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FAN ZWEIG, ERSTES ERLEBNIS

슈테판 츠바이크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우정과 고독

by CHRIS
슈테판츠바이크_태초에사랑이있었다_크리스박_박국화_카자_CAZA_춘추풀아트그룹_편지_사랑과비극.jpg [ERSTES ERLEBNIS: The Star of Friendship and Solitude] IMAGE COLLAGE DESIGNED by CHRIS


"과거는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스스로를 아름답게 포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서는 항상 향수냄새가 풍긴다. 우리들은 모두 과거를 마음속에 담고 있다. 힘들고 괴로운 과거가 있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무덤덤하게 과거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자기기만적인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의 모든 과거는 아름답다. 고통 속에도 나름의 위안이 있다. 참으로 괴로운 과거조차 미래를 살아가는 힘이 된다. 그런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슈테판 츠바이크》


난 사랑을 표현할 때만큼은 유미적인 태도이고 싶다. 엄지는 저돌적인 사랑, 검지는 지적인 사랑, 중지는 섹시한 사랑, 약지는 변태적인 사랑, 새끼는 순수한 사랑, 주먹을 쥐었다가 손가락을 펴는 순서에 따라 약식으로 분류되는 정신해부학적 정의는 사랑의 보편성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심리 테스트용 놀이라서 믿기가 어렵다. 팔팔한 날에 귀 빠진 친구를 축하해 주려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선물이 고민이 되었다.


간단히 엽서에다 사랑한다, 이렇게 쓰면 된 거지 뭐가 더 필요해?


정답!


‘사랑’이란 단어만으로 우정은 빛나겠지. 거짓 없는 감정으로 도움닫기를 한다면 뭉클한 포옹으로 돌변하는 <사랑>은 관계라는 감정의 가지들을 하나로 묶는 동시에 다양한 의미를 담는 주문이 될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Erstes Erlebnis (원제: 첫 경험)》, 대학 때 이 소설을 읽고 친구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넌 사랑의 비극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랑이 끝나면 비극이 시작되는 걸까? 가슴에 열병을 불러일으킨 이야기가 있어. 소리치는 파도와 사나운 폭풍우 속에서 꽃잎의 환영은 시리도록 강렬해지고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이 되어 타국의 미항에 선다는구나. 절망의 상황에서 광풍이 불어오면 행동이 극단적이 되는 것은 단순히 눈먼 어리석음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밤안개의 거리에서 길동무를 찾는 허약한 마도로스의 욕망 같은 진실 때문이야. 사랑, 그것은 어떤 소리일까?"


"도금한 창살에 우뚝하니 서 있는 한 남자는 [아름다운 처녀의 초록색 화관]이란 왈츠를 듣고 있어. 허름한 술집의 그 여자는 허물을 벗은 저녁의 매미야. 물기가 사라진 먼지 드레스를 입고 욕을 하지. 레미 마르탱을 마시고 돈을 저주해. 실과 바늘은 황폐한 싸움에 울먹거리며 서로의 살갗을 찌른다. 날카로운 일직선의 빛이 흔들리는 산책로와 뒷골목의 경계선에서, 외로운 남녀는 밤과 낮이 나눈 책략을 하나로 모으고 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아. 쫓고 쫓기는 아폴론과 다프네. 사자와 사슴. 늑대와 양, 사냥개와 토끼. 까마귀와 시체.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멋지니? 아니, 정말 슬픈 것이야. 위험한 정욕, 그런 것도, 능멸과 모욕으로 뭉그러진 수프 캔 같은 눈물을 흘려. 텁텁하다는 술어에 목이 마르다. 기억은 뭉그러지고 무더운 어둠이 탐욕스럽게 자라나는 새벽에는 젊은 시절의 추억을 늘어놓으면 안 될 것 같아. 불완전한 고통은 사랑의 아픔까지 불멸로 만들기 위해 죽음을 녹이는 용암으로 몸을 던지라고 유혹할지 모르거든.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반드시 폐허를 남긴다> Devastated, 전쟁인 거야, 사랑은. 그리고 사랑이 끝나면 비극은 끝을 내리지. 난 시몬 데스카의 말을 부정하겠어.”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전쟁이 없는 삶의 형태는 없을 것이고 극적인 투쟁이라 불리는 파괴적인 사랑은 전쟁이라는 말속에 크게 오역됨으로 인하여 밤에만 살아있는 광기로 변하게 될 것이었다. 세부적으로 사랑과 비극은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도 사랑을 끝낸 자에게도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도 언제나 다가올 수 있는 변약적인 슬픈 외국어다. 그 태초의 사랑을 읊으면서 우정을 쌓는 것을 ‘일’,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 내일은 그녀의 생일이다. 어제는 놀았고, 오늘은 회상하고, 내일은 편지를 써야겠다. 친구여! 우리는 함께 한 파릇파릇하고 젊은 날을 과거라는 향수 속에 흘려보내려 한다. 그리고 고민이 생거나 슬픔이 물배일 때마다 짜릿한 연가를 부를 것이다. 병들고 환멸적인 사랑의 비밀을 속삭이는 밤 골목을 거닐며 죽음과 삶의 금화를 짤랑이던 이국의 연인들을 주시할 것이다.



내일을 볼 수 없는 우리는

고향에서는 이국을

이국에서는 고향을 꿈꾼다


거울을 갖고 있었어

밖으로 시선을 두었던 까만 눈동자를

진주 같은 살결을 유독하게 태우던 조명을


신은 추악한 몰골을 보라고 건넸는데

나는 너만을 비추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거울을 찾았으면 외롭지 않았을 걸

수수께끼를 좋아하던 너는

심장에 유리조각을 넣어두었지, 투명한 눈 속에도


조각은 흩어지고 비로소 거울 되었다

어리석게 똑바로 바라보길 두려워했고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손 놓은 우리


거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너는 오른손

나 오른손 나 왼손

너 왼손


만질 수 없고 기댈 수 없고

어지러운 빈혈에 목 놓은

슬픈 방랑자들, 갈 곳은 더욱 없었다



하마터면 길이 엇갈릴 뻔했다. 거울은 모래를 녹였고 바다는 바위를 녹였고 바람을 산을 녹였지. 넌 연약한 자존심 때문에 난 골려주는 재미에 취해버렸어. 연락을 안 하고 지낼 때 사실은 두려웠어. 너와 영영 헤어질까 봐. 하지만 쭉 갈 것 같아. 그런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 너와 말할 수 없으면 즐거움이 반으로 뚝 떨어질 거야. 세상에 나온 것을 축하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선물이야. 기뻐.


2005. 8. 7. SUNDAY



"미리 생일 축하한다. 난 중국 출장 중. 주말에 돌아간다."


"에고. 축하 고맙다. 난 또 코로나 걸려서 어제부터 약 먹고 비몽사몽 중."


심심한 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혹은 머리가 휘몰아치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생을 살다 보면 끈질기고 심약한 우정이 필요하다. 책을 좋아했던 친구와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한 책거리를 했는데, 대학에서도 직장에서도 시대에 뒤떨어지게 문학에 심취한 사람처럼 전화로 몇 시간씩 책 내용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현실을 말하다 보면 깊은 한숨 밖에 안 나오니 흥미로운 것이란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의 세계였다. 지금은 일하느라 만날 시간도 적고, 가까이 살아도 각자의 생활이 빼곡하게 차 있으니 전화도 뜸하게 한다. 뚱딴지 같이 전화해 놓고는 간혹 영화나 책이야기처럼 이상한 상상에 대해 늘어놓고 있으면 세상의 시름이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 게 된다.


"재밌긴 한데 우리 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냐?"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지. 야, 나 밥 먹어야 돼."


"살 뺀다며? 굶어야 하는 거 아니야?"


"밥 안 먹으면 어지러워."


"그래,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했다. 나도 일해야겠다. 다음에 통화하자."



"침묵을 지키는 게 우정인 것이 아니다. 우정이 침묵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다."

《우정의 정치, 자크 데리다 Politiques de l'amitié, Jacques Derrida》


우정은 사랑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지식적인 생각 안에서 감정이 표류하고 지적인 사랑을 서로 나눴던 사람들은 우정의 영역에 속해있다. 이티(E.T. The Extra-Terrestrial)와 엘리엇 (Elliott)이 헤어질 때 이별을 고했던 신호는 검지를 부딪히며 나눈 서로의 깊은 감정적인 교류였다. 속되긴 하지만 역시 검지는 지적인 사랑이자 친구라고 불릴만한 만남을 대변한다고 해야겠다. 각자 머리를 식히는 방법이 여럿 있겠지만, "모든 인간은 고독하다"는 여러 철학자들의 명제를 안고서, 완전한 개별자로 존재하는 친구로서의 타자가 앞에 놓여있고, 그로 인해 외로운 자아로서의 우리가 그 외로움을 각자의 소리로 해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면 "지(知 Sophia)의 사랑(愛 Philein)이란 철학(Philosophie)"이라고 데리다가 규정한 사유에 빠져들었던 젊은 시절이 얼굴을 내민다. 데리다가 "철학자는 단순히 진리를 밝히는 학자, 교설하는 사제, 전달하는 전령이기에 앞서 진리의 친구여야 한다"라고 《우정의 정치에서 말했듯이, 나에게 삶의 철학은 복잡하거나 어려운 모습은 아니다. 고독을 인정하고 진리를 찾아 끝없는 우정에 몰입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동맹과 우정들이 서 있는 이 땅은 얼마나 불안정한가. 모든 인간은 얼마나 고독한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프리드리히 니체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Friedrich Nietz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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