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에 대한 탐구. 삶의 문제에 봉착할 때, 누구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를 돌아보면서 나는 왜 이 시점에 있는지 생활은 어디로 향해 가고 정신은 왜 이렇게 방황하는 것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난, 매일 다짐한다. 이 시기를 벗어나면 그저 이 고통의 순간을 묻어두고 살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과거를 들춰내고 평온해진 일상을 뒤엎을 것이다. 네가 이렇게 서 있게 된 것은 한숨을 쉬고 가슴을 쥐어뜯고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날들을 견뎠기 때문이라고! 그것이 현재의 아픔을 최소화하는 대안적 모르핀이다. 무척 싸구려지만 밑바닥을 경험하면서 추악한 삶에서 솟는 모종의 형상을 보게 된 사실이, 날 멈추게 한다. 절벽에서 발 디딜 틈을 발견한 절박한 응시와 같다.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의 영화를 보면서, 안나 카리나(Anna Karina)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었으니까. 대로변에서 뚫린 몸뚱이를 거둬갈 자 누구인가?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겠다는 확실한 어조는 흑백의 모자이크에서 운명이 갈린다. 검은 머리칼의 여자는 말을 했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자유롭게 산다. 손을 가만히 들어도, 머리를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여도, 눈을 감아도, 담배를 피워도, 그것은 모두 나의 책임이다. 책임지지 못할 때에도 나는 책임을 진다.”
담장에 기대 나른하게 담배를 피우고, 모르는 남자가 비벼대는 입술에 흰 목덜미가 멍들어도 그것은 내 책임. 레아 풀(Léa Pool)의 <자유를 향해 Emporte-Moi>에는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이루지 못했던 꿈이 전시된다.
한 소녀가 있었다. 유대교인 아빠, 예수쟁이 엄마,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姓)은 엄마를 따른다. 아빠는 작가지망생이자 무능력한 실업자이고 엄마는 말은 패션디자이너지만 봉제공장에서 일한다. 다운증후군 가계에 우울한 정신병력. 이발소에서 스타일 없이 머리를 자를 때 눈물이 쏟아지는 것은 그저 소녀의 머리털이 잘렸기에 분출된 애도였을까? 항상 그렇다. 홀로 집에 가는 길엔 비가 온다. 우산 없이 외롭게 걷는다. 비를 피해 눈길을 사로잡는 간판이 걸린 극장으로 들어간다. 마스카라가 번진 너의 얼굴이 그립다. 우리는 같은 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내가 책임진다. 책임진다...”
무엇을?
난 나이가 어중간하게 들었는데, 어인 일이지 소녀의 고민을 따라가다 보니, 아직도 그 애 나이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죽이는 이 발악은 어슴푸레 사방이 밝아올 때면 목덜미를 내리친다. 제길, 아주 어리거나 많이 늙었을 때 겪어야 할 문제를 몇 년간 집약해서 다발로 맞으니 정말 아프지 뭔가! 철갑상어의 이빨이 부서지고 등골이 쑤신다. 나의 문체를 통해 문제를 말한다면 어떤 모양새일지. 망가져갈수록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배반적인 감상에 빠져 열심히 살고픈 깨달음.
"시들은 꽃잎, 메시지는 메시지, 노래는 노래, 남자는 남자, 삶은 삶일 뿐."
자조적인 치기로 말하기도 미안하다. 내 언어로 삶을 적어보려 한다. 지금은 습작을 반복한다. 혹시 알까? 습작이라면 엉망으로 굴러가는 테이프가 하나의 미술작품처럼 여겨질지 모르잖은가. <자유를 향해 Emporte-Moi>는 부드럽게 상처를 드러낸다. 자살을 묘사함에 있어서 공터에서 깨진 우유병 위로 누운 여자를 보여주고 그 장면에 대한 소녀의 악몽과 엄마의 절망을 교차 편집하면서 감정이입을 좀 더 손쉽게 도와준다. 그렇게 거리의 구토는, 열네 살 소녀에게서 나에게로 담뿍하게 전이된다.
깊게 잠든 엄마에게 얼굴 비비며 손을 들어서 내 머리에 얹고 이제 집에 가자 조르고, 내 목소리를 들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유치한 기대인가? 슬펐다.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듣고 못 느끼는 절망의 선택이, 불가분의 책임으로 변해버렸을 때를 생각하며 가슴이 미어졌다. 다행히, 레아 풀은 소녀를 놓아준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카메라를 들게 되었고, 왜 세상을 비추게 되었는지 스스로 설명하게 만듦으로써 주인공을 선택하고 장소를 헌팅하며 연속카메라의 스위치를 끄는 것은 바로 자신임을, 주체적인 삶의 과정을 영위하는 책임이 어떨 때 발휘되어야 하는 것인지 간단명료한 몇 마디로 말한다.
“어, 끄는 것을 깜박했네.”
맞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땐 카메라의 재생버튼을 종료시켜야 한다. 심장으로 전해지는 온기만큼 그 뜀박질만큼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자유는 멀리 있지 않다. 나를 끌어올리는 천상의 목소리, 나를 놓아주고 응시할 때 말을 걸 것이다.
2005. 7. 10. SUNDAY
매일같이 영화와 책과 그림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버릴 수 없던 기록은 현재에 매몰되지 말고 벗어나야 한다고 소리쳤다. 거짓되려면 말해야 하고 침묵하면 진실하겠지만 답답한 가슴을 펼쳐서 일말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이란 적는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예전의 영화를 떠올려보니 대사 하나하나 되씹던 시절이 떠오른다. 얼마는 기억나고 얼마는 모르겠다.
감정을 갈무리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악어의 등껍질처럼 온갖 잔상들이 솟아오를 때가 있다. 입이 거칠어지고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망 밖으로 빠져나온 기억과 감정의 혼용물 앞으로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히면, 때 아닌 반항처럼 보이는 투지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러다가 자각이 생기면 급격하게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거칠게 돌출된 민망함에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왜 그러는 건데?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은 추억이라 불린다. 아직도 어느 시점으로 기억이 당겨지면 어색한 표정으로 움찔거린다. 모든 것을 깨끗이 닦아버리고 새로 시작하려고 해도 변치 않는 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