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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y 17. 2024

THOMAS MANN | MORTE A VENEZIA

토마스 만 | 에로스와 타나토스 샐러드 속의 미학(美學)

[MORTE A VENEZIA, THOMAS MANN by LUCHINO VISCONTI] 1971. MOVIE POSTER



모래시계의 끝은

비우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알 수가 있다.

끊임없이 흐르는 데도 정작, 보이지 않는 시간.

마지막 모래 한 줌이 흘러

텅 빈 공간을 드러낼 때,

처음의 의미를 되새기는 화살이 마지막을 관통한다.


시간의 통로를 걷고 있는 우리들은 어리석게도

유리병을 채운 입자들이 한 공간에 엉켜있을 적에는

흘러가는 시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다.

오직 한 순간, 자아를 모두 비울 때만이

가시적인 죽음을 목격함과 동시에 존재의 공허를 인식한다.


지금 지워야 할 것이 많다면

자신을 닮은 것들에 총구를 겨눠야 한다.

아니면, 늙어버린 오늘이

차오르는 내일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이 세상의 가장 열정적인 아름다움에 대하여 敬拜.


누군가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말했다.

보이는 것이라서 내 것이고

보이지 않아서 내 것이 아니라면

보이는 이 몸만이 나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은 내가 아닌가.

빽빽하게 들어앉은 구름 저편,

언제나 태양은 빛나고 있건만

오늘은 햇살이 보이지 않는다고 푸념하였다.


2006. 10. 26. SUNDAY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 di Modrone) 감독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Morte a Venezia 1971 | 영(英): 베니스에서의 죽음 Death in Venice>은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을 각색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합작 영화이다. 소설가 구스타프 폰 아셴바흐(Gustav von Aschenbach)가 작곡가로 변해서 어느 여인보다 아름다운 타지오(Tadzio)에게 빠져드는 이야기는 미를 추구하는 예술적인 동기와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 어릴 적의 순수와 맞닿아 있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교향곡 제5번 4악장이 흐르는 가운데, 말러의 자의식이자 토마스 만의 본능, 괴테의 영감과도 같은 자기애의 우물은 의식을 돌아다닌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예술가들과 정치가들이 동성애에 빠져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같은 성(性)에게로의 몰입은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역행으로 보인다. 나 또한 육체가 남성이었다면 세상의 시각과 부합되지 않는 사랑에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THOMAS MANN | LOVE AND DEATH
- EROS AND THANATOS SALAD -
토마스 만 | 에로스와 타나토스 샐러드


1. 트리스탄(Tristan)


표현의 종말은 죽음과 일치하는가? 나는 반대로 보고 있다. 죽음을 전제로 반영된 거울 스크립트는 시한부 운명의 임산부처럼 생명을 보호하고자 흑마술을 사용한다. 허름한 욕망이 활발하게 식사를 하며 움직인다. 나의 얼굴 반쪽이 까르르 웃는다. 그것만큼 징그러운 시각적인 활동이 어디 있을까? 뒤뜰에 살고 있는 여자, 슬프도록 폐허가 되어버린 그늘에서 자란 이끼. 소중한 옛 추억은 야생에서 뛰어놀다가 관습의 정원에 가둬지고 머릿속에 압축된 쇼팽의 야상곡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한 소설가의 부추김으로 인해 피아노 건반을 뚫고 나온다. 이미지에 묶인 욕망의 석상은 영상으로 각인되는 감성이 하나의 머리채로 통제되는 날까지 타오를 것이다. 난 내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나?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를 떠올리게 하는 토마스 만(Thomas Mann)의 트리스탄 Tristan에서는 토마스 만의 전신이라고 부를 소설가가 등장한다. 희극적인 인생 말로를 예견하고, 이루지 못할 사랑의 슬픔을 애도하는 죽음의 접점에서 연인들의 운명은 거의 비슷하다. 설사 다르다 해도 마지막은 같은 길을 걷는다. 때문에, 사랑의 결말은 비극이어야 현실적일 거라고 난 착각한다. 행복함은 과정에서 녹은 걸로 충분하다. 한밤중 촛농처럼 삭는 환자들과 달리, 생생하게 웃음 짓는 아이들은 식욕을 일으키고 비만한 위장(胃)을 길러낸다. 뒤뚱뒤뚱 버거운 몸을 뒤틀어 예술품을 향해 살찐 손을 편다. 이런, 사람들은 작가의 피땀 어린 결과물보다는 오동통한 다섯 손가락에 대해 수다를 늘어놓고 말 거야.


“이 작품은 말이죠.”


인생은 우스운 것이다. 각자가 생산한 것에서 양심이라는 덩어리를 만져보는 기회는 적고 그다지 특별하지 않음에도,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포장하는 물건은 만족을 모르도록 감각을 짜고 주물러 댄다. 현실적인 모양새로 구현되는 인상의 황홀함을 겪으며 실성한 마음은 공상 안에서 오래도록 머문다. 난 굉장한 것에 빠져들었고 사랑과 비슷한 열정을 누리고 있다고. 그리하여 주조된 망각ㅡ 우리의 생활은 얼마나 다양하게 보이는가? 하지만 그 본질은 얼마나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대낮에 발견하는 인생의 허위에 숨 막혀하면서도, 감미로운 밤엔 광란을 쫓아 폭풍으로 뛰어드는 너와 나, ‘더 이상 트리스탄도 아니고 이졸데도 아니지만’, 더없이 멋있는 ‘사랑의 죽음’을 치면서 얼음조각과 모르핀으로 잠재운 각혈을 마구 쏟아낼 것이다. 사물에게 새로운 이름을 선사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사회에 몰입한 신경을 파멸시키고 불안한 꿈에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를 해방시키며.


태양이 가리어지면 인간은 내성적이 되어간다고 한다.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나는 무척 감성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억지로 걸을 필요도 없었다. 짧은 대화를 유도하는 전화벨에 잠시 넋을 놓기도 했다. 헛된 희망이나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아이들의 장미빛깔 잇몸이 웃는다.




2. 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


"행복이란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의 대상에 조금이라도 기만적이나마 접근할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토니오 크뢰거 Tonio Kröger


예전부터 난 토니오 크뢰거 같은 남자가 좋았다. 날카로운 갈색 윤곽에 꿈꾸는 눈을 빛내는, 다소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이 움직인다. 잘생긴 급우를 쫓아다닌다고 해도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돈 카를로스 Don Carlos를 내밀면서 문학에 빠져든 속눈썹을 깜빡여준다면 나는 놀란 토끼처럼 귀를 쫑긋거리겠지.


"잠이 와도 춤을 출 거야."


예술적 감성이 남달리 뛰어나고, 관능을 혐오하면서도 동경하는 이율배반적 얼굴을 하고 있다면 사기꾼 기질이 가만히 있겠는가? 근성이라 불리는 작가적인 야심이 ‘점잖지 못하게’ 근질거리고 보헤미안의 속삭임은 평범함 속에서 지속되리라. 저주라고 불리는 문학적인 감성은 일상 속에서 발휘될 때, 둔하지만 따뜻하게 느껴진다. 매상 회의적인 얼굴로 의견에 대하여 유보하는 바보들 중의 바보가 초조한 미덕을 거부하고 북구로 여행하였다. 우울함과 시에서 허우적거리고 고독하다고 우는 한 왕에 매료된 크뢰거는 유쾌하고 질서 정연한 태도로 세상사람의 사랑을 받는 친구를 부럽게 바라봤다. 사람들의 내면을 찢으면, 과연 젤리처럼 냉동된 감성을 목격하게 될까? 나는 궁금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책을 놓은 몇 해 뒤에도 여전히 말랑말랑하게 유지되고 있다.




3. 베네치아에서의 죽음(Der Tod in Venedig)


구스타프 아셴바흐(Gustav von Aschenbach)의 정신엔 고대 그리스에서 옹호된, 동성애를 그리던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 무엇도 그의 날아오르는 펜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불만은 멍청하게 주저하고 만다.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며 살아있는 대상에 가졌던 불순한 감정이 정화되는 것처럼, 소년을 만난 위대한 작가는 가련한 인간으로 변해간다. 사랑을 느끼는 사람의 고독은 몽롱하고 절실하던가?  


"고독은 독창적인 것, 이상하고도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을, 또는 시를 성숙시킨다. 고독은 또한 도착된 것, 균형이 안 잡힌 것, 어리석은 것, 그런 것들도 성숙시킨다."


고독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으로 촉발된 고독이라면 휴식을 갈망하는 예술가의 충동을 더욱더 완전하게 만들어주겠지. 나의 눈길은 끈적거리는 더위와 함께 못생긴 소크라테스(Socrates)와 아름다운 파이돈(Phaedo)을 지나가버렸다. 눈으로 드러나면 혼란스러울 진리와 이성은 단 하나의 가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길 떠나기를 포기하였고, 사랑하는 사람은 가슴이 아프나 신을 안았기에, 교활한 쾌락에서 동경을 키워냈다.


한때, 정열이 사라진 사랑에 대해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곤 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그렇다. 안정된 질서에 적응하고 있는 인간의 생활에서 사회복지를 망치는 정열은 반드시 식어야 한다. 희극배우의 가면을 쓰고 정숙한 놀음에 장단 치며 이렇게 밋밋한 생활이 매우 즐겁다고 말해야 조금이나마 정상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취급되는 사회에서 멍청이가 되기는 싫다.


아열대 기후로 접어드는 한국에 콜레라가 덮치면 혈관으로 떨어지는 약물에 지탱하며 살아갈 사람들 속에서 분리되고 싶다. 이젠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마음에 들기 불가능하다고 불안해하지도 않는데 식욕이 사라진 입에 썩은 고기를 들이부을 필요는 없겠지. 타나토스의 방문을 받으며 에로스를 끊임없이 그리던 사람에게 드리운 마지막 영혼의 그림자, 쇠약한 육신은 모래 위로 흩어지고, 가벼운 죽음의 윙크를 받은 젊은이가 모래사장을 걷는다.


영원하리라, 당신의 죽음과 사랑은.




4. 마리오와 마술사(Mario and the Magician)


TV에서 여름 해수욕장을 보고 구역질을 할 뻔했다. 쓰레기 천지로 변해버린 하수구에서 무슨 한적함을 누리겠는가. 소란한 바캉스는 비워야 할 속을 욕기로 채워 넣고 만다. 해변에 튜브를 가지고 노는 아이들만이 그들의 세계로 뭉쳐있는 의연함을 지닌다. 어른들에게 존재할 수 없는 자유의 선동. 그 기묘한 가슴을 우롱하는 자는 최면술사이자 요술가인 카발리에레 치폴라 밖에 없다. 빠른 걸음에 탄탄한 정력을 싣고 거만한 검열을 교묘하게 쑤셔대는 빈틈없는 인간 말종. 세련된 문장이나 품위 있고 능란한 말로 상대방에게 인상을 남기려고 애쓰지 않는 독특한 모습. 그러나 위망한 혓바닥은 기초교육 실패에 대한 적대심으로 관객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 애국심과 신경질적인 오만을 문맹의 잔존을 농락하는 카드요술에 녹여버린다. 의지상실과 의지 강요의 실험 속에서 관객은 기술보다는 카리스마가 강한 성격과 성긴 말채찍에 동요되어 간다.


"어떤 행동에 대한 의지를 갖지 않고 타인의 요구대로 행동하는 자유와 이념은 질식해 버린 것."


누가 그러했더라? 마리오. 원시적인 우울함을 지닌 스무 살 청년.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을 떠올리게 하는 여행의 추억처럼 꿈꾸듯 멍청하고 얼빠진 모습을 곧잘 짓던 인간적인 그였는데, 진실한 사랑을 하룻밤 먹이로 삼은 마술사에게 행복을 빼앗기고 환영에서 놀아난 이가 정신을 차리면 총신의 파국이 무대를 뒤엎는다. 사태를 냉정하게 보는 건 아이들 뿐.


“저게 끝인가요?”




5. 루이스 헨(Luischen)


외도는 고전적인 소재이다. 젊고 매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부인과 야수처럼 못생기고 뚱뚱하지만 돈 많은 남편이 있다. 여자의 가녀린 이성이 멍청한 남편을 떠받들 수 있을까? 겸손하고 불안한 사랑은 개인적으로 그다지 믿음직하지 못하다. 날씬한 몸매에 재미있는 곡을 들려주는 음악가가 있는데 그 소박한 천직의 예술가와 우둔한 여편네 사이에선 불의의 애정이 불탄다. 아주 독특하고 매우 극적인 장난, 그 소리는 과연 어디에서 튀어나올까? 인기 있는 프로라는 건 PD의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배우가 희극적인 소질이 없어도, 모두를 희극적인 대상으로 만드는 작업이 성공한다면 갖다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잔치의 텁텁한 냄새는 요즘엔 드라이아이스 관에서 뿜어 나오지만 예전에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즐거움 속에 슬픈 얼굴을 조아리며 숨어있었다. 절망적이고 명랑한 루이스 헨, 추하고 경박한 구절을 노래하며 비천하게 타락해 버린 변호사는 자기 자신을 한마디도 변호할 수 없는 지경으로 나동그라진다. 죽음. 배반. 치욕. 사랑. 무엇이 가장 먼저 일어났는가.


2005. 8. 4. THURSDAY




에로스와 타나토스 속의 미학(美學)

영화와 소설의 감도(感度 Sensibility)는 새로운 목소리를 갈아타고서 감미로운 촉감으로 다가온다. 소설은 조금 더 구체적인 의식으로 상상을 자극하고, 영화는 시각적이면서 청각적인 감각이 발휘되면서 의식 안으로 휩싸인다. 둘 다 매력이 있다. 소설가적인 상상력으로 카메라를 드는 감독은 시적이다.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Morte a Venezia>에서 나오는 비에른 안드레센(Björn Johan Andrésen)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The Most Beautiful Boy in the World)의 명성에 걸맞은 중성적인 싱그러움과 미모를 자랑한다. 중고등학교 때 자주 다니던 만화방에서 보게 된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의 순정만화 《베르사유의 장미(ベルサイユ のばら:The Rose of Versailles》와 오르페우스의 창 : (舊) 올훼스의 창 The Window of Orpheus: オルフェウス の窓》의 주인공은 비에른 안드레센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 사실은 여자였으나 남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남장여자의 캐릭터는 매혹적이었다. 선머슴처럼 살았던 나에게 내 안의 자아와 겹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알려주었다.


《베르사유의 장미》의 오스칼과  《올훼스의 창》의 유리우스는 각각 프랑스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휩쓸린 격정적인 시대의 인물이었다. 픽션이긴 하지만 가장무도회처럼 남성으로의 옷을 갈아입은 그녀들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극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내뿜는다. 한편으론, 순정적인 심장을 가진 남성 캐릭터인 앙드레, 이자크와 클라우스까지 그녀들과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은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이상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생물학적인 성(性)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면을 쓴 제2의 성(性)으로 살아가는 설정은 현실에서 가능할 것처럼 보였고, 심드렁했던 삶에서 자극점을 가져다주었다.



토마스 만은 그의 소설에 드러난 동성애적 이상향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으나, 그의 사후 성적 방향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만연체로 휘몰아치는 의식의 전개는 다양하게 문맥의 의미에 다중의 해석장치를 제공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작가들과 예술가들이 이성만이 아니라, 양성과 동성의 사랑에서 방황을 했다. 행위적인 시각의 배반과 사회가 추구하는 예의의 정갈함에서 본다면 이들의 내적혼란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의 모습은 꼭 육체를 공유하는 성적인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플라톤(Plato)의 연애관이 담긴 향연 饗宴Symposion | Συμπόσιον》에서 제시한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의 형태로 본다면, 인간에게서 과거로의 회귀나 사랑에 대한 갈구는 자신을 찾는 작업일 수도 있다. 첫 단계로 인간은 불사(不死)를 이룰 수 없는 육체적인 한계로 인해, 육체적인 사랑(EROS)을 통해 생명을 낳는다. 두 번째 단계로 진화한 인간은 육체보다 더 영속적인 정신적인 아름다움(美)을 추구하며, 정신이 담긴 바다(Sea-Universe) 속 의식의 세계에서 자신만의 사상과 철학을 생산하게 된다. 이는 인간에게 미와 추함을 넘어선 불변하는 개성적인 사상적인 관점과 굳어진 자신만의 이데아(Idea, 形相, Form)를 형성한다. 이를 플라톤은 에이도(Eido)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인(Idein)으로 표현하는데, 둘 다 어원의 의미는 '보다'라는 동사의 움직임에서 출발한다. 즉, 스스로의 세계를 명료하게 볼 수 있는 인간만이 최고의 사랑, 이데아(Idea)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피그말리온(Pygmalion)이 자신이 만든 석상 갈라테이아(Galatea)에 빠지는 것 또한 자신 속의 아름다움과 만나는 과정이며, 내부적으로 소망을 이루는 자기 암시의 효과와 일맥상통한다.


하나의 질료를 선택하여 형상을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는 스스로의 미(美)를 드러내는 과정이며, 이는 현실세계에서 글이나 그림, 노래, 조각, 영화 등 다양한 관찰의 형태로 보이게 된다. 고대사상가들이 바라보던 이데아를 위한 여정은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가들이 추구했던 미적인 태도의 종결점과 일치한다. 내부에 숨겨진 자신과 동일한, 혹은 젊은 자아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아름다운 여행으로 인식하는 이들은 외부적인 권력과 정신적인 힘을 갖출수록, 반대급부로는 육체가 쇠약해지고 수명이 다해갈수록 그 열망이 커져간다. 다만, 아름다움을 찾는 이와 아름다운 이의 호응의 문제는 부합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한마디로 보물을 찾는 자와 보물의 관계이자, 비밀을 찾는 자와 비밀의 문제인 것이다. 스스로의 미를 발견하는 예술가적인 시선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결국 내부를 볼 수 있는 시각적인 전환과 함께 이를 외부로 발현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인생의 고민점은 이런 사상적인 의식의 도출이 현실적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들과 결부되어 있었다. 적합한 의식의 탈출구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강박관념과 평탄하지 않은 삶의 현실적 제약이 파괴적인 내부와 유약한 신체와 함께 인식의 갈등을 불러왔다. 하나에 집중할 수 없는 현대사회의 돈에 집중된 경제적 관념과, 삶을 연명하는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실행으로의 매진 또한,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게 만들었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지점에 서서 타인과의 태도적인 규약을 어디까지 마무리지을지 생각하고 있다. 이제야 의식의 정리를 원하는 이유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기억의 쇠퇴 때문이다. 기억이 분명했던 어렸을 때보다는 현재의 시점은 개념을 이해함에 있어 연산이 빨라지긴 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잊고 기억하고 잊고 기억하는, 의식을 다지는 과정을 지속하면서 완벽을 향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맞는가 묻게 된다. 표현할 도구를 집어 들면 뭐라도 찍어 눌러야 하는 것이 신과 닮은 인간의 창조적인 본능이자 삶에서 주어진 과업이기 때문에 나만의 질료를 선택하기 이전에 창작을 대하는 의식의 태도를 정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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