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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l 06. 2024

CHRONICLES OF A TIME LOST

슬라보예 지젝 PANDEMIC! 2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PANDEMIC! 2: CHRONICLES OF A TIME LOST, Slavoj Žižek] PHOTOGRAPHY by CHRIS


 팬데믹(PANDEMIC)은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게 하는 시기였다. 몸이 정지되면 사유 또한 정지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두가 일시적으로 정지되는 이유로 인해 멈춰있던 사고의 톱니바퀴가 발동될 수도 있다. 팬데믹의 연대기는 세계보건기구(WHO)가 2020년 1월 30일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 (PHEIC)을 선포하고 2023년 5월 5일 코로나19(COVID-19) 팬데믹의 종식을 선언한 기간으로 본다. 팬데믹의 여파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고, 수십 년 이후로도 파급될 수 있으니 팬데믹의 전체 유효기간은 언급하지 않겠다.


 시각적인 현상과 자전적인 의식이 활동하는 세계에서 대중적인 담론을 실행하는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은 자기만의 이론을 정립하곤 한다. 지금까지 동서양 사상을 살펴보면서 평생을 추구해야 할 사상이라고 말하기엔 완전히 일치하는 부합지점을 가진 철학자들이나 종교사상의 논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상정립에 도움을 주거나 참조할 존재는 있었으나, 그들의 사유를 사랑한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다른 의미이다. 타인의 지적인 성찰을 애정한다고 해서 물처럼 흡수되어 동조를 하기엔 타자의 의견은 의식적인 메모로 남겨둘 수 있겠으나 정답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개별적인 인간은 사상적인 관념에서 균형적인 선을 완전하게 탈피해야 자신만입지를 세울 있기에 논리적인 구조의 피타고라스 정의는 사회라는 유기적인 공간에서 절대성을 발휘하기 어렵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PANDEMIC! 2: CHRONICLES OF A TIME LOST》는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시작점에서 중간지점에 못 미친 시간까지의 분석이다. 팬데믹의 종결점이 아닌 문이 열린 상태에서 서구사회를 사로잡고 있던 광포한 억압과 광기의 폭동에 대한 그의 의견을 정리해 본다. 팬데믹의 소요(騷擾)의 한가운데가 아닌 포스트 팬데믹 시점으로 동일한 경험을 다른 대륙에서 거쳤던 존재로서 과거의 혼동을 바라보는 것은 어지러운 사태에 휩쓸려있는 슬라보예 지젝보다 선험적인 예지를 가진 기분이 든다.

 


Predgovor  서문


사람은 허공에 속하지 않아

그래서 천상의 마왕이 바람을 통해 아들을 부르고

구름 속에서 합창이 내려와

작은 귀에 파고든다.

이리 와, 여기에 있어

네게 잘해줄게.

우리는 너의 형제야.

둔탁한 우르릉 소리가 밤새 흘러
인간 화물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
계속해서 파멸 속으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해.

[Dalai Lama, Rammstein]


 독일 헤비메탈 밴드 '람슈테인'의 [달라이 라마]라는 노래를 들어 '팬데믹의 삶을 노래하자'는 슬라보예 지젝은 서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인해 우리가 삶의 우연성과 필멸성, 생물학적 한계를 배우게 된 지혜의 변곡점을 언급한다. 그는 원초적 자기 복제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바이러스의 증식과 자연에 속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자각을 통해 삶을 적극적인 의무로 인식하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 한다"는 노래 속 외침처럼 삶에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방탕한 삶이 부여한 죄의식에 몰입하거나 끊임없이 바이러스의 변이로 거듭되는 신경쇠약에서 벗어나야 하며, 존재의 놓인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정지된 운명인 팬데믹에 맞서 싸우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I. 팬데믹 시대의 증상들


1. Ena  왜 철학자에게 작물 수확에 관한 글을 쓰라고 하는가

 지젝은 첫 장에서 히치콕의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North by Northwest 1959>를 예시로 들며, 철학자가 작물수확에 대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사회를 설명한다. 독일의 북북서 지방의 마을 귀터슬에서 육가공 공장노동자 650명이 2020년 6월 중순 코로나 양성으로 인해 격리되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2020년 늦봄, 미국 남부 테네시주의 한 농장에서도 과일과 채소를 따던 노동자들은 모두 코로나 양성반응을 보이면서 격리되었다. 이들 역시 이민자인 저렴한 인력의 노동자들이었다. 팬데믹 당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 미국의 플로리다 등 대량의 곡물 수확은 방역조치로 인해 방치되었고, 곡물가격의 상승과 물류이동의 제한으로 인해 자본주의적인 물품의 순환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기본 방역인 마스크 또한, 아시아 국가들은 마스크 쓰는데 적극 동참했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선 마스크 탈착의 문제가 인간의 자유가 가장 중요하다는 자유지상주의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공리주의, 자연착취의 처벌이자 자연의 경고로 팬데믹을 바라보는 뉴에이지 심령주의사이로의 갈등으로 전이되었고, 따라서 위기를 바라보는 각자의 관점은 인간존재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켰다.



2. Dva  코로나 바이러스, 지구 온난화, 착취 : 동일한 투쟁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구온난화와 자연의 착취, 동일한 투쟁의 결과인가? 지젝은 "기후와 생태 위기는 오늘날의 정치와 경제 시스템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의 지적을 들어, 안데르센의 동화의 문장을 재차 언급한다. "임금님들은 벌거숭이다. 하나도 남김없이 벌거숭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그저 하나의 거대한 나체주의자 파티로 보인다"로 귀결되는 실행력이 부재한 사회적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의 대체성을 발견하는 데에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현재에 대한 성찰이 올라온다. 지젝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문제보다 더 심각할 수 있는 문제로, 동토의 나라인 러시아에서 오래된 폭염으로 인한 거대한 산불과 엄청난 원유유출, 나무를 갉아먹는 나방의 창궐이 발생했다는 것을 제기하면서, 오랫동안 얼어붙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영구동토층의 해빙으로 터져 나온 사실을 상기시킨다.



3. Tri  동상파괴는 왜 급진적이지 않는가

 코로나는 국민의료보장이나 국민기본소득보장과 같은 경제적인 방식에서 공산주의의 평등한 생활적 조치를 가지고 왔다. 동시에 팬데믹의 봉쇄는 자본의 흐름을 한쪽으로 쏠리게 하는 부의 불평등을 초래했다. 초우량기업에게 국가적인 수혜가 펼쳐진 메가톤급 긴급구제 이후, 무선 네트워크와 노트북의 사용으로 현실적 접촉을 최소화하고 수요와 공급을 개인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사회로 변하면서, 경제 소생과 생명의 구제 사이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의 형태를 띤 공산주의적 방식은 제거하기도 힘든 개개인의 생존적 자유를 선사하며 새로운 경제질서의 필요를 낳았다. 공리를 위해 가둬둔 개인의 사회적 거리 두기와 방역의 자유는 시대가 추구하는 사상적인 동상파괴를 부른다. 폭력적인 태도는 급진적이지 않다고 보는 지젝은 그 어떤 해방적 잠재력도 없는 맹목적 분노의 집단적인 폭발은 공권력이 내린 명령과 금지를 무시한다고 바라본다. 점증하는 폭력과 심화된 가난, 기근의 망령으로 핍박받는 나라들에 대한 우려는 팬데믹의 터널을 빠져나온 지금 어떤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가?


 이 글이 쓰인 2020년은 전문가들이 팬데믹 실체를 분석하기 시작하면서 그 여파에 대한 우려가 에볼라 바이러스보다 더 정점인 시기였고, 책이 발간된 2021년은 팬데믹에 숨 막혀하던 나날들이었다. 지젝은 팬데믹의 흔적 속에서 데카르트 (Rene Descartes)의 《방법서설 Discours de la méthode》이나 플라톤, 에피쿠로스, 칸트, 헤겔로 거슬러가는 과거의 성찰은 반페미니즘이나 반인종주의 차별의 모순적인 근간을 제시하긴 하지만 "현재와 정반대 되는 전통과 관습이 반드시 야만적이거나 미개하지 않으며 위대한 이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라고 본다. 책에서 인용된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검은 피부, 하얀 가면 Black Skin, White Masks》에서 "유색인인 나는 흑인의 사명은 없고 백인의 짐도 없다"라고 언급했듯이, 사회적 항의의 물결을 분석해 보면 억압받는 당사자들의 울분은 미약하고, 권력과 지위를 가진 계급들 중 죄의식이 강한 사람들이 자유의 논점을 인간적인 억압으로 선회하여 현재의 자유가 막힌 사태의 내용을 급진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즉, 현상의 본질과 현상을 이용한 폭동이나 시위는 다른 내용이며, 폭력적이고 급진적인 행위는 사상적인 관점을 이용하는 자들에 대해 왜곡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도 팬데믹 시기에 미투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이 강렬해졌고, 남녀 간의 성별갈등도 강해졌다. 정지된 행동을 부르는 죄의식과 그 안에 놓인 피해의식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의 모습으로 포장되면서 팬데믹에 놓인 인간의 억압된 양상과 흡사해진다. 자유는 각자의 책임에 대한 자각이 있고서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4. štiri 아버지······ 혹은 그보다 못한

 《셜록홈스의 회상록 The Memoirs of Sherlock Holmes 1894》에 나오는 단편 <실버 블레이즈 Silver Blaze>를 들어 벨라루스의 시위를 연상하는 지젝을 보면서 '재미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미디어 시대의 연상은 독자들과의 공감을 날카로운 철학에서 문학적인 시선으로 전환시킨다. 벨라루스의 괴팍한 권위주의 지도자 루카센코의 코로나 바이러스 위협에 대한 묵살은 새로운 키예프로 민스크를 선택했다. 서구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재합류를 원하는 따라잡기식의 벨라루스의 시위는 광폭한 자유주의적 횡포에 맞서는 안전한 보금자리를 제공한 루카센코를 처단했지만, 지젝은 이는 더 민족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루카센코를 맞아들일 수 있다고 예상한다. 지젝의 예감을 들으면서, 경제적으로 발달한 유럽연합(EU)과 군사적인 나토의 연대에 속하고자 과거 냉전시대 전략적 화해를 문서로써 동의한 동유럽식의 자유와 평화를 정치적으로 종결짓지 않은 채, 국가를 위한 경제적 선택이라는 임의성으로 파기해 버리고 서유럽식의 자유를 선택한 현(現) 우크라이나의 분쟁 또한 폐허만을 부른 전쟁의 종결 후에 자본주의와 권력의 맛을 보면서 국민의 안전보다는 불확실성에 몰두하는 정치적 성향의 코미디언 젤렌스키 지도부를 데리고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낳게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사유처럼 거대다수가 제거할 독재자가 사라진 현대 세계에서 미국의 민주당과 연대하는 유대계 금융자본(조지 소로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과 같이 보이지 않는 지배자를 파악하려는 움직임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아버지 혹은 그보다 못한 Le pere iy pire" 후예들의 말로를 기대하게 한다. 현재 인간 생활의 다양성 측면에 조언이 가능한 자는 위대한 과학자나 예술가, 혹은 생산적인 발명가가 아닌, 순환과 투기에 익숙한 워런 버핏 같은 금융자본가들과 거대 생산체제를 갖추고 돈을 까먹는 넷플릭스나 구글, 테슬라와 같은 기업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씁쓸하면서도 통쾌했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인식하고 있는 현재 경영인들과 자본가들조차, 풍선을 불기 시작하면 터지기까지 멈출 수 없는 모순에 잡혀있다. 스스로 바람을 부는 힘을 빼면 원래의 모습은 타인의 모습과 다름없을뿐더러 축 늘어진 모습이 기괴하기에 현재의 위치에서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도 어려운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의 변화와 안착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인류의 숙제가 되었다. 그저 기술이나 화폐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남고 살아갈 것인지 생태적인 고민에 부딪혔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5. Pet 사회적 거리 두기의 섹스

 '육체적 교합'보단 '섹스'라는 단어가 타인과 성을 나눈다는 말로 보편화된 현실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의 섹스>라는 주제는 호기심을 당긴다. 아일랜드의 보건서비스 집행국(Health Service Executive)은 코로나 바이러스 시국 때 안전한 섹스의 실행지침을 권고했다. 육체적이고 대면적인 상호접촉은 중단하고, 영상을 통한 데이트, 문자를 이용한 섹스나 채팅방을 이용할 땐 공용키보드나 터치스크린의 소독을 권장하며, 자위 시 손과 기구를 20초 이상 청결유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도 지적하듯이, 이런 모든 사항은 독신가구와 미성년들의 섹스가 웹과 약물에 의존하고 있는 미디어 시대의 과정에 불과하다. 인간의 성욕은 그 자체로 도착적이며 현실과 환상 속에서 사도마조히즘적 역전이 공존하고 있다. 상상이 불허된 생육적인 흥분은 지적인 체계를 가진 이들에게 불가능하며, 성적인 상호작용은 '실제 파트너와의 자위'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몸의 현존이 말(言語)로 하는 환상 만들기로 보충되어야 한다는 지젝의 의견은 비아그라나 도취적인 상상 없이 이상적인 절정에 다다르기 힘든 인간의 뇌구조와 몸의 상관관계와 밀접해 보인다. 인간과 닮은 구체인형의 도입이나 섹스로봇 판매의 확장은 팬데믹적인 시점에서 사회적 고립의 결과보단 타인과의 사회적인 연결망에 대한 과도한 의존 때문이라는 변증법적인 역전은 수긍할만하다. 육체적 접촉이 없는 순수한 사랑은 허구일 수 있다. "육체적 접촉은 영혼으로 가는 길이지만 노골적 이미지 앞에서의 자위는 죄"라고 선언하는 지젝의 말에서 왜 니체가 연상되는 것일까?


 "몸이 없는 영혼에는 죄가 있다. 마치 옷이 없는 몸처럼" <거울 Mirror,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Andrei Tarkovsky>

 


6. šest 돼지와 인간의 시원찮은 멋진 신세계

 일론 머스크가 2020년 8월 28일 공개한 뉴럴링크(Neuralink) 프로젝트에서, 컴퓨터로 판독 가능한 뇌를 이식받은 돼지는 영화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에서의 맥 머피처럼 건강하고 행복한 돼지의 모습을 위해 전기충격요법을 받으며 인간이 돼지의 대체실험이 어느 날을 예상케 한다. 인간의 두뇌가 연결되어 각자의 자의식이 공개된다면 타인의 행동과 표정에서 추측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인간의 자존심이 되어 온 비밀과 거짓말 또한 가치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것이다. 타인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서 우연성조차 파악하려 했던 각종 사유의 실험은 역설적으로 팬데믹과 같은 거리 두기의 필요성을 낳고 있다. 그 말인즉슨, 육체는 고립되고 정신은 연결되는 디지털 사회로 진화될수록 개인의 의식은 더 이상 비밀의 영역이 아니게 된다. 개인적 자성이 사회적 비전과 이상적으로 합치되는 동일성의 추구는 전체주의적인 시각을 벗어나 인간의 다양성을 목표로 하는 자유주의 사회와는 배치되는 상황이며, 기술의 개발과 이상은 심리적인 거리를 두는 선에서 발전이 필요하다는 자각인 것이다. 인간은 실책이 반복되더라도 능동적인 의지와 변화를 가져야만 인간 존재로 변화할 수 있다.


 슬라보예 지젝이 전율하며 극도로 반대하고 있는 뉴럴링크 실험은 무서운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뉴럴링크의 2020년 이후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4년간의 변화는 급격했다. 2021년 4월 뉴럴링크는 '페이저'라는 원숭이가 게임하는 영상을 공개하며, 뉴런의 발화반응을 통해 강화학습의 잠재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시냅스 보상이라는 당근 체제로 유동화하였다. 2022년 11월 30일, 일론 머스크는 뉴럴링크의 장기목표는 일반인공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이 인류에 초래할 위험을 줄이는 것이라며 6개월 내로 인간에게 뉴럴링크 칩을 이식하는 실험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하고선 FDA에 실험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2023년 3월 미국식품의약국(FDA)은 뉴럴링크의 인체실험 승인을 거부했다. 하지만, 2개월 뒤 질병이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임상연구를 승인하면서 척수환자, 파킨슨병,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우울증 및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우선적으로 연구에 착수했다. 뉴럴링크는 2023년 9월에 임상참가자 모집에 나선 뒤 2024년 1월 29일 첫 칩을 이식받은 사지마비 참가자가 회복과정에 놓여있다고 발표했고, 2024년 2월 20일 뉴럴링크 첫 임상실험자가 생각만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고 공표했다. 뉴럴링크는 5월 20일 FDA로부터 두 번째 임상환자를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을 승인받았다.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기술에 더불어 뇌에 칩을 박은 인간존재의 등장은 연명치료에 대해 거부하는 자연주의적 죽음에 순응하자는 운동과 반대로 기계의 힘을 빌어서라도 오랫동안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건드리면서 천문학적인 투자금을 모으고 있다.


 2015년 영화 <셀프/리스, SELF/LESS>가 생각나는 일론 머스크의 실험을 보면서 인류의 방향은 어떻게 변할지 심심치 않게 우려가 된다. 일론 머스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실험은 분명 오래 살고 싶은 억만장자의 실험실에서 시작될 것이고,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아무리 앞으로의 개발이 선의의 방향이라고 해도 장기집권자들의 권력연장과 불멸에 대한 진시황의 강렬한 열망처럼 최정점의 욕망은 통제가 불가능하다. 의식적인 욕망으로 시작된 행위는 지금까지의 인류사의 진행과정을 보면 조화는 존재하지 않고 파멸로 귀결되었다. 인간의 뇌는 분명 경이로운 태고의 기억과 우주적인 무한 능력을 안고 있지만, 육체를 이탈하거나 육체에서 고립된 정신이나 마음은 집을 잃은 고아와 같은 존재이며 기억의 영상을 틀 수 없는 '비디오 테이프'라는 고립된 물체일 뿐이다. 한 단계 더 기술이 발전하여 배양된 신체에 기억을 이식하여 새로운 존재로 젊게 살아간다고 해도 엄마의 자궁이 아닌 기계에서 생산되거나 타인에게 빌려오거나 시간을 거슬러 회생된 육체라는 형상은 스스로의 껍질이라고 불리기엔 동시대성(Contemporaneousness)을 탈피하기 때문에 의식의 괴리와 자기 분열을 피하기 어렵고 존재의 결합을 완벽하게 만들기 어렵다. 기술이 발달하는 미래에게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존재의 상실감이 더 커질 것이다.   



7. Sedem 접촉 금지의 미래는 필요 없다

 지젝은 팬데믹의 대처방법 중 트럼프식과 시진핑식의 양극은 시장의 자유와 이윤가능성의 조건을 충족하는 경제활동으로의 복귀와 디지털화된 국가의 총체적 통제를 개인에게 가하는 길이라고 본다. '영구적인 비접촉의 미래'는 스트리밍과 클라우드로 대변되는 사회에서 학교, 의사의 진료실, 체육관, 공장, 데이터센터, 콘텐츠 작업실, 광산이나 산업화된 농장들이 권위적인 공공기관이나 국가권력에 의해 교도소의 형태로 변하게 되며, 정부와 기술 거물들 간의 협력을 통해 기관들의 핵심기능은 기술기업에 의지하게 되는 결과 낳게 된다. 스크린 뉴딜 정책의 최종적 선택지는 네트워크에 연결된 두뇌가 된다. 이는 곧, 인간이 언어(言語)라는 수단 없이 신적이면서 집단적인 자기 이식의 형태로 말없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게 되고 고립된 존재의 형상으로 정신적으로 결합하게 되겠지만, "세계의 또 다른 종말은 가능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젝의 우려는 숙고해 볼 문제다. 접촉되지 않는 저 먼 곳의 인간은 실제적인 만남의 갈증을 부른다. 상대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시공의 다른 선이라면 그것은 포기할 수 있는 상상이겠지만, 같은 시간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다면 굳이 그것을 배제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정신은 흐른다. 동시대성을 내포한 존재가 가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시간이나 공간적인 영향력이 사라진 위대한 정신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재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유명함이나 포퓰리즘을 넘어선 존재적 갈망으로 봐야 한다.  



8. Osem 천국에서의 죽음

 슬라보예 지젝은 영국 BBC 범죄드라마 <천국에서의 죽음 Death in Paradise>처럼 카리브해의 상상의 섬 세이트 마리에서 벌어지는 십여 건의 살인사건에 주요 혐의자 네 명과 그들을 목격한 사람들 간의 상황을 꺼내면서 이런 범죄드라마조차 팬데믹과 유사성을 띠고 있다고 본다. <라쇼몽>을 연상하게 하는 살인자와 피해자, 학대자와 가해자의 혼재된 상황에서 한 단계 상상력을 발휘하여 범죄자의 죄까지도 뒤집어쓰는 피해자의 본모습은 숭고한 희생정신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조차 도착되어 버린 현실을 드러낸다.




II. 급진적 정치학의 미래


9. Devet 그레타와 버니는 어디에 있나?

 지젝은 팬데믹 시기 세 가지 중요한 정치적 투쟁은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 생태적 위기, 인종차별주의로 본다. 감염병은 인간사회와 자연환경과의 불균형한 관계가 원인이 되어 폭발되었고, 생태적 위기는 과잉생산과 소비를 통해 근대시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왔으며, 반인종차별주의 또한 의료혜택을 누릴 백인 다수에 비해 인종 소수자들이 감염병에 취약하다는 사실로 인해 촉발되었다. 그는 모든 위기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동력학의 계기로 분출된 것으로 본다. 지젝은 모든 문제에는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해결의지가 행위의 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을 사는 것은 개별적 인간이듯이 인권문제나 인종차별에서도 보조자들이 흑인해방이나 여성해방을 가져오기보다 해당 당사자들이 해결을 위해 희생양이 되지 말고 자율적인 행위자로 행동해야 상황에서 벗어날 있다고 지적한다.



10. Deset 맞아요. 붉은 알약······  그런데 어떤 것?

 2003년 《메트릭스로 철학하The Matrix and philosophy를 발간한 지젝은 팬데믹 사유에 영화 <메트릭스>를 차용한다. 네오가 현실에 머무를 파란 알약과 사물의 진정한 상태를 찾게 하는 붉은 알약에서 고민하는 장면을 상기하는 지젝은 사회적 거짓말을 거부하기 위해 붉은 알약을 선택하려면 우리는 어떤 성찰이 필요한지 제시한다. 일론 머스크가 붉은 알약을 선택하라며 사람들을 종용했던 <뉴럴링크 프로젝트>를 선보인 사실을 일깨우며 인간의 육체가 고립된 상태로 보호막에 싸이고, 동시에 인간의 마음은 가상공간에 거주하는 세계를 선택한다면 이는 파란 알약의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기구들이 팬데믹을 이용하여 정보데이터를 확증한 이래로, 미국과 중국의 긴장관계는 첨예해졌고, 중국은 대만과의 평화통일보단 제도화된 폭력탈환이나 홍콩통제에 대한 사실을 확장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당시 팬데믹의 중간에 있던 나는 질병의 혼돈 사태를 바라보며 어느 나라가 바벨탑과 같은 빅데이터를 높게 쌓게 될까 생각했다. 미국의 첨단화된 기술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인구를 가지고서 상하이 봉쇄와 정저우에서의 애플의 소요를 통제적으로 관리하면서 팬데믹에 대한 실증적 데이터를 확보한 중국은 그 수혜의 정점에 섰다. 요즘 중국을 가면 신체기능과 얼굴인식을 수치화하여 범죄자분석 못지않게 개인들을 도표로 정례화하고 있다. 기기만 약간 낡았을 뿐 그 속도 또한 코로나 이전보다 3배는 빨라졌으며 도로에서 차 안의 안전벨트를 맨 것을 체크하여 벌점을 매길 정도로 느릿한 유럽과의 속도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며, 한국과 비교했을 때도 정밀함에서 기능적으로 상승되었다. 일상의 습관이 무너진 포스트 팬데믹의 현재, 공적 관습의 영역인 '대타자 Big Other'의 해체는 노동자들의 비애와 슬픔을 해소하던 하층계급의 선술집이 사라지는 현대의 사회를 상징한다. 우리의 탄탄한 기반은 결국 개별적인 우리의 육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인지하여 생의 투쟁을 시작해야 한다.



11. Enajst 수행하기 어려운 단순한 것들

 팬데믹은 지구의 연대와 지도력을 요구함과 동시에 가난과 불평등의 뚜껑을 열고 말았다. 지젝은 "단순한 욕망을 성취하는 일의 설명할 없는 불가능성"의 주제의식을 표현한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의 영화들과 브레히트의 희곡 《어머니 The Mother》를 인용하여 "단순한 것을 행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명제를 끌고 온다. 그는 바이러스 자체를 정신병적으로 폐제하자는 정신병의 한 형태로 이미 탈이상이 되어버린 과거의 일상을 향유하고자 하는 집단화된 인간들의 제스처를 비판하고 있다.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다고 했던 헤겔의 염세주의적 시선을 반영하는 지젝의 의견에 오류가 있는지, 분석이 정확한지는 끝에서 점검해봐야 할 것 같다. "환상의 도움 없이 현실은 없다"는 라캉의 경험적인 틀에 대한 제기를 되새기는 지젝은 거대한 위기 아래 가려진 전쟁의 상흔이나 지구의 황폐화와 비교하여 현상학적으로 팬데믹의 정지상태(epoché)는 진짜로 어려운 '지금'의 시간을 소환한다고 언급한다. 감염병의 시간성을 고대 그리스의 삼원 존재인 크로노스(Chronos), 아이온(Aion), 카이로스(Kairos)라는 렌즈를 통해 해석하는 윌리엄 존 토머스 미첼(W. J. T. Mitchell)의 《2020년 현재시제 Present Tense 2020 인용한 지젝은 인류의 시간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이르는 직선적 시간을 구현하는 크로노스와 순환적인 시간의 신이자 계절과 천체주기의 신이면서 입으로 고리를 물고 있는 원형적인 회귀의 신인 아이온과 위협과 희망의 이중적 측면을 지닌 카이로스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그는 팬데믹이 카이로스의 선택을 받게 되기를 희망한다. 바로 기독교 신학에서 보이는 예수의 탄생과 같이 인류의 탐욕으로 망가진 사회와 재앙으로 인해 무질서해진 세계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12. Dvanajst 전시 공산주의

 2020년 10월 27일 가디언에서 보도된 <과학자들이 북극의 메탄매장층에서 가스가 누출되기 시작했다고 말하다>라는 기사에서 자연의 붕괴는 팬데믹보다 더 긴급한 체제의 동결이 필요해 보인다. 전시 공산주의로의 영점으로 회귀가 새로운 야만주의로 이끌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지젝은 북극해에 얼어있던 메탄 매장층(Sleeping Giants of the Carbon Cycle)이 동부시베리아 해안의 대륙붕 사면에서 누출되기 시작했고 과학자들조차 이것이 지구온난화 속도를 가속화할 '기후 되먹임 고리(Climate Feedback Loop)'를 촉발할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는 우리에게 마스크로 인지 못하는 인식에 대한 에테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존에 대한 규격과 합의임을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구체적 보편성(Concrete Universality)을 들어 강조한다.



13. Trinajst 민주주의의 한계

 "바이든은 인간의 얼굴을 한 트럼프다"라는 말에 뻥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2021년 미국 국회의사당 력점거 폭동으로 연임에 실패했던 트럼프는 현재 재선을 노리고 있다. 바이든의 보편적인 의료보장이나 타국을 생각하지 않는 민주당의 무제한 화폐발행은 편향의 시선을 가진 거대한 우파의 '프라우드 보이즈 Proud Boys'와 다를 것이 없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인민의 권력과 선거메커니즘의 신뢰는 대의제가 가진 수많은 오류를 통해 이미 허점을 지니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유일당인 공산주의보단 다당제 자유주의 민주주의는 표면적으로는 양적인 확산의 면에서 이론상 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사회와 정치, 그 속에서 개인의 역할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고 대표'한다는 이상은 소수에 집중된 프레임을 파괴하지 않으면 이뤄지기 어렵게 되었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마오쩌뚱(毛泽东)의 선언을 반박했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폭력의 분출은 자체 모순으로 수명이 다한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산통"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아렌트에 동조하면서도 폭력의 산통 없이 권력의 이양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와 함께 "이기지 못해도 이념은 죽인다"는 세르비아의 표현을 차용해 살아있는 것은 이념이 제거된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현실임을 강조한다.   



14. štirinajst 현재의 정세: 우리의 선택

 팬데믹은 빈부차별의 계급과 인종, 남성과 여성, 대륙간의 차이, 국가 간에 다른 리듬을 만들어내며 감염병에 대한 대응의 방식 또한 바꾸어 놓았다. 전쟁, 굶주림, 국지적 폭력, 빈곤으로 인해 고통받는 최악의 극빈하고 전쟁의 소요에 휩싸인 나라들은 팬데믹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 집단면역, 바이러스의 기원, 백신, 정신건강, 사회적 활동의 변화 등에서 변화를 가져온 팬데믹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 감독의 영화 <그리고 삶은 지속된다 And Life Goes On 1992>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는 태도를 가져왔다. 팬데믹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것인지 포스트 팬데믹에서 새롭게 살 것인지는 존재론적인 필수 선택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코로나로 맞이한 정지는 커다란 의미였다. 잠시나마 정지를 경험하고서 마음속으로 가지던 삶의 방향을 틀겠다던 결심을 굳혔다. 다시 바쁘게 시동을 걸고서 코로나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 외형적으로 바뀐 것은 없지만 시작점을 다시 잡았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가 말하던 《말과 사물 Les Mots et les Choses》에 출현하던 휴머니즘적인 인간이 해변의 파도에 씻겨나가기보다는 새롭게 모래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형태로 전환한 것이다. 칼만 들던 손에 놓아버린 붓과 펜을 다시 들게 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III. 결론 아닌 결론 : 알지 않으려는 의지


 지젝이 언급한 1800년에 출간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의 폐쇄된 상업국가 The closed commercial state | Der geschlossene Handelsstaat 1800》는 국가의 경제적 자립과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경제철학서이다. 피히테는 국가는 경제적 자립을 통해 외부와의 무역을 제한하고 내부경제를 강화함과 동시에 상업활동을 중앙집권화하여 국가 내부의 모든 거래를 통제하고 관리하여 경제적 불평등과 부의 집중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자유무역과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피히테의 주장은 자유시장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 및 경제적 자립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고 사회정의와 평등을 위해 국가의 역할이 강력해야 한다는 경제이론을 제시한다. 오늘날의 상업적 무정부상태(Handelsanarchie)는 인간 우위나 경제보다 정치의 우선성을 파괴하여 금을 향한 탐욕(Auri sacra fames)이 경제적 확장의 이유로 국경 밖의 타자들의 영역을 넘보게 되고 포스트 모던의 제국주의는 단일한 사유(Pensée Unique)에 집약된다.


 지젝은 꿈은 무의식적인 소망의 성취라고 본다. 잠재된 꿈 사고와 현시된 꿈 내용, 무의식의 소망 사이의 삼각관계는 심층적인 꿈과 현시된 꿈 내용의 간극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의 관계와 같다. 우리의 삶에서 마음도 중요하며 육체도 역시 중요하다. 하나만 통제되는 세계는 안전하기 어렵다. 지젝은 우리 사고의 폭군인 '주인 기표(Master Signifer)'로서의 팬데믹은 자본주의, 기후, 중국, 음모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현대 체계이론의 창발속성 (Emergent Properties)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혀 예측되지 않은 채 물질들 속에서 떠오르는 현상과 생물체 내에서 떠오르는 행동을 포함하는 속성이며, 이 속성들은 한 체계의 협력적 기능에서 생겨나지만 시스템의 어느 한 부분에 귀속되지 않는다."


 바이러스를 통제하고 작동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알고자 하는 의지'가 발동하지만, 그 지식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제한할 때 바이러스에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난다는 지젝의 의견은 주목할만하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사유의 거부는 다섯 가지로 나뉜다. 첫째, 무지가 특별한 내부자의 적극적인 통찰의 형식을 상정한다는 음모론적인 의식. 둘째, 정신분석적인 사물성애적 부인이라고 부르는 태도. 셋째, 사유로서의 실증주의적 자연과학이 부재하는 현실에서 과학 자체로는 이데올로기적인 선행전제와 함의에 성찰할 수 없다는 분열의 모습. 넷째, 일상적 통제에 반발하는 지적인 반발의 무용성 및 선험적인 무지의 긍정적인 측면. 다섯째, 무지에의 의지를 극복하고 실존적 불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과거의 일상성을 버리고 새로운 일상성을 택하는 결정이다.



Priloga 권력, 회상, 그리고 외설에 관한 네 가지 성찰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보이듯이 사회에서 벌거벗는다는 것의 의미는 현대에서 개인적 '옷'과 상징적 지위를 갖는 권위의 '옷'으로 다양해졌다. 트럼프처럼 외설적인 정치인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흠이 없어야 하는 스탈린적 지도자와는 다른 형태를 보인다. 현대의 포퓰리즘 지도자와 과거의 포퓰리즘의 차이는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처럼 단지 유명하기에 유명하다는 사실이고, 트럼프처럼 외설성 때문에 유명하다는 사실이라고 규정짓는 지젝은 현대에서의 권력을 틀어쥔 왕에게 오점이란 이미지를 제거할 시간만 가지면 다시 새로운 이미지를 안고 왕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강압과 우울, 억압의 이미지는 결국 외설에 휩싸인 트럼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의 외설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시하는 외설적 행동에 열광하여 충격적인 저속함을 규범의 저항으로 받아들인 인간들의 어리석음이다. 더불어 그는 기네스 펠트로(Gwyneth Paltrow)의 질(Vagina)을 통한 외설적 게임형태의 상품판매를 언급하며 강압적 억압과 방임적 억압 사이의 강간 문제도 거론한다. 지젝은 우리가 피해야 할 것으로 "욕망은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금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억압과 우울증 사이의 대립이 종용되는 사회적 현실에서 타자가 욕망하는 것에 대한 욕망은 막연한 추종을 이루고, 평등으로 인식된 정의가 질투를 기반으로 한 소유에 대한 반대급부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임도 해결책은 아니지만 완벽한 통제가 실현된 사회 또한 전형적인 해결책일 뿐이다. 즐거움의 고통, 욕망과  폭력의 혼합물인 주이상스(Jouissance)를 탈속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분석과 외설적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을 바라본다. 코로나 19 이후 세계질서는 해체되고 있다. 트럼프는 거리에 군대를 동원하겠다고 선언했고, 중국은 대만을 침공할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으며, 푸틴은 이미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계속 중이다. 공포와 불안이 조장된 팬데믹을 이용하여 세계의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번성할 기반을 마련했다. 이제 우리의 시대에는 포스트휴먼보다, 포스트탈자본이 필요하다. 위기의 측면을 분명하게 지각하여 파악하고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추동할 요소를 사유해야 한다. 생각이 행동보다 먼저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IV. 관찰자가 사유하는 팬데믹

My Philosophical Overview
A Pandemic Contemplated by the Observer


 타인의 글을 읽다가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저작자의 의지를 넘어서 개인적 논조로 빠지는 위험성에 부딪히곤 한다. 다만, 틀을 인식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는 학업적인 성취나 타인에게 보여주는 사유가 아닌 상황에서 심도 있게 상승의 논박적인 쟁점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본다. 슬라보예 지젝과는 첫 만남이었다. 그는 영화와 소설, 대중음악처럼 다양한 대중문학적 소재와 신문, 연구, 논문, 철학 소고 등을 빌어 팬데믹을 사유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앞서 제기했듯이 지젝의 글은 팬데믹이 진행되던 소요시점에 풀이한 사회적 현상이라 그가 제기한 모든 쟁점은 열린 결말로 남겨져 있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PANDEMIC! 2: CHRONICLES OF A TIME LOST는 전체적 구성이 현재 진행형인 상태로 외부로 창을 열고 있어서 평가는 쉽지 않다. 팬데믹에서 벗어난 탈출자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지젝이 사건의 시작점에서 서술하는 관점과 사건의 종결점에서 바라보는 관찰자의 관점은 현실적인 경험치로 인해 실제적인 뚜렷함이 다르다. 전쟁과 기아, 가난이 가득한 아프리카나 인도에는 백신이 전무하거나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음에도 극도의 가난과 생존이 주목적인 곳에는 정신적 팬데믹은 존재할 겨를이 없었으며 공리적 자본주의가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도 수치화될 수 없게 자연 치유되는 상태를 보여주었다. 빈부격차와 전쟁과 평화라는 자본주의적인 세계가 표식하듯이 모순적이고 회복 시점을 상실한 지구촌에서 우리가 형성하는 질병의 개념과 치료로 도식화되는 지적인 데이터는 무엇을 위한 것이며 우리의 사유는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지 묻게 된다.



 고대 그리스만이 아니라 중국과 페르시아 고대왕조에서 정치가들은 전쟁이 난무한 불안한 사회와 부족한 생산기반에 불구하고 인간에 대해 사유했고, 전문적으로 사상적인 체계를 가진 사상가들과 함께 체제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자유주의가 팽배한 현대로 접어들어서 진정으로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정치가들이나 권력자들, 자본가들이 있는지 묻고 싶다. 자본주의 사상은 빈곤한 시대에 실패한 공산주의를 대체해 왔지만, 지난 70년간 극대화된 자본주의 욕망 앞에서 이제 포스트 자본주의를 준비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대중의 민주주의는 초극대화된 소수의 자본주의에 속해버렸고, 정치와 사상적 체제 또한 삶의 욕망이 근간이 된 경제적 권역에 예속되었다. 민주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는 나라들에게서 보듯이 확실히 변화에 대한 가능성을 더 많이 내포하며 다양성이 존재함으로 인해 일률적인 일당제보단 견제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거대 자본가들이 꿈꾸는 통제적 시스템에 놓이게 된다면 미래는 소수의 의지와 다수의 기계적인 인간만을 낳을 것이다.


 사람이 아프면 모든 신경이 통증에 집중되게 된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죽음에 순응하기보다 알지 못하는 죽음에 몰입되어 죽음에 대해 알기 위해 연구하고 죽음에서 탈출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삶의 방향을 틀기 위해선 일단정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팬데믹은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 속에서 우리에게 잠시 정지할 시간을 주었다. 어쩌면 다가오는 미래는 변함없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모든 것이 정지되었던 순간처럼 내일을 오늘의 소요 속에 둘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정지된 순간에 내(內) 외부적으로 큰 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을 향해 방향을 틀기로 결심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의지를 엿보았고, 앞을 향해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사상적 제도의 가장 강력한 장점은 다양한 의견이 억압받지 않고 새롭게 개진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총칼에도 굴복하지 않는 사상은 그 의지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다. 인간은 개별적이면서도 자기만의 자유로운 정신을 가져야 인간으로서의 그 존재를 다할 수 있다. 기억의 동굴 속에 웅크리던 사유를 재개하기로 한다. 그렇게 삶의 성찰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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