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Nov 26. 2024

ON TRAGIC ART

《비극적 예술에 관하여, 프리드리히 실러》 시간의 마술

[Inferno, Franz von Stuck. 1908]


 "슬프고, 끔찍하고, 심지어 무서운 것들까지도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반적 현상이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된다. <......> 처형장으로 향하는 죄수에게 얼마나 많은 군중이 동반되는가! 현상을 설명할 있는 것은 정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쾌감도 아니요, 복수를 갈망하며 피를 바라는 비열한 취향도 아니다. 비참한 죄수는 심지어 구경꾼들에게 용서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그의 구원을 위해 진실한 연민이 발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경꾼들을 움직이는 것은 어느 정도는 그의 고통의 표현을 보고 듣고자 하는 호기심 어린 열망이다. 그러나 교양 있고 기품 있는 감정을 소유한 자의 경우는 예외인데, 이유는 그에게 이런 본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본능이 슬픔 가득한 동정의 힘에 지배되거나 혹은 예의범절에 의해 억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성의 천박한 이들, 뭔가 점잖은 감상으로 억제되지 않았을 그것은 염치없이 스스로를 강력한 충동에 내어 준다. 그러므로 그것의 바탕은 인간 영혼의 자연적 성향 속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비극적 예술에 관하여, 프리드리히 실러 On Tragic Art | Über die tragische Kunst, 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92

 


 끔찍한 것의 매력은 확실히 인간의 감성을 광기 어리게 만든다. 비극(Tragedy, 悲劇)은 왜 기억에 오래 남을까? 비극적 사건, 비극적 창작, 비극적 연출, 비극적 요소, 비극적 성질은 인간의 뇌리에 기쁜 것보다, 즐거운 것보다, 행복한 것보다 그 기억을 오래 남긴다. 비극의 시차는 시간의 마술을 담고 있다. 상처는 이야깃거리를 생기게 한다. 인간들은 끔찍하고, 아프고, 눈물을 흘리고, 불행 속에 허우적거리고, 비참함 속에서 울부짖는다. 서럽고 딱하고 아쉽고 안타까운 말들 속에서 애잔함과 눈물겨운 슬픔이 비가 되어 내린다.


 불행은 어떤 이름일까? 가시밭길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한 사람의 모질고 뼈저리게 찢어지는 가난과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버거운 구렁텅이 속에서 가슴을 휘몰아치는 날벼락같은 소식은 소름 끼치게 먹구름을 몰고 온다. 잔인함에 불타는 타인의 성향이 취향이 아니어도 서로의 엇갈린 기대와 비극적인 분위기 또한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을 수 있다. 사방이 잠잠해질 때면 과거로 돌아가는 수레바퀴에 앉아 지난 회상과 섞여버린 시간을 보면서 송곳처럼 솟아오른 초침을 본다. 깊은 망각에 젖은 눈을 뜨고서 간헐적으로 이전의 나에게 말을 건다. 나는 밤거리를 걸으면서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에 안정을 느끼다가 그곳이 완전히 나의 공간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하였고 오늘이 넘어가면 내일이 시작된다는 것을 이기려는 듯이 항상 자정을 넘기고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시간에 걸터앉아 있다. 오늘은 내일이 아니고 또한 어제도 아닌 거야. 이 세상에 완전한 나의 것이 있던가. 하물며 시간이라면 더욱더 누구의 것도 될 수 없겠다."

  

 거울을 보면 흘러간 세월이 보인다. 속 안의 생각들은 시간을 뛰어다니고 거스르며 이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표면은 팽팽하게 생기를 담고 있던 수분이 빠져버렸다. 악에 치받힌 마음들이 완전히 악으로 변했다면 살아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미움들과 슬픔들과 아픔들과 고통들과 눈물들과 분노들과 역함들과 소름들과 죽음들과 헛된 잔상들까지 하나씩 놓아주고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들이 삶을 나누고 부딪혔던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아갈 때 얽힌 감정의 덩굴을 놓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들의 어긋난 행동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이렇게 팔딱거리며, 이렇게 냉소적이며, 이렇게 차갑게, 이렇게 이중적인 비웃음과, 이렇게 음울한 내면과, 이렇게 날카로운 시선과, 이렇게 조용한 얼굴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화면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는 얼굴이 어색했다. 비록 예전보다는 아름답지 않지만, 그렇게 예전보다는 반짝거리지 않지만, 더 이상 예전보다는 싱그럽지 않지만, 그래도 충분히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나를 관찰할 수 있다니 많은 이들이 미래를 걱정하는 디지털 매체에도 감사해야 할까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