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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TTO SU MIA MADRE, VOLVER

<내 어머니의 모든 것>, 내가 알고 싶은 모든 것, 그리고 <귀향>

by CHRIS
[TUTTO SU MIA MADRE, Pedro Almodóvar Caballero, 1999]


어머니. 아들이 어머니를 부르는 것과 딸이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그리고 딸이 아버지를 부르는 것과 아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역시 차이가 있다. 부모에 대한 태질적인 성향이 나누어지듯이 역전된 사랑은 서로의 폐부를 찌른다. 가까이서 애정 싸움을 한 사람과 멀리 애정을 나눈 사람 또한, 부름의 강도가 나눠진다. 많은 이가 사랑은 모두 같다고 하였으나 애정의 형태는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견이다. 큰 우물의 물맛은 비슷하지만 작은 우물의 물맛은 세밀하게 나눠지는 이치와 같다.

사실 어떤 형태든 무슨 상관인가. 우리에게는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가 있다. 한쪽은 곧바로 사정을 하였고, 말랐던 대지는 씨를 받아 공중에다 싹을 틔웠다. 그리고 내가 나왔다. 나는 어디에서 누워있다가 나온 것일까. 아버지? 어머니? 또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또... 원초적인 욕망을 감추지 못하고 동물적인 탐식을 반복한 반쪽짜리 인생들이 모여 온 쪽을 만들었는데, 점차 늙어가고 쇠약해지고 변해가는 그들과 달리 질병 없이 자라남에 감사해야 할까? 어머니가 나를 찾든, 아버지가 나를 찾든, 내가 어머니를 찾든, 내가 아버지를 찾든, 이 생이 준 선물은 얼굴이 변해버린 우리를 가족이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해 버렸다. 그래서 태생을 거스를 수 없는 사람들은 깊숙하게 보이지 않아도 서로를 찾아야 하는가 보다.

자식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선 참 힘이 들겠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All about My Mother> 2000년, 당시 영화를 볼 때만 해도 극심한 안구건조증에 시달리던 나는 우는 데는 소질이 없었다. 특히 페드로 알모도바르 (Pedro Almodóvar) 감독의 영화를 볼 때면 부유한 치맛자락을 흔드는 첨단 패션에 허겁지겁 침을 바르고 있을 뿐이었다. 곁들여 그의 동성애적 성향은 꽤나 흥미로웠다. 텃밭에 대한 짙은 고민. 원색적인 고백. 무너지는 눈물의 결합은 성적인 호기심이 강했던 아이에게 스페니쉬 패션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집어넣었던가.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극에 대한 경합은 끝이 났다. 색(色)은 역시 색(色) 일뿐, 사랑이란 언어는 반복을 구르고 있었으니까.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 감독의 근작이 얼마 전에 소개되었지만 <그녀에게 Hable Con Ella | Talk To Her 2002>가 최근에 본 그의 작품이다. 관계의 도덕을 상실해 버린 찝찔함에 거품을 물었다가 상징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이자고 했다. 기준이라는 것은 곧장 자신을 뛰어넘으니까. 조금은 애정이 살아있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좋다. 노트에 써내려 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로 변해버린 아버지. 한가득 의문만 몰래 적어두고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불식 간에 땅에 누워버린 아들. 차가운 침실에서 울어버린 어머니. 여자로서,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 바라봐야 하는 한 남자이자 같은 성(性)으로서의 포옹은 제자리를 거듭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문득 서러움을 갖게 했다. 변해버린 사랑을 초대하면서 꽤 오랫동안 울었던 걸로 기억한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사랑의 변조는 어느 날 일어나 버릴지도 모를 오래된 서랍장의 뒤적거림과 냉장고에 저장된 시든 과거의 발견과도 같다. "눈물로 눈을 씻는 여인만이 세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흘리기만 해야 할지. 나의 몸에서 빠져나온 욕망이 같은 이름으로 불려지고 하나가 죽고 또 같은 이름으로 불려진다. 나는 그게 참 무서운데, 그래서 결혼도 아이도 두려운데, 사람들은 그 울음에 희망을 집어넣는다. 언젠가 터져버릴 믿음. 반복되는 사랑. 나를 통해 실현하려는 꿈. 희망 앞에 서기엔 너무 작은 나. 난 믿을 수 없다. 내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그들. 모종의 사랑으로 대체된 아이, 나는 누구인 걸까.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한 아이가 있었다. 반만 알았던 그 아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엄마의 뱃속에 한없이 웅크렸지만 기억할 수 없는 태동은 살아있는 심장에서 맴도는데 차가운 길바닥에 누운 네가 가야 할 곳은 어딜까. 정지한 심장은 어디에 묻혀야 할까. 엄마일까. 아빠일까. 나일까. 저 바다일까. 너를 묻었던 그 어떤 곳일까. 너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가. 네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내 어머니이자 아버지를 만나는 날, 그땐 모든 것을 알게 될까.


2005. 2. 5. SATURDAY




VOLVER, 귀향


페넬로페 크루즈가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몰랐다. 예쁘장한 꼭두각시 인형에서 눈물 맛을 아는 여인으로 변한 모습은 메마른 기억을 끌어당겼다. 어머니에 대한 설명은 ‘그립다’는 말로 부족하다. 감로한 일상의 고독과 망향의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어머니. 그녀의 넉넉한 품에서 잠들고 싶다. 어둠이 안식으로 불려지는 공간에서 우리들의 아픔은 달콤한 추억으로 불려지겠지. 살이 섞이고 이름이 엮어져서 나의 아이는 나와 어머니의 가랑이에서 누울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의 실수에서 비롯된 오해는 서로의 기억을 맞대며 끈질기게 용서를 갈구한다. 머리를 지끈지끈 누르는 강도로 끈적한 불길이 되어 숨통을 조여 온다. 울어야 그칠 열풍의 한기 속에서, 나의 쉴 곳은 소리 없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어머니의 가슴 속일 것이다. “사랑해.. 엄마.” 노래를 들으니 눈물이 흘렀다.


2006. 10. 23. MONDAY



찾을 수 없는 어머니의 단어는 반쪽이 되어버린 모성과 변질된 부성이 되어버린 현재의 내 모습과 다르지 않다. 푸근하고 자애롭고 광활한 그녀의 사랑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자상하고 현명한 그의 사랑도 보이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이 낙엽 되어 떨어질 무렵 쓸데없이 불편하게 지려대는 오래된 냄새 속에서 다리 밑으로 쏟아버린 탄생의 흔적을 상기한다. 과거의 고통을 발밑에 밟고 밝게 웃을수록 얼굴 한편에는 찌그러진 웃음이 남모르게 휘몰아친다. 모든 영상들은 절음발이의 애수를 부른다. 하루종일 일을 할수록 멀어지는 사색의 시간들. 계속되는 변형과 생성의 시절 속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굴레는 이해할 듯 이해하기 힘든 연속의 나날 위에 놓여 있다.


이국에서 맞는 가을은 이른 겨울을 체감하게 한다. 성장의 시간이 끝나면 타인이 보호해 줄 수 있는 시절은 페이드 아웃된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봐도 대기를 뚫고 쏟아지는 찬 기운은 소름을 감출 수 없게 살갗을 파고든다. 안전한 보호막 속의 삶을 고집한다면 시리도록 신선한 공기는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공간과 시간을 빈번하게 이동하다 보면 어느 곳이 길게 누워야 할 고향인 것인지 혼동스럽다. 인간의 접촉이 다양해질수록 돌아갈 곳에 대한 결심과 의지는 저리도록 담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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