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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Jul 07. 2024

DANCER IN THE DARK | EUROPA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 어둠 속의 댄서, 유로파

[DANCER IN THE DARK] 2005. 5. 9. PHOTOSHOP COLLAGES. DESIGNED by CHRIS


눈이 아름다운 사람이 좋아요.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춘다면 더욱 좋아요.


힘들 때 유일한 위안과 유희는

기계음이 리듬이 되고

밥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장단이 되고

잊힌 꿈들이 신나는 음악으로 바뀌는

저 딱딱한 무대 위에서

작은 가슴을 펴고

숨겨진 발가락을 장난치는 것이죠.

구리 주전자에서는

커피 끓이는 물이 하얀 하품을 하고

향기 나는 조화를 건네는 소녀들이

신나게 철판을 두드리는 상큼한 들에서!


여봐요!

거기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노래해요.

뭐가 그리 시무룩해?  

보송보송한 잔디를 밟고 꿈을 꾸는 거예요.

크림색 망아지 위로 올라가서

덜 익은 방울토마토를 씹으면서

벌에게 쏘였을 때나 기분이 우울할 때

우리 한바탕 드럼을 치자고요.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은

검은 신발을 벗고서 즐거이 노래해.

저 물병 속의 음료수는 하늘색 샴페인이에요.

언제나 기쁠 때만 동그란 입을 여는

달콤한 황금색 생명수예요.


어제는 겨울이었고

오늘은 봄이고

내일은 여름일 거예요.

내가 도착했던 갈색 가을은 아직 오지 않았어요.


안녕.

어리석은 질문은 하지 마세요.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내가 잠들 시간이니까.



까만 실핀을 부드러운 머리칼에 듬성듬성 꽂고 영화관에서 늘어지게 체코 영화 보는 걸 좋아하던 여인이 있었다. 움직이는 영혼의 집에서 분홍색 캔디통을 열며 환성을 지르던 그녀는 개암나무빛 눈동자를 빛내며 뮤지컬 배우를 꿈꾸었다. 세상을 그리 잘 보여주지 못했던 두꺼운 안경은 트레일러로 안내할 기찻길을 타기 전에 끼는 소품. 덜컥 와르르 쾅쾅. 눈이 행복한 사람을 보면 조그만 두 손을 모으고 기쁨을 표현하던 그녀.


나는 한없이 웅크리고 쳐다보았다. 기뻤다 슬펐다 실성한 사람처럼 솟구치는 감정들. 아! 그런데, 카메라가 공중으로 높이 치솟기 전에 극장에서 나왔어야 했는데 마지막 노래가 흘러나오기 전에 그녀가 꼭 행복해질 거라고 상상하면서 어두운 동굴을 뛰쳐나왔어야 했는데 어린 나는 아니, 그녀와 너무 같았던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미련이 남았을까? 동굴 밖으로 뛰쳐나온 그녀를 꼭 안아주려 했었다. 철로 위를 비추고 유목민의 천막촌 위에서 반짝이는 별. 그 불꽃이 까만 우주로 날아가 아름답게 타오르는 순간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덜컥거리는 기계들의 인사와 말 걸어오는 그 모든 소음을 뒤로하고 하늘별의 움직임보다 빠르게 춤추는 그녀가 나에게 봉곳하게 손을 벌리기를.



텀블링하는 나의 환상이여.

날카로운 소녀의 첫발은

그대의 부드러운 살결 위로.

보이지 않는 미래는 말하지 않겠어.

배반당한 캔디상자 위치는 말하지 않겠어.

나의 손가락 위에 너의 손가락을 올리고

퉁탕퉁탕 노래할래.

기도만 드리는 저 늙은 수녀들도

한 번쯤은 기뻐할 때가 있겠지.

너는 볼 걸 다 보았니?

미풍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이파리와

제일 친한 친구 품에 안겨 죽은 사람을.

이대로 멈추면 행복할 수 없는 우리에게

어둠으로 묻혀버리기엔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우리에게

눈물을 흘리는 섬광은

가려진 눈 위로,

욕심 없는 가슴으로 내려올까?

아가씨여, 말해봐.

한 번만 눈을 뜨고 말해봐.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결혼할 남자를 고른다는 생각도 없고 누군가와 함께 살 집도 기대하지 않는 그녀. 그래!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일까? 그 누구보다 높이 뛰는 맥박이 놀이기구보다 멀리 숨 쉬고 있는 걸.


백태처럼 소리 없이 스크린 밖에 놓인 레이저, 자동 스위치가 올라간다. 그제야 시동이 걸리면서 무용단이 등장하는 세계. 천상의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축음기와 음침함을 몰아내는 새털구름들.


그런 것만 있으면 됐는 걸. 더 볼 것은 없었지.


죽음이 정신 나간 나를 쏠 때 철철 피를 흘리는 구멍 난 가슴을 부여잡으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하고 물어본다면 누가 대답해 줄까?


알 사람 아무도 없는데. 사람이 천진하다고 말해지는 것은 앞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갖춰진 것은 많은데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사람을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자기가 즐거울 때 함께 즐거워해 줄 수 있는 사람. 나는 황망했다. 곧, 대답이 부실하다고 생각했다.



너에게 즐거움이란 무엇인데?

넌 슬픔은 없니?

오직 기쁨만? 행복만? 터지는 자유만? 만족한 하루만?


해님이 중천에서 기웃거리는데

여전히 눈을 감은 사람들은 잠꾸러기야.

뱀이 허물을 벗어도

당신은 악령이 기지개 켜는 소리를 듣지 못하겠지.

장미의 가시가 돋아도

당신은 헛된 고통의 몸부림을 느끼지 못하겠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도

당신은 울어버린 여인의 체온을 알지 못하겠지.


왜 당신을 사랑할까?

마법의 힘일까?

당신을 왜 이리 흠모할까?

아! 그 뮤지컬에서 나왔어.

내가 매일밤 틀던 뮤지컬.

매혹적인 웃음과 미혹적인 발놀림.

그렇다면 나긋한 손목으로 날 데려가줘요!



어둠 속의 댄서. 나의 수면제. 눈을 뜨면 테이프가 다 돌아가 있었고 시간은 내가 알지 못했던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을 생각하며 시냇물에 감춰진 무지개가 떠오르는 희뿌연 창가에 서서 소리쳐본다.




아, 내 말 들려요?

그곳에는 장벽이 없나요?

동정심도 없고 자비도 없는 이곳에서

천장에서 긴 끈이 대롱대롱 나를 유혹하네요.


헝클어진 곰팡이 넝쿨이

한 여름에도 동상에 걸려 기침하고

한 겨울에도 가뭄에 절어있어요.

따스한 털장갑은 헤어졌고

바삭한 사과파이는 습기에 눌었어요.



치약을 짜다가 화하게 말라붙은 입을 닦지 못해서 개에게 물렸던 상처를 매달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엄마는 그런 나의 뒷모습을 보고 짓궂은 노래를 부르죠.

     

내 앞에 가는 아가씨
궁둥이 좀 보소
요리 씰룩 저리 씰룩 사람 놀리네



아픈 가슴을 비틀며 무의식적으로 공상을 한다.


"내가 좋아했던 것을 생각하면 전혀 슬프지 않아요."


어둠에서 모든 소리를 기억했던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나도 그랬는데, 이제는 좋아했던 것을 생각하면 많이 슬프고 어디선가부터 흐느낌이 밀려온다. 젊은 시절 내내 감옥에서 썩고 싶지 않다.



아, 나의 심장소리를 들어봐요.

너무 깊이 뛴다고!

음악이 흐르던 이 귀에서는 생선 썩는 냄새가 나.

나는 살이 발린 시체.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발가락을 떨 수 없어.

숨을 쉬고 싶어.

빙빙 도는 어지러운 달.



사람들은 모른다. 말해도 모르고 말을 안 해도 모른다. 그런데 말을 해야 하는 건 내가 답답해서야. 말을 하다 지치면 노래를 하고 그것도 지치면 그림을 그려. 그런 것도 싫으면 그냥 있지.

 
발을 뻗고 살 수 없게 목이 따갑다. 계속해서 등이 쑤신다. 오늘은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삐죽삐죽 텔레파시는 통한다.



"뭐 하니?"

- 음. 그냥.
"운명은 가혹해."

- 응. 그래.
"그래도 어쩌겠어."

- 음. 그렇지.
"잘 끝났으면 좋겠어."

- 응. 그래.
"꼭 나와야 해."

- 음. 그래.

"그때 우리 만나."

- 응. 그래.


그러고 싶어. 그러고 싶어. 


2005. 5. 9. MONDAY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 2000>는 초기 영화의 순수성으로 돌아가는 골든하트 시리즈의 종결로 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이 비요크(Björk)의 음악적인 재능을 빌려 만든 뮤지컬 영화이다. 뮤지컬 형식으로 감상을 적었다. 그 당시, 비요크와 나의 어느 부분이 맞았다.


영화 속 주인공과 비슷하게 생긴 친구가 있다. 눈이 크고 부드러운 얼굴의 칠칠맞은 소녀. <어둠 속의 댄서>를 기억하면, 영화와는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친구의 콜링 음악, 노라 존스(Norah Jones)의 [Don't Know Why]가 생각난다. [What am I to you]도 연달아 떠오른다. 문득 그녀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면 언제나처럼 즉각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핸드폰을 옆에 두고 노래 한 소절을 듣곤 했다. "잘 사나보네. 여전하구나." 하면서 음악이 끊길 때까지 흥얼거렸다.


논외로, 라스 폰 트리에의 골든 하트 시리즈의 서막인 <브레이킹 더 웨이브 Breaking The Waves 1996>는 아름다운 사랑의 거짓말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거짓부렁으로 생각했던 영화였다. 사랑에 대한 해석에 실망한 나머지 감상도 안 썼다. 유럽 영화에 빠져있던 시절에 베를린, 느, 베니스 수상작들은 가능한 챙겨보았다. 혼란한 시대상과 더불어 영화의 분위기가 변태적일수록, 혹은 정신상태가 이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내용이 미쳐 돌아갈 땐, 평론가들이나 작가들이 점수를 후하게 주는 영화들을 본 경험들이 애정관을 삐뚤어지게 만든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아름다운 여자친구와 든든한 직장, 잘생긴 얼굴과 건강한 신체로 미래가 밝았던 남자가 있었다. 불운하게도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가 된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육체적 상태에 절망한다. 그녀를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부탁한다. 그는 회복될 수 없는 육체적인 상태에 괴로워하고 목숨을 끊으려고 한다. 여자는 여전히 남자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의 결심이 불러온 두 남자의 사랑 앞에서 새롭게 선택을 해야 하는 것에 갈등한다. 남자의 친구 또한 원래 여자를 사랑했지만, 둘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을 알고 포기를 한 상태였다가 친구와의 의리와 약속, 다가온 기회 앞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초등학교 때 세 남녀의 방황을 그린 책을 보면서 사랑의 형태와 개념에 대해 의문을 놓지 못했다. 사랑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맞닥뜨린 정신적인 쓰리썸은 전혀 이해불가였다. 


"저게 정말 진정한 사랑이야?"


세상엔 사랑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사랑의 형태와 실행에서 정답은 없다. 모든 것은 스스로가 내리는 선택에 따라 각자의 무게로 다가온다. 타인의 사랑은 그냥 미지수이다. 나의 사랑은 선택을 동반한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으며 사랑은 하나로 말해지기 어렵다. 사랑 또한 변하는 것이다.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담스럽다.





라스 폰 트리에의 <유로파 Europa | Zentropa 1991> 감상은 부록으로 껴 놓는다.   


너의 침묵 속에서 나의 유로파를 깨운다.
2004. 10. 4. MONDAY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기묘하게 최면적이고 종교적인 냄새가 짙다. 음울한 배경과 독백 같은 영상은 이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가 묻게 만든다. Zentropa. Zentropa. Zentropa. 이곳은 어딘가. 이제 유로파 속에 있는가!

자, 그럼 잠시 여행을 하자.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해 보자. 가끔 시간이 독일에게 친절을 베풀지 않았던가. 칼라와 흑백은 고정된 시선을 구분하게 하는 요소이다. 집중을 요하며 감정의 기복을 가져오며 과거와 현재를 말한다. 목소리는 앞날의 사건으로 미리 알려주고 그대를 참여하게 유도한다. 피는 진실을 가늠케하는 냄새인가? 아님 죽음으로 영원을 알려주는가? 그대는 중간자를 본 적 있는가. 날진 형극에 매달린 채 무표정한 가면을 쓴 유형(有刑)의 중간자. 간접적으로 죽음을 표현해본다. 안타깝게도 달려가는 기차는 현실에 있으나 현재와 단절되었다. 잠시 카타콤의 비밀집회로 들어간다. 누군가의 억압과 탄압에 빚진 저항을 시도한다. 사건이 일어난 후의 일이 중요하다. 초록은 동색이지 않은가. 모두 같은 사상의 줄기에서 뻗어나왔다.

당신은 왜 여행을 하는가? 지금의 놓인 현상이 불안하다는 자각인가? 기차가 굴러간다. 그대는 중간에서 비소속감과 소속된 부담감으로 비틀거린다. 융통성 없는 계획은 죽음을 부른다. 조국은 해야 할 일만 해야 한다. 신의 입장에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를 처벌하면서 중간자라는 광적인 임무를 지우는 이기적인 조국은 사라져야 한다. 잠시 정지된 곳에서 현실을 바라본다. 우리는 미온적인 입장이 되어선 그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없고 방황하게 된다. 더 이상 소속단체에서 존속됨이 없을 땐 기능은 마비되고 응결된 파괴는 준비되어 있다. 결국 희생이란 사상과 제도에 관계없는 무고한 사람들의 몫이다. 침묵의 기차에서 침몰한다. 넌 탈출하지 못하고 죽는다. 선택한 기로에서 고통스러워 하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너의 힘으론 역부족이다. 사방이 벽이다. 너의 앞날은 무(無)다. 침몰 뒤엔 생의 발길질이 있다. 강물은 흘러간다. 시간은 간다. 당신은 깨어 자유인이 되길 바라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파괴자로 전락하는 건 상황이 만들어낸 필연인가. 아님 내부의 열기가 폭발하는 건가. 유로파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누군가 말했듯, 제우스의 연인 에우로파(Europa) 일수도 있고 전성기를 누리다 혼동으로 치달으며 침잠하고 있는 추상적 유럽피아의 현신일 수도 있다. 한편으론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가 되기도 한다. 단단한 얼음 밑에 생명을 감춰뒀을지 모를 자리에서 빙하의 일각만으로 가려진 빙하의 존재를 가늠하기 힘들듯, 얼음판 속 열층의 기원은 궁금증이 된다. 차가움 속에 자기를 띠게 하는 건 짭짤한 소금물이다. 바로 전기를 일으키는 생명의 본체인 것이다. 바다가 증류되면 결정이 남고 결정은 곧 녹아버리며 증발된 증기는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삶으로서 굳어버린 땅에 생명의 꽃을 피운다.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유가 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대로 돌고 싶다. 타원형으로 어떤 지점을 돌고 싶다. 생을 자극시키면서 생명을 낳고 싶다. 차가운 돌이 뜨거운 기운을 내뿜도록 닫은 표면을 뚫고 열려진 분화구가 분출하도록 돌고 싶다. 나의 유로파가 깨어나길 기대하며 물을 돌리고 싶다. 찬 얼음에서 열찬 기운으로 생을 탄생시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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