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NQUEST OF HAPPINESS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행복의 정복》

by CHRIS
[THE CONQUEST OF HAPPINESS, BERTRAND RUSSELL] PHOTOGRAPH by CHRIS


나는 짐승이 되어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짐승들은 저다지도 평온하고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나는 서서 오랫동안 짐승들을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조건을 역겨워하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캄캄한 밤에 일어나 죄를 뉘우치며 우는 일도 없다.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논하며 나를 괴롭히지도 않는다.

뭇 짐승들 중 어느 한 마리도 불만을 느끼지 않고 소유욕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다.

어느 한 마리도 다른 짐승에게 무릎 꿇는 일이 없고 수천 년 동안 살아온 종족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다.

지구 위 어느 한 마리도 명예를 가지고 있거나 불행하지 않다. 《짐승, 월트 휘트먼


The Beasts by Walt Whitman (1855)


I think I could turn and live with animals, they are so placid and self-contain’d,

I stand and look at them long and long.

They do not sweat and whine about their condition,

They do not lie awake in the dark and weep for their sins,

They do not make me sick discussing their duty to God,

Not one is dissatisfied, not one is demented with the mania of owning things,

Not one kneels to another, nor to his kind that lived thousands of years ago,

Not one is respectable or unhappy over the whole earth.




제1부 불행의 원인


What makes people unhappy? 무엇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만나는 사람들의 모든 얼굴에서 가냘픔과 슬픔의 빛을 보게 된다던 시인 블레이크의 말처럼 버트런트 러셀은 사람들의 감정을 바라보면 도처에서 불행을 마주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행복해져야지!"라고 말하는 비상한 결심만큼 어리석은 다짐은 없다. 개인의 심리까지도 사회적 제도에 묻히면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나 결혼과 도덕과 같은 이상, 교육과 사회적 질서라든지 사회구조의 원리 및 미덕과 정치 속의 사회에 대해 부단히 적어왔던 행복은 맛볼 수 없다. 한낮의 햇빛을 쪼이기보다 서로를 죽이는 일이 덜 무서운 현대사회에서 어떤 행운이 있어야 행복을 성취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러셀의 회고록에 이어 반복된 말들을 보면서 비극적인 자기도취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 귀에 들어온다. 과대망상에 빠진 히틀러나 나폴레옹과 달리, 정신병자와 다름없는 알렉산더가 꿈을 실현할 능력이 있었다고 해도 폭음과 과격한 분노, 여성에 대한 무관심, 신성함 대한 강압적 요구 속에서 요절한 상태를 관찰하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권력자들에는, 아니 정정하자면 현재의 권력자들도 열망은 존재하되 행복이라는 개념은 부재할 것이다. "정치적 의미의 억압과 정신분석적 의미의 억압은 동일하다"는 말은 권위적인 행태에서 탈속한 나의 현재에선 해당사항은 없다. 하지만 추후에 성취감이 끓어오를 때 욕망을 조절하는 능력이 사라지면 권력자 '차르(Czar)'라도 된 양, 제멋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가슴 밑까지 울렁이게 될 수 있다고 생각은 든다. 오랫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경험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욕망을 눌러버리곤 하지만 청소년 시절에 정상적인 만족을 박탈당한 인간은 전형적으로 불행할 수 있다는 지적에 고민해 본다. 감정이 어느 정도 제거되거나 올라오는 감정을 바라보게 된 상태에서는 감정의 너울거림에 크게 반응하지 않게 된다. 행복까지는 몰라도 극단의 불행으로는 치닫게 되지 않는다.



Byronic Unhappiness 바이런적 불행


"이 세상에는 삶의 보람이 하나도 없다." 자포자기의 말처럼 들리는 자조적인 말이 첫 장부터 김새게 한다. 모든 쾌락을 음미하고 음울한 결론에 도달한 염세주의자들을 보면, 부자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순간에나 삶의 의지가 생길 거라는 말에 공감한다. 수입이 줄어들면 염세주의자가 늘어난다는 확신 아닌 확신에도 웃어본다. 모험적이면서도 세심한 사람, 선에 대해 인식하면서도 결코 악을 망각하지 않고 신성한 척하지도 않는 사랑은 절망과 후회, 냉소에서 약간은 멀어질 수 있다. 나는 철저하게 도덕적이고 완벽한 이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원리주의자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형식적인 틀에 묻히면 오히려 틀에 발목을 잘리는 것이 논리의 날카로움이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개념과 정열을 중시하는 센스, 생활의 풍요함에 대한 비전을 지닌 '셰익스피어'와 신적인 의미가 퇴색하고 평범한 인간을 다루는 사실주의적인 삶을 그린 '입센'을 양립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또한 현대 인간의 인식이다.


"왕자의 슬픔을 다루는 구식의 비극이 현대에 적합하지 않다."


비극적 정열이 사라진 현대의 인생관에서 소수의 영광은 재현되기 어렵다. 비극을 쓰기 위해서 비극을 느껴야 한다. 피와 근육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느껴야만 진정한 글을 쓸 수 있다는 어조에도 동감한다. 다만 그 아픔의 자극을 누가 견디겠는가? 진지하고 심원한 비극과 참된 행복의 전개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라 작가의 창작적인 기쁨과 실제적인 삶의 괴리 정도로 불러보고 싶다. 황량한 세상을 받아들이는 절망적인 영웅들을 보며 감탄만 할 뿐, 옛 감정을 느끼지 못한 문필가들과 글을 쓰려는 젊은이들에게 러셀의 충고를 남겨본다.


"글을 쓰려는 생각을 버려라. 그 대신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라. 세상으로 나가라. 해적도 되어보고 보르네오의 왕도 되어보고 소련의 노동자도 되어보라.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기본적인 생리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런 어려운 생활에 전념해 보라."



Competition 경쟁


과거 '생존을 위한 투쟁'은 현재 '성공을 위한 투쟁'이라는 지적은 날카롭다. 전쟁세대인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는 밥을 못 먹고 며칠을 굶는 시기도 존재했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감자와 고구마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나는 살을 빼기 위한 현대적 미에 집착하는 신경성 식욕부진증 (anorexia nervorsa)에 걸린 거식주의자나, 부모의 무관심으로 인한 보호받지 못한 상태의 아이들이나, 혹은 거동이 불편한 열외적 소외자로서 밥을 먹지 않는 사람들을 보았어도 사지가 완벽한데 완전히 먹을 것이 없어서 생존의 투쟁을 하는 사람들을 아직 보지 못했다. 여기서 과거의 의식에 매몰되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존력이 상실된 인간은 제외한다. 절대적 빈곤은 사라졌고, 이제 갖지 못하는 것들이 세상에 진열된 상대적인 빈곤과 타인보다 우월하지 못하다는 배신감이 인간의 내장에 자리하고 있다. 절대적인 갇힘은 숨구멍도 없다. 상대적인 갇힘은 벽이나 창을 파괴할 여지가 있다. 철학자의 돈을 버는 목적은 안전한 여가라는 말과 비교하여 돈을 더 많이 버는 기회와 겉치레와 화려한 생활이라는 현대인의 목적은 상치된다. 러셀은 교양을 갖추기 위한 책 읽기나 그림 감상 또한 전문가에 의뢰하여 타인의 소유를 방해하며 쾌감을 얻는 부자들을 비판하면서 성공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어선 안된다고 강조한다. 경쟁이 습관화되면 경쟁과는 상관없는 순수함까지도 모두 허례허식이 됨을 글 읽기나 독서의 형태에서도 자잘하게 비판한다.


"현대 생활에 있어서 경쟁의 강조는 아우구스티누스 대제 이후의 로마에서 일어났을 법한 문화적 수준의 전반적인 저하와 관련이 있다. 남자나 여자나, 보다 지적인 즐거움을 즐길 수 없게 된 것 같다."


언어로 수식하는 회화술(會話術)의 청아한 즐거움은 버림받았다. 수입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야생화의 이름은 의지만을 강조하는 청교도주의적인 물질관에 젖어서 굶주림에 빠진 감성과 지성을 전혀 자극하지 못한다. 조용하고 건전한 기쁨은 이리도 많이 널려있지만, 보여주는 모든 말들과 의미는 그 빛을 잃는다.



Boredom and Excitement 권태와 자극


러셀은 권태를 역사상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인 특유한 인간의 감정으로 본다. 권태의 본질은 현재의 상태와 보다 더 유쾌한 다른 상태를 비교하는 데 있다고 한다. 적에게 쫓기거나 사형장에서 죽음을 기다릴 때 확실히 권태롭지 않음은 분명하다. 권태는 본질적으로 어떤 일에 대한 욕망이 좌절된 것을 뜻한다. 권태의 반대는 자극이다. 자극을 바라는 욕구는 남자라는 성(性)이라는 인간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말하는 러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수렵시대의 육체적 욕망이 가득한 인간의 모습에서 자극점을 찾고 있는 인간의 속성을 보았다. 권태로운 왕과 귀족의 자극점은 항상 욕정의 비린내가 나기 마련이었다. 현대인의 권태로움은 마약을 흡입하고 전자기기를 두드리는 데서 마감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강요받는 '단단한 가족생활'로부터 탈출한 현대의 젊은 여자들의 대목에서 작게 탄식하고 말았다. 대학시절에는 권태로운 사람들을 보긴 했는데, 삶에 바쁘다 보니 현재는 완전 권태와 멀어져 있다. 그에 따라 반대급부인 자극에도 심드렁해졌다. 권태는 자기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서 더 자극을 추구하는 경향을 소환한다. 자극적이지 않은 쾌락을 즐기는 위인들의 덕목을 바라보며, 지금보다 심적으로 자유조차 인식하지 않게 된다면 심장에 박힌 형상을 머리와 합치하는데 집중해보려고 한다. 조용한 분위기의 환희를 추구하는 것에서 행복한 삶이 존재한다는 말에 바쁜 삶에서 권태의 먼지가 많이 털려나갔음을 알게 된다.



Fatigue 피로


기본적으로 신체에 뿌리 박힌 근면과 완벽을 향한 열정, 앎에 대한 추구는 청장년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을 때 육체적 노동을 하면 머리가 개운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지성적인 언어에 매료되는 뇌파의 특성상, 계속적으로 육체만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러셀은 현대에서 신경의 피로는 낯선 상대와의 만남에서 오는 신경과민, 통제되지 않는 생각과 번민의 감정들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걱정의 심리학은 최악의 가능성에서 스스로에게 "별 것 아닌 문제"임을 인식할 때 걱정이 사라지고 쾌감이 생긴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라고 한다. 대지와의 접촉을 상실한 육체적 피로가 아닌 정신적 과로가 넘치는 지금,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들 사이에서 덜 피로해지길 기대한다.



Envy 질투


인간의 감정 중에 가장 보편적이고 뿌리 깊은 감정인 질투는 내가 보유하지 않는 감정 중에 하나이다.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이 내게 없는 미덕은 겸손이나 타인에 대한 공경심이라고 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한 "겸손"과 "공경심"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행하는 범위가 아닌 허식적인 "겸손"으로서 겸손을 떤다거나 나이에 대한 "공경"으로서 나잇값을 못하면서 나이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보였던 무심한 태도를 말한다. 남이 뭐라든 조금의 틈이 허락한다면 나를 꺼내는데 집중하다 보니 나를 질투하는 인간들은 있어도 내가 질투할만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학 때 어쩌다 알게 된 친구의 친구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처음 봤는데 친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이 친구와 더 밀접한 관계라고 하기에 유치해서 대꾸도 안 했더니 눈앞에서 알짱거렸다.


"그래? 친구는 너나 다 가져."


심드렁한 대답과 동시에 그 애가 어떤 반응을 보였던 것 같은데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그 이후가 생각나지 않는다. 친구의 개념은 그 아이가 생각한 소유적 친밀감과 내가 생각하는 정신적 유대감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지금도 친구와는 잘 지낸다. 러셀은 민주주의 이론을 태동시킨 격정이 변혁을 정당화하는 질투의 격정이라고 한다. 또한, 여자는 자기 이외의 다른 여성들을 모두 경쟁자로 보는데 남자는 동일한 직업을 가진 다른 남자를 질투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를 들어 다른 예술가가 한 예술가를 칭찬하는 경솔한 짓이라던지, 한 정치가를 다른 정치가를 칭찬하거나 학자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것들 사이에서 질투는 인간을 불행한 지점으로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나는 여자들이나 남자들과 경쟁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지성적이고 독특한 재능을 지닌 사람은 남녀를 불문하고 유심히 관찰하는 편이다. 삶의 투지를 불러일으키고 생을 약동하게 만드는 사람은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러셀은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찬양하는 감정을 증가시키고 질투는 감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교받거나 비교하는 것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질투라는 감정이 들어설 틈도 없을 것이다. 겸손 또한 악덕일 수 있고 질투를 유발할 수 있다는 면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긍심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자, 질투를 쳐낼 하나의 방패막이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가난한 국민은 부유한 국민을, 여자는 남자를, 도덕적인 여자는 부도덕하면서 처벌받지 않는 여자를 부러워한다는 말은 절반만 공감하기로 한다. 나처럼 대상에 부러움을 찾기 이전에 오류나 흠을 보는 인간은 질투가 들어설 구석이 없다. 본능적인 행복은 지능적인 여자들에게서 부족하다는 말을 계속 듣고 있자니, 러셀 "백작"은 귀족집안 출신임을 인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질투는 더 나은 보금자리를 찾아가는지 혹은 오직 죽음과 멸망만을 향해가는지를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밤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의 표현이기에, 문명인은 자아를 초월하는 법과 우주의 자유를 획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만 살짝 동조를 던져본다.



The Sense of Sin 죄의식


신비로움을 상실한 양심 사이에서 죄가 발각될 가능성이 있을 때 인간이 살아오면서 경험한 도덕률과 거짓말의 관념은 죄의식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어릴 적의 도덕교육이 성(性)에 있어 죄의식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무의식으로 하여금 의식적 사고를 지배하는 합리적인 신념에 억지로 주목하도록 만드는 문제와도 상통한다. 교육이란 수단에 의해 무의식 속의 유아기적 암시를 극복하고 무의식의 내용까지 변경시킬 수 있다는 러셀은 죄책감의 원인을 분석하고 터무니없는 감정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모든 결정을 파괴하겠다는 단단한 결의를 통해 불합리한 생각과 어리석은 느낌을 뿌리째 뽑아서 검토하고 배척하라는 충고는 유용하다. 타인에게 종속된 시간에서 벗어나 나만의 발판을 가지게 된 현재는 과거에 막연하게 느껴지던 깊은 늪은 발바닥 정도를 침해하는 진흙 웅덩이로 보인다. 인간이 병들었을 때 일말의 양심이 사라지는 현실을 만들어낸 명목상의 도덕이 성직자와 정신적으로 노예가 된 여자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는 러셀의 말에서 그가 놓친 인간의 종류를 덧붙여본다. '사회적인 성취욕과 심술궂은 경쟁에 심취한 가정에 무관심한 남자'도 있다. 자존심이 결여된 비천한 죄의식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고 열등감을 줄 수 있다. 행복까지도 잊는 물아의 순간은 타인에 대한 너그럽고 관대한 사색적 태도를 가지고 자극과 오락을 추구하는 강렬한 격정에서 벗어나 기만적이고 도취적인 행복이 아닌 활동적인 정신의 영역이 기지개를 켜는 지적인 순간임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메모해 본다.



Persecution Mania 피해망상


상상적인 박해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피해망상은 폭력적인 형태로 극단적인 감정을 취하는 속박당한 자유의 정신이상이다. 부당한 대우나 타인의 행위나 말이 자신을 억압한다고 느끼는 피해망상의 실체는 스스로를 중요한 위치에 두고 타인의 행동을 불합리하게 여기는 과장된 생각이 집중된 원인이다. 타인은 생각만큼 이타적이지 않다. 스스로의 업적이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 있을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타인이 자신을 박해하고 싶을 정도로 골몰하고 있다고 상상하지 않은 건전한 동기가 필요하다. 러셀은 허영심과 인습적인 도덕, 이기적인 동기의 여러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인간의 내면은 현재에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에 질투가 가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모호한 계획을 세워놓고선 곧잘 실패에 허우적거리곤 하는 나는 성공지향적인 인간이 아니다. 일을 만들어감에 있어 최소한의 실패는 경험적인 면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키를 쥐고 삶의 항해를 시작한 이후로,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거나 성공해야 하는 압박감이 강한 인간들보다는 심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명예롭고 부유한 생활 속에서도 부족한 현재에 갈증을 느끼는 삶과 현재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의 작가일지라도 계속적인 시도를 통해 후대와 정신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불멸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의 대답은 하나이다. 내가 만들어가는 삶에서 해답이 있다는 것이다.



Fear of Public Opinion 여론에 대한 공포


생활방식이나 세계관이 타인과 동조를 받지 못하면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공감에 매달린 사회라는 가정에서는 설득력이 있다. 아무리 기발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도 정신적으로 고립된 인간은 불행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창작자에게는 순수한 창조의 기쁨만은 남아있지 않나 싶다. 아마 나의 현재가 이전과 비교하여 긍정적으로 개선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신비로운 시와 삽화로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던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당시엔 고독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으나, 그는 타인이 바라보는 세상이 자신이 보는 것보다 어둡고 침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더 아름답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일상에서 불필요한 체면에 걸리적거려 본 사람이라면 개처럼 짖는 관중들에게 소탈한 무관심이 가장 고귀한 응대임을 알게 된다. 사회적 적의에 대항하여 관중들조차 두려워하는 무지를 깨트릴 수 있는 고귀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비천한 자들의 악의적인 공포는 사라질 것이다. 천재는 자신의 길을 개척한다는 태평한 이론 앞에서, 나와 같은 취미와 정신적 태도를 갖춘 사람을 찾아 나서는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 정신의 문을 타인의 요구와 상관없이 자의로 열었다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세상의 햇빛을 보는 것이 살갗이 타버릴지도 모르는 뱀파이어의 비애가 아닐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수십 년 형성된 사상이 미로처럼 복잡하게 형성되어 있긴 하지만 스스로 실타래를 풀다 보면 근사한 옷 한 벌 정도는 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만들어낸 사회적 예복은 예의 없이 벌거벗음에 비난하지 않는 외관을 제공해 줄 것이며 타인에게 미지의 영역을 모방하고 싶은 흠모까지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경악할만한 적의로써 무리들이 형성하는 여론에 대한 공포를 삭제하고 미학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제2부 행복의 원인


Is Happiness Still Possible? 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행복한 사람들을 고찰하는 장으로 넘어왔다. 러셀의 행복분류론으론 두 가지가 있는데, 분명한 행복과 공상적인 행복, 동물적 행복과 정신적 행복, 심적(Heart) 행복과 지적(Head) 행복이 있다. 모든 인간에게 아니면 글을 읽을 줄 아는 인간에게 개방된 행복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버트런드 러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에서 말했던 행복론과 중첩되어 있다. 과학자들이 얻는 행복처럼 순수한 지적인 열망에 대한 충족과 앎에 대한 해소는 자기희생적인 관념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우호적인 관심을 가지고 폭넓은 흥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부연한다.



Zest 열의


삶의 성찬 앞에서 행복한 사람은 건강한 식욕을 가지고 음식을 즐기며 적당히 먹는다. 식사에 싫증을 내는 바이런적 불행의 희생자와 의무감에 식사하는 금욕주의자, 인생의 쾌락을 비미학적인 것이라고 비난하는 괴팍한 사람인 미식가들을 비교하면 이런 타입들은 최대의 환멸을 가지고 건강한 식욕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환멸의 병에 사로잡혀 있다. 마음속 공허를 응시하는 내성적인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인 소시지기계가 되어야 한다는 대목에 집중해 봤다.


일반 돼지고기를 진미의 소시지로 둔갑시키는 희한한 소시지 기계 두 대가 있었다. 열의에 가득 찬 기계는 돼지고기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소시지를 무한히 생산해 냈다. 열의를 상실한 기계는 돼지고기와 기계인 자신과의 상관관계에 집중한 나머지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고, 돼지고기를 거부한 채 돼지고기의 내부를 연구한 결과 원료인 돼지고기가 투입되지 않았고 결국 내부는 공허해져서 진미의 소시지를 만들던 장치는 모두 정지하게 되었다.


마음은 여러 재료를 조합하여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기계라고 가정했을 때 사물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다양한 경험은 셜록 홈스(Sherlock Holmes)처럼 대상에 대한 분석적인 시각과 날카로운 추리와 은밀한 비밀의 통로를 제공한다. 여행에서도 패키지여행처럼 규격화된 삶의 형태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환경과 지역적인 풍습과 역사적 흥미와 특색적인 음식과 고유의 언어를 배워서 유쾌한 추억으로 간직하는 사람이 있다. 일전에 해외에 가면 김치를 꼭 먹어야 한다고 여행 짐의 절반이 라면과 쌀, 김치였던 어르신을 본 적이 있었다. 인생여행은 가볍게 떠나서 의식을 가득 채워오는 것이 필요하다.


의상에 대한 대식가적인 정열로 인해 제노아를 잃은 조세핀처럼 일종의 사회적 절제의 원칙을 벗어나면 과도한 정열은 길 잃은 탐닉처럼 비참한 시간을 제공한다. 대상에 대한 순수한 쾌락보다 망각을 추구하는 비절제의 형태가 발생한 원인은 불규칙적인 충동에 대해 문명사회에 있어서의 습관은 규칙적이어야 한다는 규제성을 잊기 때문이다. 열의는 남녀 모두에게 필요한 행복의 최소조건이다.



Affection 사랑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신감은 사랑받는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 대한 일반적인 자신감은 올바른 종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과 마음의 습관이라고 한다. 안정적인 대상에 대한 열의와 주관적 본위에 대한 불안의 공포 속에서 최고의 사랑은 서로 생명을 주는 사랑이다. 러셀은 진정한 가치를 가진 유일한 성적인 관계는 모든 인격이 융합하여 새로운 공동의 인격을 형성하는 성적 관계이며, 모든 형태의 조심성 가운데서 사랑에 대한 조심성이 참된 행복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것이라고 본다.



The Family 가족


사회구조적인 변혁의 차원이 아닌, 각 개인의 능력 한계에 있는 가족의 형태와 그 개선에만 집중하는 러셀은 자녀를 가지고 싶지 않은 유쾌한 생활을 즐기는 노처녀, 아이를 갖고 싶은 여자, 자녀의 보육에 힘써야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의무의 본질에도 불구하고 모든 매력과 지성의 3/4를 잃지 않는다면 운이 좋은 여자라고 했다.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 또한 현실에서 처한 모든 문제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문제라는 것에 동의한다. 아파트라는 집합 구조물에서 노예와 주인의 농장이 사라진 후에, 양심과 비양심 속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질투심 사이에서 문명화된 세계는 지성적인 계층이 절멸해 가며,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세계는 인구가 늘어간다. 러셀은 직업여성들의 자기 종족증식과 자기 성취를 위한 본능의 희생 사이에서 후계가 존재하는 이들에게 미래가 의미롭다는 것을 역설한다. 친구는 상대방의 감정 때문에 타인을 좋아하고, 애인은 상대방의 매력 때문에 타인을 사랑하기에 장점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떠나간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일반적인 감정의 상실과 변질에도 불구하고 배원질의 불멸이 확립된 생명연장의 꿈과 언젠가는 상실될지 모를 권력이 아닌, 신비적인 신념에 가까운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기적인 희생의 개념이 아닌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로 발전할 것이다. 러셀의 가족관에서 '여자'에 대한 의견은 러셀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비주체적 입장이란 사실과 감정적으로 부유하지 못한 인간들도 있다는 상대성에 근거하여 알아서 챙겨 들어본다.



Work 일


과도한 노동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모두 괴롭다. 일을 흥미롭게 하는 것은 기술의 발휘와 레닌이 했던 조직의 창설과 같은 건설이다. 위대한 예술가와 위대한 과학자의 하는 일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다만, 러셀은 위대한 예술을 창조하는 힘은 불행한 기질과 관계가 있기에 훌륭한 일이 반드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덜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남의 간섭을 받지 않고 건설적인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은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의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면 이 또한 만족을 가질 수 있다. 삶을 하나의 전체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은 점진적으로 만족과 자존심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할 것이라는 도덕을 염두에 두고 행복으로 스스로를 이끌어야 한다.



Impersonal Interests 일반적 관심사


일이 아닌 여가와도 같은 일반적인 관심사도 인간의 행복을 건설하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불행의 원인인 피로와 신경의 긴장은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의식적인 정신은 사소한 일에 매달려 휴식을 갖지 못하고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가진 직업적 형태가 아닌, 거미줄처럼 뻗친 방대한 관심사는 타인의 사생활에 전혀 관심을 돌리지 못하는 매력적인 미소이며, 세상에 대한 균형적인 감각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준다. 한 곳에 매여있는 생활에서도 계속적인 의식의 연습과 방황을 했던 기억은 짧은 시간 내에 우주적인 세계관을 정립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흥분적이고 격정적인 내부에 비해 소용돌이 같은 바깥 세계를 관찰하면서 내 안의 광신적인 폭도들을 잠재웠다. 한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위대성과 우주공간에는 한계가 없다. 운명까지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환경의 노예'에서 벗어날 지혜는 슬픔에 압도되지 않고 생명과 열의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불태울 수 있다.



Effort und Resignation 노력과 체념


중용은 인간의 우세한 정열에 따라 지배적인 권력의 형태를 달리하는 노력과 불가피한 불행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 체념 사이에서 걱정과 안달하는 감정의 그물에서 벗어나 유쾌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적절한 길을 제시한다.



The Happy Man


행복의 일부는 외부적 환경에, 일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공포와 질투, 죄의식, 자기 연민, 자기 찬양과 같은 감옥을 벗어난 행복한 신조를 선택하는 행복한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자유로운 사랑과 폭넓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며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다. 무의식과 의식이 부조화일 때 자아의 분열이 생기고 자아와 사회가 객관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통일이 불가능하다. 러셀은 행복한 사람은 이분법적으로 나눠진 세계의 통일을 이루는데 실패를 넘어 고통받지 않으며 우주가 주는 환희를 즐기고 생명의 흐름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서도 관대하다고 결론짓는다.



행복에 관한 개인적인 단상

Personal Reflections on Happiness


러셀의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인 백과사전식의 행복 논리는 활짝 열려있다.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과 달리 정복될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유연함과 정복되기 어려울 것 같은 단단함까지도 내포한 것이 행복이 아닐까 싶다. "행복"이라는 단어에 부담감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나는 내부적이고 지적인 형태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타인들이 나의 소유에 대한 무신경을 부러워하는 만큼 외부적으로도 괜찮은 상태인 것을 점검하게 되었다. 전체적인 행복의 조건들 중에서 불행의 조건에 집중되어 있었던 시절은 외관적으로 젊고 아름다웠던 상반기였다면, 그 경험을 통해 성숙해진 나의 후반기는 내면에서 충족될 행복의 조건에 집중해보고 싶다. 창조적인 충동으로 살아가는 내일이 있다면 희망찰 것이다. 네 번이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하면서 일부일처제를 반대한 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분방한 결혼관은 그의 미흡했던 가족관이나 여성관, 남녀의 성적인 관계의 정의에 있어 이 세상과 이별한 러셀에게 재설명을 요구하기가 어렵기에 부재한 그를 대신하여 달리 내용을 적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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