이다. 소비가능한 성적 대상이나 성애는 타자가 아니며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강화한다.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타자의 저항이나 실재의 저항이나 예의(Anstand)도, 거리(Distanz)도 없다. 자기 성애적인 접촉이나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이며, 자아의 나르시시즘 성향을 강화한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에로스는 언어와 현실의 시적 혁명을 위한 매체다. 에로스는 보편적인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어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나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 준다.
7. 이론의 종말
"사유에 에로틱한 욕망의 불을 붙이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의 유혹이 없다면 사유는 늘 같은 것을 재생산하는 단순한 노동으로 위축되고 말 것이다."
한병철이 위급하게 생각하는 이론의 종말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이론주의자'의 이론은 아니다. 이론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형태이며, 지적인 질서의 규칙이다. 동일한 질서에 속하는 관능과 노동은 에로스의 정신적 동력을 얻지 못하고 정신과 욕망이 부재한 에로스는 아토포스적 타자의 저항을 알지 못한다. 데이터로 해석할 수 없는 인간의 행동방향은 계산 불가능한 부정성이 깃들여져 있으며 사유의 바탕을 이루는 이론을 통해 새로운 빛 속에서 나타나는 사유의 논리는 풍부한 서사적인 긴장과 해석을 가지고 가산적이고 폭로적인 실증과학을 넘어선다. 세계를 정제(Klären)하는 이론은 사물의 규칙을 통해 혼란을 예방하고 세계에 형식을 부여한다. 고요함 속으로의 탐험을 필요로 하는 사유는 정신의 정지상태인 문학에 긍정성의 과잉이 생산해 낸 정보적인 소음을 제거한다. 정신(Geist)은 세계에 불안한 부정성을 통해 살아있게 된다. 알아두기(Kenntnis)의 대상인 정보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실증과학은 인식(Erkenntnis)과 진리를 산출하지 못한다. 인식의 본질은 기존의 것을 뒤흔들고 전체를 배제하고 엄선하고 결단한다. 체험은 데이터와 자산처럼 축적을 특징으로 하며, 유일무이한 경험과 구별된다. 이성적 로고스와 에로스의 밀접한 상관관계는 소크라테스의 연설처럼 철학과 이론의 역사와 유사하며 소크라테스의 말에는 에로틱한 유혹의 말과 격한 격동과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
"철학은 에로스를 로고스로 번역한 것이다."
철학적 사유는 언제나 삶에 대한 열정을 동반한다. 누구나 믿고 있는 오류를 부정하며 굳어지는 현상에 균열을 가하고 정신적인 마비에 자극을 가하는 사유로서의 철학과 이론적인 근거는 타자와 간극이 무너져가는 동일성의 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온다. <이론의 종말>이라는 마지막으로 달리는 애정의 열차에서 한병철의 에로스를 찾아 나선 갈구(渴求)를 들어본다.
"플라톤은 에로스를 철학자(필로소포스)라고 부른다. 지혜의 친구이며 사랑받고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이 연인은 사유 속에 들어 있는 내적 현존, 사유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 하나의 생동하는 범주이며 초월적인 경험이기에 에로스가 아니라면 사유는 시작조차 될 수 없었다. 에로스는 아토포스인 타자를 향한 욕망을 불어넣음으로써 사유에 활기를 부여한다. 오직 친구, 혹은 연인이었던 사람만이 사유할 수 있다. 타자와의 생동하는 관계를 사유 속으로 끌어당기는 친구는 순순한 사유에서 배재되는 것이 아닌, 차라리 연인이 아닐까?"
종결 | 끝과 시작, 타자와의 에로스적 연결로
에로스의 종말 The End of Eros My Philosophical Overview
《에로스의 종말 AGONIE DES EROS》은 드라마 <아들과 딸>에 나오는 '종말'이처럼 더 이상 지긋한 딸은 낳지 않겠다는 부모세대의 종결적인 의지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에로스가 사멸해 가는 위기적 상황에서 에로스를 회복하는 방법으로 문화 예술적인 접근을 통해 철학적 사유와 지적인 이론의 회복을 역설한다. 데이팅 앱이나 소셜미디어, 디지털로 가변 되는 가상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적인 진화는 더 이상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랑의 풍경을 사색하게 하거나 타자와의 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욕망 아래 살아가는 벌거벗은 인간들이 성과주체의 노동적 현실과 벌거벗은 현실로 대변되는 포르노에 귀속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한병철의 사유는 미디어 세계의 욕망의 상품화에 대해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이 우려하는 바와 동일한 불안을 함축하고 있다. 진리를 고찰하는 문학적인 세계가 사라지고, 진실을 탐구하는 예술적인 감성이 희석되며, 이성적인 철학이 불모 한 탐욕의 정치적 세계가 돌출되는 현실에서 모두가 유명해지고자 사색 없이 달리는 동일자이자 성과주체의 모습들은 진정한 타자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타자의 방향으로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역변의 호소인 것이다. 이 글의 종장인 <이론의 종말>에서 한병철은 진정한 타자로서의 친구이자 연인을 찾고 있다. 육체적인 관계를 나눠야만 에로스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생동하는 지혜의 활기와 철학적인 사고의 깊이를 통해 타자와 나누는 충만한 사유의 경험은 먼 타자와 손에 닿지 않는 깊은 연결을 향해 열정적인 에로스로 전이되면서 잊었던 사랑의 열기를 이끌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