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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MOOD FOR LOVE

<花樣年華>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나의 화양연화

by CHRIS
[花樣年華, 王家衛 2000]


비가 온다.
한줄기 하얀 불꽃을 피우며 검은 천막을 찢는다.
흩날리는 빗방울 사이로 시간은 강한 빛을 뿜는다.
빗물은 차분한 가슴에 커다란 꽃으로 만개한다.

남편은 잠시 출장 중이다.
혼자 있는 방이 쓸쓸하다.

뜨거운 국수라도 한 그릇 먹을까 생각 중이다.
비탈진 계단을 내려간다. 국수 파는 가게로. 사람들이 웃음을 나누며 젓가락 질을 한다.
후- 그들 앞에 내리는 이 차가운 비,

때 이른 입김만 부를 뿐 식욕을 사라지게 한다.
그냥 집에 국수를 사들고 가야겠어.
나 혼자서 먹더라도.


아내는 일 때문에 오늘은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 없는 집에서 가만히 비 오는 소리를 듣는 건 괜히 옛 생각만 나게 한다.
TV를 켜도 재미가 없다. 전원을 끈다. 그녀의 숨소리가 그립다.
가로등 빛을 벗 삼아 잠시 비 구경이나 할까 한다.
스크린이 되어 버리는 저 비는 자꾸 그녀의 모습을 비추네.
집에 가야겠다.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옷장을 지켜본 적이 있는가.

그가 매고 있는 넥타이와 그녀가 들고 있는 핸드백.

어째서 내 것과 같은지 모르겠다.

둘은 모른 듯 스쳐간다.

그리워하는 사람의 향기를 싣고.


우리는 원래 만나야 할 인연이었을까.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듯한 얇은 벽 사이로

라디오는 같은 주파수를 가리키고

흘러가는 시간은 동일한 초침에 멈춰있다.

볼 순 없지만 공간을 맴돌던 익숙한 담배 향은

슬피 우리를 이어주고 있었다.


우린 그랬다.

서로에게 반가움을 안고 뛰어들기엔

낯선 흔적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

상대를 잠시 배반해 버린 빈 방의 흔적들.


영원히 비밀을 함께 할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우리가 끝없이 묻어둘 비밀은

알 수 없는 이국의 언어로

소리 없이 눈을 감을까.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

룸바의 리듬 같은 끈적이는 빗물에

너와 나의 그렇게 화려했던

사랑의 흔적을 묻으면서...




난 잠이 들었다.

달라붙는 치파오를 몸에 두르고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던 한 여인의 쓸쓸한 걸음.

포마드 기름에 넘긴 머리칼처럼 정갈한 한 남자가 내뿜는 고독한 연기.

화양연화(花樣年華)가 그리는 진한 여운은 기나긴 기록이 되질 못했다.


가끔은 좋은 시절이 너에게도 존재한다며 희미하게 단편적인 신호를 알리는 나의 삶처럼

영화가 흘리는 사랑의 선율은 잠결에서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스냅 샷처럼 지나갔다.

끈질긴 유혹이 되지 못하고 서툰 엇박자를 끌어당기며 간헐적으로 잠든 눈을 깨웠다.


한낮의 화려함은 이 밤엔 항상 검게 되어버린다.

그런데 저녁에 비가 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검은 방도 희뿌옇다.

지나버린 시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가.

아마도..를 나직이며 그 순간을 되짚어봐도.


이 영화를 떠올린 건 오늘 낮에 끈질기게 따라다닌 햇빛 때문이었다.

산란하며 알을 낳는 그 빛. 그걸 보며 나도 모르게 Quizás, Quizás, Quizás…를 흥얼댔다.

수많은 구멍이 뚫린 유리벽이 눈살을 찡그리게 했던 그곳에서.

이 마음이 엄숙하질 못해서 깜짝 놀랐는데 난 그런 사람인가 보다 체념해 버렸다.


함께 이 영화를 봤던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같이 잠들었고 한 사람은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을 뜬 그녀는 너무 울고 있었다.


난 당황했었다.

한 번도 그녀의 눈물을 본 적 없었거든.

손수건을 들고 몰래 눈가를 찍는 그녀.

강인하게 또박이는 말투를 던지면 곧바로 깨져버릴 유리창처럼 보였다.


영화는 어제의 기억이면서 현재를 비춘다.

어쩌면..이라고 물으면서 순간을 되돌리려고 해도

아마도..라고 답하며 안될 거라고 고개를 젓는다.

한바탕 쓸어 붓고 변해버린 기온으로

어제와 다른 곳에 내가 있음을 알린 오늘의 소나기처럼.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목소리에 잠시 그림을 그려야겠다.

키사스 키사스 키사스를 부르며..

Quizás, Quizás, Quizás…



Siempre que te pregunto Que, cuándo, cómo y dónde

Tu Siempre me respondes Quizás, quizás, quizás

Y asi pasan los días Y yo, desesperando

Y tu, tu contestando Quizás, quizás, quizás

Estas perdiendo el tiempo Pensando, pensando

Por lo que mas tu quieras Hasta cuándo, hasta cuándo

Y asi pasan los días Y yo, desesperando

Y tu, tu contestando Quizás, quizás, quizás


항상 당신에게 묻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고 왜

당신은 항상 대답하네요,

아마도 어쩌면 아마도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는 기다림에 지쳐가요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대답하네요

아마도, 어쩌면, 아마도

그렇게 시간을 버리게 되네요

생각만 하고 생각만 하면서

당신이 더 좋아하는 것으로 언제까지 언제까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나는 기다림에 지쳐가요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대답하네요

아마도 어쩌면 아마도

2004. 10. 14. THURSDAY



영화를 같이 본 사람은 누구였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짐작 가는 사람이 있긴 한데 그것도 확실치 않다. 모호하게 하루를 적어놓는 습관은 옛날의 일들을 깡그리 잊어버린 현재의 기억 상태에 대해 책망하게 한다. 그러나 지난날을 모두 낱낱이 기억했다면 괴로움으로 인해 살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그던 그녀던 그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암흑의 단지 속에 넣어둔 기억은 시간에 묻혀버렸다. 그러고 보면 과거의 나는 꽤 감상적이었다. 화양연화와 같은 옛 시간을 그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나에게 그런 찬란한 날이 있었는가는 잘 모르겠다.


직접 맞부딪힌 홍콩의 습한 날씨는 생각보다는 아름답지 않았다. 화면과 실재. 기억과 현재. 불륜이든 사랑이든 슬픔이든 좌절이든 고통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란 만남과 헤어짐의 사건을 담은 몽환적인 영상에 비해서 벌거벗은 현실처럼 초라하고 기망스럽다. 생각보다는. 사실은 그런 것이겠지. 눈을 찌르는 적나라하고 따가운 빛처럼 벗어나기엔 붉은 환영과 잔망을 남기는 그림자. 그것을 사랑이나 추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회상은 명확하지 않아서 "그때는"을 좋게만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시간에 얽매인 나이도 과장된 허풍과 같다. 무엇인가가 아쉬워질수록 인생을 담백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어쩌면,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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