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ON, GEGEN DIE WAND

미치고 싶은 그대여, Life’s what you make it!

by CHRIS
[Gegen Die Wand] 2004. 11. 13. MOVIE POSTER COLLAGES


"광기(狂氣)는 진실에 가깝다."

<노스텔지아,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Andrey Tarkovsky in Nostalghia>


일상생활, 감정조절, 음식섭취, 사회규율. 이 모든 것에 브레이크의 제동력이 제대로 듣지 않는 이들이 있다. 술은 수초가 되도록 마셔봤고 죽음의 문턱은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 봤다. 그들이 원하는 것? 별로 없다. 다만 한 가지, 너무도 미치고 싶어 할 뿐이다.

마약을 흡입한다. 귀가 먹을 정도로 ROCK을 틀어놓고 차를 몰고 그대로 벽을 향해 돌진하는 남자. 이 귀한 삶을 버리는가? 그렇단다. 살 이유? 없다. 잡종 중에 하급의 똥개라며 소개하기를 즐긴다. 옆에서 사근거리며 말 붙이려 해도 하이네켄 비어를 주무른다. 한 입에 털어 넣으며 말하지.


"꺼져!"


이름의 의미를 일깨우는 사람에게 그 따위 시답지 않은 건 아는 바 없다고 퉁명스럽게 내뱉고 세상을 바꾸지 못하면 자신을 바꿔보라고 말하는 의사에게 미친놈이라고 서슴없이 지껄인다. 비웃는 어조로 눈을 내리까는 그는 뭐가 이리도 사는 게 재미없는가.

면도날을 아주 잘 다루는 여자가 있다. 핏물 보는 게 즐거운지 한방에 쭉 손목을 긋는 걸 수 차례. 집안 망신시킨다며 오빠에게 맞아서 어여쁜 코도 부러져 봤고 정신과 상담도 받으러 끌려 다닌다. 수줍은 그녀는 룸메이트나 다름없는 가족의 허식적인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것이다. 애정 없는 결혼도 OK. 탈출을 위해 이미 모든 혼수는 준비해 뒀다. 반지도, 차도, 거짓의 맹세도. 이제 남은 건 자신과 가장놀이를 할 한 명의 동반자만 있으면 된다.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영화 <미치고 싶을 때 Gegen Die Wand | Duvara Karşı> 이건 두 남녀의 이야기였다. 미쳐가고 있고 미치는 것을 완성하기 위해, 서로에게 기대 버린 광자들의 노래. 소피아 성당(Ayasofya)이 보이는 보스포루스 해협(Bosporus Strait)을 등에 지고 집시의 여정은 문을 열었다. 험한 세상 속에서 거친 파도를 헤치는 물고기 두 마리의 눈먼 사랑은 고통스럽게 헤엄을 쳤다. 힘겹게 찢어지는 파열음을 냈고, 나직한 신음을 토했으며, 울기를 멈추지 않았다.

"눈썹이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녀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


눈감은 여인이 아니면 살 수 없다던 사람도 미간이 화려하게 솟은 여인에게 빠져버린 걸까. 퀴퀴해진 해골은 해변의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려버리고 날빛을 맞는다.

그래, 가끔 지겹다는 것도 알지만 다를 것 없는 생의 움직임을 따라갈 필요도 있다. 배꼽에는 은색 피어싱을, 뒷모습에는 검은 활 모양의 문신을 새기며 젊음을 맞는 거야.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주며 당신이 놓아줬던 가슴의 유혹적인 선을 들이민다. 잃어버린 옛 향기는 겉에선 다르지만 내부에선 같을 수 있는 냄새로 지워진 마음을 끌어내어 보자.

정리라곤 생전에 없던 이도 질투에 불타 오르면 공기총을 쏘며 집안을 어지럽히고 또 치우겠지. 익숙해져 버리는 슬프고 아름다운 기대감이 솟는다. 어느 순간 그도 여자처럼 팔목에 피를 쏟으며 춤을 춘다. 저 생의 환희를!

늙은 인형을 두고 맞상대를 고르는 기쁨은 스무 살 갓 된 처녀가 아니라면 누가 누릴 수 있으리. 신혼의 첫날밤도 불쾌한 쫓김에 술집에서 보내게 됐지만 덕분에 철 지난 자유라는 걸 알았다. 굳이 한 사람에게만 충실해야 할 필요도, 신념을 불태울 필요도 없음을 더욱 깊게 느껴 버렸다. 탁심(TAKSIM)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마스카라가 번져버릴 때까지 땀나게 춤을 추다가 눈을 마주친다.

원 나잇 스탠드. 룸메이트의 질투가 없을 게 좀 아쉽지만 입맛대로 고르는 재미가 있어 좋다. 하지만 쓸데없는 추근거림에 끼어든 그의 부푼 손과 발을 만지느라 한 번의 떨림이 지나갔고 머리를 자르고 만지고 감기던 손이 물 풍선 같던 애무를 느끼며 익숙한 손길을 알아차렸다.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회전목마는 꼭 돈을 넣어야 화려하게 돌아가는 건 아닐 거야.

그러나 운명은 이상한 것. 뒤늦게 소리를 내는 기쁨에 화약을 붙여버린다. 머무르고자 했던 자에게 평소처럼 떠나가라며 반복을 불러오는 수레 위에 태운다. 한 명이 갇히면 한 명이 풀려나고, 모두들 감옥에 갇히는 순간 자유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속박이 아닌 속박에서 서로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뫼비우스의 띠에 감긴 두 사람의 사랑은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다.

매듭을 푸는 기점과 매듭이 얽히는 순간은 그 공간에 취해있는 사람들에게는 해답을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너무나 미치고 나서 울어버릴 것도 없는 두 영혼은 쓸쓸히 서로를 보낼 수밖에 없음인가. 바다처럼 그 슬픔 무한히 깊어 철새가 되어버린 그들의 귀와 피와 이성을 눈멀게 하기를.



오후 내내 헛발을 내딛고 터벅거리며 집에 돌아왔다가 대충 일거리를 정리해 놓고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분주히 나섰다. 갑자기 겨울인가 싶도록 쌀쌀해진 날씨였다. 스산하게 목을 조이는 바람이 춥고 쓸쓸해서 맨 정신으론 그들을 볼 요량이 없었다. 약속장소로 걷는 길은 이미 늦어버린 시각이었다. 고개를 돌렸는데 영화 간판이 손짓을 했다. <미치고 싶을 때!> HEAD ON? 뜨거운 술로 목구멍을 태우기 전에 미리 속을 화끈하게 달궈보고 싶었다.

한 미침이야 언제나 바라던 바가 아니었던가. 일 년 만에 돈 주고 보는 영화였다. 기대와 설렘이 섞인 쿵쾅거림에 진정이 안 됐다. 푸근함에 젖고자 들리는 음악에 집중하려도 했고 볼펜으로 낙서를 하며 손가락을 풀었다. 괴기스러움이 가득 찬 화면을 보는 내내 웃음을 터뜨렸던 입가는 시든 기색을 멈추지 못했다.

요즘은 이상하게, 좋든 싫든, 미리 웃을 준비 태세를 갖춘 긴장된 근육을 발견하곤 한다. 나를 위한 서둔 외출이었으되 또다시 갇힌 것이 아닌가 하는 경직된 감상 때문이었는지 뒤늦게 흘려 넣었던 술은 목구멍으로 그다지 잘 넘어가지 않았다. 두 남녀의 이별, 만남, 이별. 술이 밀가루 풀죽처럼 속만 태웠다. 결국 아이들과 오래 자리에서 앉아있지 못하고 나와버렸다.

미치도록 한바탕 절규하던 폭주를 끝낸 두 사람은 지쳐버렸다. 말없이 보내는 것이 서로를 놓아줌이거나 이해는 아닐 거라는 상실감이 올라왔다. 살면서 문득 서러운 건 언제나 가슴에 한 사람을 묻은 이들은 죄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니라고 도리질을 하지만 푸른 강물을 보면서도 술을 집어넣던 하루를 떠올릴 것이다.

즐겨찾기처럼 자주 쓰는 "미치겠다" 이런 말을 자주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한 감정과 울분을 표현할 절호의 말이지만 광인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들끓는 열정을 한방에 태울 자신이 없다면 평범함을 걷는 게 속 편할지 모른다. 이별을 준비하며 술을 마시던지, 망각으로 모든 것을 내던지던지 결단을 내려야겠다. [Life’s What You Make It] 끝까지 발목을 붙잡던 그 노래처럼. 그리고 여운이 남은 영상처럼.


2004. 11. 13. SATURDAY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첫 인상은 중요하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모국어도 한국어이고 국적도 한국인이지만 대화 중에 한국적인 정서가 없다고 보이는지 교포로 오인받는 경우가 많다. 분명 한국말을 하고 있는데, 외국인 취급을 받는 것은 알 수 없는 정(情)으로 밀어붙이는 숨 막히는 접근에 타인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정신적인 태도 때문일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틀에 박힌 한국적인 교육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타인의 이야기가 이해가지 않으면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던 소통의 욕구가 타인과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서양문화와 사상, 태고의 예술이 태동했던 신비와 고대 신화가 담겨 있던 그리스(Greece)와 동서양이 만나는 교착점,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폴리스), 현(現) 이스탄불은 한국을 떠나 정신을 여물게 할 여행지로 손색이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어두운 밤을 밝혀주었던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인문학적 상상과 상징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던 《그리스 로마 신화》, 고대 페르시아 제국과 오스만 튀르크의 역사와 문학들은 첫 해외여행을 한다면 세상을 알기 위한 놓칠 수 없는 필수 선택지였던 셈이다. 머릿속의 그림과 현실은 얼마나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열 아홉살 겨울, 가방을 둘러매고 여행을 떠났다. 아테네(Athens)와 이스탄불(İstanbul)의 풍경은 현대적이었다. 코를 가득 메우는 매연과 귀를 따갑게 하는 소음이 가득했고 정갈하지 않은 거리에 시간이 늘어지듯이 사람들의 모습은 느릿거렸다. 왕복 비행기표만 준비했던 터라 의도하지 않는 우연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계획도 짓지 않았고 생각나는 대로 장소만 짚어가며 방황하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다녔던 신들이 노닐고 있을 것만 같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과, 이성을 자극하던 철학자들이 열정적으로 토론하던 아고라(Agora)와, 지적이고 냉철한 정치가들의 음모와 기지가 피어날 것 같은 아크로폴리스(Acropolis)와, 자유로운 향기를 풍기던 《그리스인 조르바》가 호탕하게 웃고 있을 법한 외로운 미코노스(Mykonos) 섬과, 안개만이 가득한 공중에 매달린 수도원 메테오라(Μετέωρα)와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서사시가 펼쳐지는 페르시아 제국의 이름 모를 소국(小國)들과, 찬란한 동서양의 가교가 펼쳐진 이스탄불 해협에서 방황했던 시간들은 수십 년이 지났어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영화 <미치고 싶을 때>를 보면서 터키(튀르키예)에 갔던 때를 떠올렸다. 겨울비가 계속해서 내렸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빨갛고 노란 우산을 들던 한국인들과 다르게 우산을 들지 않는 사람들 사이로 나 역시 우산을 펴지 않기로 했다. 가죽재킷을 입고 그들처럼 비를 맞으며 길을 걸었다. 테살로니키 (Thessaloniki)에서 출발하여 이스탄불로 가는 버스에서 만난 스물 다섯살의 네덜란드 친구가 나이도 어린 아이의 여행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그녀의 약혼자인 나이지리아 남자를 함께 만났었다. 두 남녀의 만남을 배경으로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이스탄불에서 삼 일간은 이들과 함께 지냈나 보다. 동양인, 흑인, 백인. 이렇게 셋이서 우산 없이 거리를 걷고 있으면 눈에 띄기 쉬웠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했던 이스탄불에서의 삼 일은 여행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일정으로 변경했다. 할 일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구경하는 것 이외에 할 일이 딱히 없었던 터라 탁심(TAKSIM)의 나이트클럽에서 현지인들과 흑인 친구들이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나이지리아 친구의 집에서 그들이 직접 해주던 밥을 먹었다. 기름진 음식에도 적응하고 거칠었던 거리의 생활을 하다 보니 어디 가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측하지 못한 변화가 다가오거나 정해 놓은 계획이 변경될 때 타인들보다 그 상황에 무심한 것은 세상살이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경험해서 일 것이다.


영화를 보던 이십 년 전에는 마음이 거의 하이톤이었다. 눈빛과 말투에서부터 감정까지 모든 것이 하늘로 올라가 있었다. 말은 과격했고 성질은 날카로웠고 감성은 격정적이었다. 외모도 차가웠고 성격도 거칠었는데 글을 적을 때만 습관처럼 차분해졌다. 꽉 막힌 분노로 가득 차 있을 땐 영화 속 남녀처럼 벽을 향해 들이박지는 않았지만, 내부는 머릿속이 하얗게 되도록 온갖 광선이 날아다녔다. 술을 먹으면 글도 모두 욕으로 도배하긴 했다. 시간이 지나서 바라보니 글에서 그때의 감정이 보인다. 얼핏 영화는 기억이 난다.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거나 설령 생긴다고 하더라도 드러내선 안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해결할 일에 치받쳐 자유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돌볼 여력은 안 됐다. 사랑에 지독하게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무리 상대를 사랑한다고 해도 자해나 자살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존재의 근원인 나를 지우고서 타인에게 남은 사랑은 무슨 의미이던가. 사랑이 나의 이상을 앗아가거나 자유를 향한 열망을 넘어서는 감정은 아니었다. 화면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느끼는 사랑의 고통에 건조했던 마음은 이마를 찌푸림으로 마무리했다. 요즘은 미친다는 말은 잘 안 쓴다. 열정이 사라진 것일까. 바보 같은 타인을 위해 조용히 "미쳤군"하고 중얼거리는 여백은 남겨두었다. 삶에 대해 관찰의 시간이 길어지니 타인의 선택에 공감이 생기기보다는 그냥 저런 삶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바라보게 된다. 나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하니까 진정 미치고 싶을 때는 나를 찾지 못했을 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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