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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10. 2024

ALSO SPRACH ZARATHUSTRA

NEO NIETZCHE | 자라투스트라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 2004. 12. 15. PHOTOSHOP MIXED IMAGE by CHRIS


나는 남들이 말하는 ‘자라투스트라(Zarathustra)’나 ‘니체(Nietzsche)’는 모른다. 그저 모든 걸 잃어버린 광기로 신들리게 내부의 소리를 적은 신기 어린 부름과 나와의 대화만을 알 뿐이다. 초극성의 의지를 지닌 자라투스트라에 대한 해석은 종교, 철학, 문학, 사회, 정치, 사상 등 각종 측면에서 프리즘처럼 빛난다. 내가 보았던 니체나 자라투스트라는 분명 신을 거부한 배단적인 사생아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흔히 ‘신은 죽었다!’라는 외침을 부각하며 니체를 무신론자로 몰아대다가 광기에서 허덕인 초라한 존재가 신의 구원을 받아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존재로 결말짓는다. 아님, 초인의 형태를 강조하며 오직 강인하게 살 것을 부르짖는데 그 우매한 해석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렸을 때 유식한 체하느라 멋도 모르고 집어 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는 지루했다. 니체의 못생긴 얼굴만 아른거릴 뿐 재미도 없었고 길다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심정이 스펀지처럼 구멍 난 어느 날, 다시 집어 든 그의 일설은 여전히 둥그레진 사상을 사선방향으로 세차게 긋고 있었다. 동시에 감탄사를 연발할 만큼 현 사회의 실재까지 통찰력 있는 의지를 빗질하고 있었다. 니체를 자극시킨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는 많이 좋아했는데, 그녀가 낳은 사상과 감상의 아이들은 더없이 훌륭하다.

자라투스트라의 소리는 오랫동안 빈약한 아이들의 장난으로, 불모(不毛)한 정신의 변명으로 오해되어 왔다. 가끔 철부지 무신론자들에겐 신을 믿는 자들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 반박의 요기거리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한(恨)의 외침은 사랑에 대해 복수의 칼날을 날카롭게 들이댔지만 스스로의 심장을 한달음에 파괴하는 경이를 이루었으며 신과의 접촉에서 생긴 그림자의 환영에 시달리다 정신의 폭풍우에 흔들리는 생명을 잠재웠다. 고독한 산책자는 거대한 침묵에 전율했고 터질 듯한 가슴을 그대로 부여잡고 있지 않았다.


초인(超人)은 우주를 내다보는 자 앞에서 오만한 발언이다. 그러나 바위에 올라서 세상을 바라본 자에게 물살의 거친 파동이 어찌 느껴지지 않겠는가. 역시 허우적거리는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보단 한 단계 높은 계단에서 삶을 관조하는 방식이리라.

난 개인을 향해 훌륭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러나, 간혹 들먹이는 여성비판에 대한 거북한 심사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유려한 음성에는 뜨거운 애정을 보낸다. 일단, 자라투스트라의 목소리는 한껏 물오른 젊은 수소처럼 힘이 있다. 그 울림이 깊어 귀를 기울인다. 해사자와 먼 길을 떠난 자의 이야기가 동터오는 새벽에 울려 퍼진다. 자라투스트라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I.

사물을 포용하는 물 흐르는 영혼을 지닌 자에겐 오직 사물만이 지워질 뿐, 자아의 상실은 없다.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로, 아이로 되어갈 때 다가오는 변화에 기뻐하자. 낙타의 물통은 그대를 위한 물을 제공할 것이고, 사자의 자유롭게 들끓는 피는 너와 나조차 부정할 것이며, 철난 아이의 웃음은 유희의 진정한 욕구를 날갯짓하며 우리를 껴안을 것이다!


고뇌와 무능력조차 광란의 행복을 맞기 위한 서설이니 권력과 자랑에 짓밟혀 배후 세계의 가려진 심판자들은 통쾌히 웃지 않을 수 없다. 전쟁과 평화의 양 칼을 움켜쥔 목자이자 양 떼들이여! 나의 몰락은 이 생애에서 가장 진부한 봉사이며 배고픈 덕(德)의 비방이 되리라.


하지만 자신에 대해 한 번도 경멸해 보지 않은 자는 증오와 질투의 용사에게 굴복하고 말 것이며, 고귀한 복종에 시달려보지 않은 자는 나약한 반항에도 금세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시장(市場)의 독파리 떼를 감식할 능력이 없는 일개 배우들은 비난만을 웅성이지만, 저열한 소인배들을 통쾌히 비웃어 고독으로 숨는 것도 독침에 붓는 하루를 고요히 잠재우는 방편이 되리라.

 
면이 고르지 못한 불완전한 거울 앞에서 맑은 공기이자 빵이며 악인 친구만을 기다리는가. 이기(利己)도 못 챙기는 멍에를 안고 천 한 개의 목표를 되새기기보단 너의 가슴에서 한 명의 친구를 창조하여라. 요란한 풀무질에 지나지 않는 위대한 사상은 쓰이지 않는 장작불에서 화형 당할 물거품이다. 절뚝거리는 정의가 그대의 뒤를 따르게 군중의 환호를 떠나 눈물과 벗 삼아 홀로 있음이 어떠한가.


남자의 장난감이 되기도 하는 여자여! 남자를 발길질로 치대며 그대를 두려워하는 아이를 깨워라. 독사에 물려 잠든 녀석이 있으면 가끔은 채찍을 들고 때려도 좋다! 사랑의 쓴 잔을 쾌히 마시고 새로운 싹을 틔울 갈증과 동경을 말한다면 노쇠한 청춘은 시들어진 꽃다발을 목에 걸지 않을 것이고, 영혼의 꿀은 대지에 흘러넘쳐 황혼의 구름처럼 붉게 타오를 것이다.




II.

부인할 수 없는 너의 세상, 행복의 거품이 걷히면 절규를 지르던 기쁨은 넓은 바다를 건너 아군과 적을 동시에 맞는다. 늙고 사나운 지혜로 적들을 향해 창(槍)을 던지고, 부드러운 풀밭 위에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눕혀라. 뒤틀리는 독수리의 비상(飛翔)은 신의 고뇌에서 비롯되었으니 거짓 없는 현기증으로 상(像)을 부술 수밖에 없다. 작은 세균의 악행을 커다란 악행으로 키워가라는 속삭임엔 길 위의 핏자국이 도리질을 칠 것이다.


벌거벗은 초라함엔 자유의 벨 소리를 외치고 독거미의 복수엔 차라리 눈을 감아라. 너의 작은 돛단배는 격렬한 바다에서 굵게 부풀지만 황금 마구의 짐승들을 비웃는 노래를 부르리라. 밤의 영원한 샘물에서 갈망의 일식(日蝕)을 보는가. 굶주린 악(惡)을 폭포수처럼 흘려보내며 잠에서 네 영혼이 깨어나게 하라. 변덕스러운 물고기는 무덤의 섬에서 헤엄치겠지만 도취한 민중의 눈먼 투쟁에선 벗어나리라.


황소의 이완된 근육과 무장 해제된 의지를 일으켜 그 포만한 목덜미를 쓸어보아라. 지칠 줄 모르는 정신의 양말은 유독한 혼합주(混合酒)에 흠뻑 젖어도 몽상의 꼭두각시들을 허영의 바다에서 몰아내리라.

 
네 황혼이 슬픔 속에서 질식하지 않는다면 먼 밤을 비추는 빛이 될 것이다. 꼽추의 등에서 과감히 혹을 떼어내고 교만의 줄기조차 잘라낼 수 있으면 제거하여라. 적의(敵意)가 시간과 의지에 겹겹이 구름을 쌓겠지만 광기는 천형처럼 자라나 뜨거운 태양을 품을 것이다.




III.

섬 마루에서 바다를 굽어보는 자여! 가혹한 잠언은 고독한 이의 환상을 펼친다. 정복할 수 없는 심연의 용기는 너의 동정을 파괴하고 고통을 들쑤시며 길동무를 선사한다. 나무들이 기대선 행복의 섬에서 잘 자란 나무를 따로 뽑아 유연한 억셈으로 살아있는 등대가 되게 하라.


생매장한 의혹을 파헤치고 사상이 너를 물어뜯을 때까지 네 목구멍을 달구어라. 해뜨기 전에 격투자의 미로는 파란 종(鐘)과 영원의 보증을 하늘 가득 띄울 것이다. 진부한 중용(中庸)은 배가 불룩한 우상을 심술궂은 손님으로 맞이할지도 모른다.


동경에 가득 찬 무겁고 뜨거운 남풍이 따뜻한 바다를 지나갈 때, 입에서 거품을 무는 원숭이들은 거칠고 낯선 자의 정성 어린 초대도 거부한다. 한바탕 재치기를 한 영혼은 수퇘지들의 털을 날리고 행복의 콧구멍으로 산의 자유를 호흡한다. 은밀한 재단에서 피를 흘렸던 낡은 제물을 불에 태우고 경건한 자들의 목록표까지 파괴해 버려라.


세계를 비방하는 자들에게서 단념하는 방식을,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서 관통하는 자유를 마셔 봄이 어떠한가. 역류하는 영혼이 기생자들까지 말끔히 처단할 때 가장 선하고 의로운 자들도 고개 돌릴 것이며,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네 친구들까지 똑바로 일어서게 될 것이다.


천년의 세월이 금속보다 단단한 숙명과, 생성의 거대한 년(年)이 굳게 얽힌 매듭을, 한가로이 풀어헤칠 때 너는 순식간에 무(無)로 화했다가 만물의 영원한 회귀 속에 깊이 잠들 것이다. 텅 빈 너의 영혼은 우롱하는 박쥐와 올빼미의 사악한 눈초리에도 죄의 교살자(絞殺者)들을 쉽사리 내주지 않을 것이며 서늘한 저녁이 퍼지는 초원에서 삶과 함께 얼싸안고 울 것이다.


사랑을 끼우던 영원의 반지,
회귀의 순환을 꿈꾸는 희망,
필연이 춤추는 별들의 윤무,
선악이 혼합된 최후의 거품,
시공을 떠도는 무한한 표호,
악덕이 소멸된 황홀한 웃음,
자유가 노니는 새들의 지혜,


사랑하는 그대여, 너의 일곱 가지 봉인은 과연 깨질 것인가!




IV.

익살의 광대는 떠다니는 달콤한 즙과 수액에 입맛을 다신다. 그대는 시야를 돌려 황금 낚싯대를 바다에 걸쳐놓고 인간이라는 가장 기묘한 물고기를 낚는다. 째깍거리는 검은 고통의 배(腹)를 열어 재앙의 파도를 너의 식탁에 올려놓고 한 입 달라고 추근거리는 개들에게 차디찬 서릿발의 화살을 깊숙하게 찔러라.

 
사악한 마술을 부리는 질투 많은 형리(刑吏)는 거짓된 기술로 너의 배를 들쑤시는 멋진 오락기라 불러보자. 모든 분노와 격앙과 증오를 거부하는 채식자의 위장은 꿀만을 얻어먹으려 손 벌리겠지. 그러나 그들은 벌집 속에 들어있는 가시 달린, 얼음처럼 차가운 황금 꿀도 먹어봐야 한다.


지쳐버린 오만한 가슴, 질주하는 나룻배는 좋은 바람에 쓸려갈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부러진 척추에 연약한 날개로 고향을 찾아 헤매는 가엾은 여행자, 지쳐버린 나비여! 가장 사소하고 가장 부드럽고 가장 가볍고 가장 작은 움직임에 귀를 기울여라. 네 피 끓는 심장이 눈의 깜박임 같은 호흡으로 최고의 행복에 전율함을, 바위 위에 깨지고 사슴뿔에 찔려 황금빛 둥근 공이 되어감을, 맑고 두려운 정오의 심연은 저리도 기쁘게 보고 있지 않은가!


교활한 생의 유혹이 그대를 우울과 절망에 밀어 넣는다고 해서 희망을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병들고 가냘픈 다리(橋)는 그대가 더 높이 올라가는 진리의 층계가 될 것이다. 유쾌하고 쾌활한 사자(死者)들의 만찬을 위해 사소한 덕을 씹어먹을 것이다. 번개에 닿을 만큼 높이 동경을 쏘아 올려 구름처럼 군집한 몽매의 말들을 채찍질할 것이다.


지옥의 문지기 개가 입을 크게 벌릴 때 산 위의 동굴에 부는 바람처럼 날쌔게 행동하라! 미친 듯이 웃고선 자유분방한 폭풍의 정신에 몸을 싣고 음침한 고뇌를 저주하는 얄팍한 당나귀들에게, 아프리카 바람(風)의 장엄한 사막을 숨긴다고 조롱하는 왕들에게, 죽어가는 행복의 향기를 노래하라.

 
세상은 깊다, 낮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다고! 깊은 한밤 중에 되새김하는 기쁨은 마음의 고뇌보다 더욱더 깊다고! 무덤가에서 흘리는 눈물의 위안은 불구자가 된 세계를 금빛으로 물들인다고! 심오한 낮도 동굴에서 눈을 감을 때 부드러운 갈기를 자랑하던 사자는 손에 떨어지는 눈물을 핥으며 울부짖는다.

 
측정할 수 없는 시간에 솟아버린 위대한 정오는 이글거리는 아침 해로 떠오른다. 그땐 떠나도 좋네, 나의 영원한 친구여!


2004. 12. 15. 06:05: 59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읽었는데, 갖고 있는 서적엔 당시 니체의 독일식 발음 때문에 '짜라투스트라'로 쓰여있었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는 마즈다교(Mazdaism), 한자로 배화교(拜火敎)이며, 이란의 민족종교로, 선악이원론을 특징으로 하는 이란계 단일신교이다. 사막의 낙타를 잘 다루는 사람을 뜻하는 조로아스터 (Zoroaster, Zōroastrēs)가 창립한 종교로써, 조로아스터는 고대 페르시아어인 아베스타어발음으로는 '자라투스트라(Zarathushtra, Zaraϑuštra, Zartošt)'라고 한다.


아직까지 기독교 사상이 팽배한 사회에서 단순히 종교적 관점으로 이 글을 바라본다면 자라투스트라는 철학사상 중에서 이렇게 인기 있기는 어려울 것 같다. 뒷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가 쓴 글로 생각하며 그저 좋다고 추종할지도 모른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가 기독교 세계관이 상징하는 선악의 이원론보다 더 먼저 이분법적인 사고관을 제시했다고 생각하고, 당시 기독교 사회의 모순과 민주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윤리적인 오류를 사막 유목민의 수장인 자라투스트라의 목소리로 비판하였다. 강인한 실존주의 철학으로서 자율적인 도덕과 초인의 사상으로 세상의 어긋남을 극복하고자 한 철학자의 고독한 내면은 깊은 밤의 수면까지 몰아낸다.

 

자라투스트라의 음성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당시 그의 말을 적으며 다짐했다. 거친 사막에서의 모래알처럼 일어날 거라고 말이다. 저항적인 울분으로 귀를 씻고 눈을 씻고 마음을 씻고 머리를 씻었다. 자라투스트라는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던 이야기였다. 지금 보니 그렇다. 새벽까지 한번 나를 돌아보고 밝은 날에 크게 꺾인 들 어떠한가. 불의에 굴하지 않고 맑은 영혼으로 다시 일어나면 된다.





모래와 사막. 닭과 달걀. 끝나지 않은 순서
[Sand and Desert. Chicken and Egg. The Endless Sequence] 2004. 8. 19 NOTEPAD MEMENTO SKETCH by CHRIS


단 한 알의 모래 알갱이는 하나의 사막.
그리고 하나의 사막은 한 알의 모래.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모래가 먼저였을까. 사막이 먼저였을까.

오랫동안 물어왔던 질문들.
그 끝나지 않은 순서.

모래알 물거품이 속삭인다.
진실한 삶은 네 존재 안에 있다고.


Sand grains, each one, a desert.

And a desert, formed by each sand grain.


Which came first, the chicken or the egg?

Which came first, the sand or the desert?


Questions asked for ages,

The endless sequence.


The foam of sand grains whispers,

True life resides within you.


2004. 8. 19. THUR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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