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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10. 2024

FLUXUS, VIDEOART = Vide-Oh-Art

예술의 지속성과 기술과의 혼재

[MORE LOG IN, LESS LOGGING, PAIK NAM-JUNE ] IMPERIAL PALACE SEOUL 2019. 09. 25. PHOTOGRAPH by CHRIS


플럭서스(FLUXUS).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와 백남준, 오노 요코(小野洋子). 플럭서스 운동의 리듬은 불협화음을 화음이라고 말하는 고집 센 작가들의 억지주장처럼 들리기도 한다. 얼굴에 비닐을 씌우고 숨 고르기 조절을 하는 행위를 획일화로 몰아가는 대중적 관념에 도전한다는 의미와 명상의 길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모습이라고 어느 누군가 주제의식을 덧붙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현실에 고정된 사물이거나 단순히 지나가는 해프닝이 아니라, 순간을 멈춰버린 예술이라는 설명적인 성격의 플럭서스는 공공문화의 하수구에서 반짝하고 솟아오른 물줄기처럼 거친 획을 그었다. 플럭서스는 골동품처럼 수집가치를 갖거나 재산으로 거래되거나 미적으로 감상될 제반 요건을 거부하고자 한, 행동적인 철학의 성격을 지닌 저항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전시를 냉대하던 미술관들이 회화를 이층으로 옮기고 화려한 주빈석에 증명사진을 올려놓는 현재, 개성적인 얼굴의 백남준을 만났다. 한때 그를 재능보다는 열정이 과도한, 운이 좋고 혜택 받은 인간이라고 친구들과 쑥덕이곤 했다. 세계 도처에서 그를 만날 곳이 많아졌다는 사실은 그의 자리가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라는 것인데, 세월이란 이렇게 모진 비바람에 치대던 삶의 귀퉁이에서 냉연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중심부로 우리를 이끈다. 치열해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으련만 그는 이 자리에 없다.


 <백남준과 죽음이라는 비움 앞에서의 2006년 2월 단상>



2006년 어느 봄날의 파문. 서울시립미술관에 팔린 자신의 작품이 선전용으로 바뀐 것을 확인한 순간, 백남준이라면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자신의 작품에 똑같이 적용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유라는 주장은 치졸한 변명이다. 변화는 정지보다, 파괴는 보존보다 힘이 덜 든다. 단순해지는 과정? 원본의 의미가 부서져야만 눈에 띄는 보존상실의 예술세계는 점차 남아날 것이 없다.


2006. 5. 4. THURSDAY




[白南準 & VIDEO ART] 2006. 5. 4. PHOTOSHOP MIXTURE IMAGES by CHRIS


백남준이 사라진 세상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작업들은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공항 로비에서, 호텔 로비에서, 대기업 사옥 안에서, 복합쇼핑몰에서, 비를 맞지 않고 전기를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그의 작품은 물건이 거래되듯이 공공설치물로서의 값어치를 지닌다. 그러나 전기를 공급해야만 지속될 수 있는 비디오 아트(VIDEO ART)는 이미 비디오테이프가 사라진 세상이 도래했듯이, 전기공급이 끊기거나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식이 송출의 방향을 달리하거나 기계가 고장나거나 콘텐츠를 만든 이가 사라지면, 지속적인 보수가 불가능하며 새로운 창조나 변형이 어려울 뿐더러 원래 제작된 의미가 상실될 위험이 있다.


텔레비전과 기술적 매체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한 백남준의 작품을 보면서, 언젠가부터 비싸진 예술적 도구들을 발견했다. 돈이 넘쳐나는 억만장자가 회전하는 자가용 비행기 프로펠러 앞에서 물감을 뿌려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처럼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을 시도한다던지,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가 1억 달러에 팔았다고 속인 인간두개골에 8600개 다이아몬드를 박은 <신의 사랑을 위하여 For the Love of God>처럼 신에게 버림받고 미술관 창고에 보관된 작품들도 부지기수이다.


백남준 또한 비디오세대의 현실을 표현한 작품으로 인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가 선택한 전기제품은 당시 일반 미술가들이 사용하기엔 비싼 표현의 소재였다. 가끔 소재의 고급화가 화면의 고급화 또한 이루어내는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백남준이 실행한 현대미술계에서의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 개척에 따라 그의 후예들이 만들어내는 아류작들도 많다. 다만 보다 보면 일반 비디오 창작물과 다름이 없어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또한, 과연 이 표현들이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대변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게 의미로움이 사라지곤 한다. 자칫하면 비디오 아트는 전기공급이 끊긴 깡통로봇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

   

지금은 잠시 휴관한 호텔 로비에서 코로나 이전, 백남준의 비디오작업물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꺼져버린 몇몇 화면을 보면서 작가의 설치물이 지속성을 상실한 요소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본래의 작품과 같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가 묻게 되었다. 순수 예술은 점차 사라져 가고, 예술 또한 기술에 의지해가고 있다. 본래 예술(ART)은 기술(TECHNIQUE)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정말 기술이 예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면 예술과 기술의 혼재는 우리에게 아트의 새로운 정의를 가지고 올 지도 모르겠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며칠 전 포스코에 설치된 백남준의 TV깔대기와 나무 264개를 껐다는 뉴스를 보고 "어 이건 뭐지?" 어이가 없었다. 2006년 봄날의 파문이 다시 들쑤셔진 느낌이었다. 전기를 아끼는 관점이 공공연하게 생성되었다면, 비디오아트를 하면 안되는 것이고, 비디오아트는 문제가 있는 것이며, 비디오아트를 매입하는 것은 멍청한 투자이다. 바보같은 이야기들을 보다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아트는 무슨? 낭비로운 예술이다.   

2013. 6. 25. TUES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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