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TRE À D, ANDRÉ GORZ

《D에게 보낸 편지》 앙드레 고르츠, HISTOIRE D’UN AMOUR

by CHRIS

사랑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싸움질하는 이야기나 이혼 이야기, 외도 이야기보다 시선을 붙잡는다. 재미난 것을 찾는 심심한 사람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이야기나 개인사를 까발리는 속풀이를 즐길지 몰라도 번잡한 세상에 하도 염장만 가득 친 이야기가 많다 보니 막 돼먹은 영애 씨가 쏟아낼 법한 얘깃거리는 식상하다. 오히려 순수한 열정이 희소해진 시대라 글 속에 상대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이 남아있다면 그런 질긴 인연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앙드레 고르츠(André Gorz 1923-2007)가 그의 아내 도린(Dorine Keir)에게 남기는 편지는 그의 일생을 돌아보는 회고록이자 사르트르가 고르츠를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으로 평가하게 만든 도린의 헌신과 보조에 대한 감사함,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에게 아름답고 지성적인 여인이 일생을 함께 한 시간에 대한 미안함이 묻은 고마움, 가난한 작가에게 글쓰기를 계속하도록 격려했던 강인하고 의지적인 태도에 대한 보답이 절절한 연서이며, 불치의 쇠락한 몸으로 더 이상 생을 지탱할 수 없는 도린을 바라보면서 둘 사이의 58년의 역사를 마감하고자 하는 유서가 담긴 사랑의 이야기(Histoire d’un Amour)이다. 앙드레 고르츠가 살면서 만들어 낸 삶의 의미는 도린이 없다면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표현하는 감정의 페이지를 넘기며 목구멍이 편치 않았다. 이십 대의 젊은 청년의 유약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팔십 대의 노년에 들어 생을 거스르는 종착역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는 석연치 않은 기분을 전달해 주었다. 끝까지 아름다운 상태로 보살피고 싶었던 절망적인 사랑을 지켜보는 것도 힘겨웠을 것 같다.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은 인간에게 어려운 과제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동반자살이나 자살, 타자의 살해는 가능한 한 최후로 미뤄두고 싶은 선택 사항이기도 하다. 사고사 또한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의 불가결한 운명의 종결점이라고 할지라도, 스스로 결정하는 마감만큼 비극적이지 않다고 여겨진다. 절망은 애처롭지만 죽음에 대한 미화는 어떤 이름의 형태가 되더라도 경계해야 한다. 내가 손을 더럽히지 않고 지난 수십 년간 인간의 변화와 인성의 변질과 기억의 혼용을 목격하고도 지속적으로 살아가고자 인내하는 이유 또한 이 아프고 지리한 삶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어떤 신비나 신성이 존재하지 않는 살아가는 투쟁의 마지막에 만나는 과정이며, 나 스스로 살아가면서 그 사실을 증명해야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과 의무를 돌릴 수 없는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기에 이 생이 마감되기까지 눈을 뜨고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선택에 평가를 내리고 싶지는 않지만 어디에서 걸렸는지 몰라도 문장의 느낌이 아름답기보단 툭 부러질 듯 우울해서 심사가 뒤틀렸나 보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왔던 나약한 목소리는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조차 꺾어놓을 때가 있다. 나는 삶의 구렁텅이에 빠져서 머리를 감싸고 사슴 같은 눈망울로 애처롭게 우는 모습보단, 피눈물이 흐르고 생채기로 뒤범벅이 되어 목소리가 날카롭게 갈라지더라도 표독스럽게 살고자 버둥대는 게 좋다. 이 책을 권했던 이에게 훗날 살아가는 이유와 죽음의 의미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알고 싶다면 이렇게 마음을 전하고 싶다.


타인은 타인이고

사랑은 사랑인 것

끝까지 살아남고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할 것

모든 것이 사라질 때까지

심연한 고통조차 받아들일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생이 부여한 과제인 것



[LETTRE À D, André Gorz] BOOK TITLE COVER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일기, 프란츠 카프카 Tagebücher, Franz Kafka》


앙드레의 글을 읽는 와중에 카프카의 《일기》에서 차출된 문장 하나가 눈길을 멈추게 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겁니다.” <앙드레 고르츠>


출장 중에 《D에게 보낸 편지 LETTRE À D 2007》를 읽고 이런저런 생각이 맴돌았다. 머리를 환기하는데 필요한 책은 아니었음에도 취향이 다른 이의 도서목록에서 읽게 되는 연서는 한동안 썼던 편지들의 어조를 떠올리게 했으며, 가까운 사람에게 감사의 편지를 쓰는 것도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는 자서전이 될 수 있음을 상기하게 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앙드레 고르츠를 유명하게 만든 《배반자 Le Traitre 1958》에서 출발한다. 앙드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사랑, 도린과의 인연이었다. 소박한 영국식 정원처럼 온기가 가득한 그녀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스위스계 유태인 청년 앙드레를 구제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며 둘의 사랑을 재구성하는 앙드레는 그의 모든 영광과 삶의 의미를 그녀에게 다시 쏟아붓는다. 갈색 머리의 하얀 웃음, 부드러운 미모를 가진 도린이 없었다면 프랑스의 정치 사회 문화와 경제적 노동개념에서 앙드레의 날카롭고 현명한 사상적 철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통받는 한 여인을 바라보는 한 남자는 그의 막다른 갈림길에서 물길을 헤쳐가는 연어처럼 필연적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다.



《D에게 보낸 편지 LETTRE À D》 중 글쓰기에 관해 앙드레 고르츠(André Gorz)

글 쓰는 사람의 첫째 목적은 그가 쓰는 글의 내용이 아닙니다. 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쓴다는 행위입니다. 쓴다는 것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자기 자신에게서 사라져서 결국은 세상과 자기 자신을 문학적 구상의 소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다루는 ‘주제’에 대한 문제는 그다음에야 제기되는 것입니다. 주제는 필요조건입니다. 글을 만들어낼 때 부차적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지요. 글을 쓸 수만 있게 해 준다면 어떤 주제든 좋은 주제입니다. 글쟁이는 써야겠다는 욕구를 주제가 받쳐줄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작가가 됩니다. 이때 주제는 써야겠다는 욕구를 계획으로 정리해 주거나 또는 그렇게 정리하라고 요구합니다.


당신은 종종 내가 이 책(배반자)을 쓰면서 점점 변했다고 말했지요. "그 책을 다 쓰고 나니 당신은 더 이상 예전의 당신이 아니었어요." 이것은 당신의 오해입니다. 나는 그 책을 썼기 때문에 변한 게 아닙니다. 책으로 낼 수 있는 원고를 내가 만들었고 그 원고가 책으로 나왔기 때문에 변한 겁니다. 세상에 내가 있을 자리 하나를 그 책이 준 것이지요. 그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에 현실성을 부여했습니다. 그 현실성으로 말미암아 나는 스스로를 다시 규정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타인들이 나에 대해 만든 이미지의 포로가 되지 않고, 또 객관적 현실에 의해 나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산물(책)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문학의 마술이란 이런 것입니다. 실존을 거부하면서 실존에 대해 쓰다 보니, 문학은 나를 실존에 이르게 해 주었습니다. 그 책은 내 거부의 산물이었고, 거부 자체였지만 세상에 나옴으로써 내가 더 이상 거부만을 고집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즉 나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 내가 혼자서는 규정하지 못했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말입니다. 글 쓰는 활동은 물질적 현실의 무게와 타인 앞에 나서는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듭니다.


나는 배반자를 쓰고도 내 욕망을 해소하지 못했음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고자 무(無)이고자 내 안에서 온전한 존재이고자, 객관화할 수 없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고자 하는 욕망’ 말입니다. 일단 책이 되어 나온 내 글을 나는 다시 읽는 법이 없었습니다. 책은 나에게서 벗어나 타인들에게 속하는 세상 한가운데 놓인 객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언제나 모든 것은 아직 말해져야 하는 상태로 남을 것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말하는 행위’이지 ‘말한 내용’은 아니었기에 나는 내가 이미 쓴 것보다 앞으로 이어서 쓸 수 있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글쟁이 혹은 작가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앙드레 고르츠의 통찰은 인상적이었다. 글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나를 꺼내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드는 행위는 한 생명이 세상에 나오는 출산의 결과물처럼 매력적이다. 나는 삶 이외에 더 가치 있게 서술할 것이 없기에 유심히 지난 책장을 살펴보다가 내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기로 했다. 그 깊이가 프란츠 카프카처럼 허약한 공포를 넘어 극렬한 실존에 대한 성찰로 넘어갈 수 있다면 환영이고, 엉켜있던 회로를 정리해서 새로운 문체나 화풍, 장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스스로를 설명하는 방식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다.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There is no wealth but life.” <John Ruskin>


두통과 전신 통증, 근육위축, 거미막염, 자궁내막암으로 옮아간 D의 불치의 병들. 조금은 앞당겨진 두 남녀의 이별. 기다릴 수 없는 한 사람의 죽음과 그 뒤를 잇는 행로는 앙드레에겐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요즘 들어 나는 당신과 또다시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 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실존을 현재에 놓는 것’과 조르주 바타유 (George Bataille)가 말한 ‘실존을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통이 가득한 자에 한하여 죽음을 합법적으로 선택하는 안락사가 일부의 국가에서 허용되고 있으나, 죽음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의연해지기 어렵다. 죽음을 놀이처럼 선택하는 자들도 있고, 혼자서 돌진하기 어려울 땐 공동으로 묶어 실험으로 강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혈연의 굴레가 가득한 동양권의 가족 개념과 비교하여 서구적 관념에서 사랑의 밀도와 결속의 단위는 나와 너, 단출한 애정의 권역에서 연무가 짙다. 이기적으로 갈라선 분열의 세계 속에서 내가 태어났던 끈을 힘주어 틀어쥐면서 너덜거리고 쇠락하는 순간에도 나의 피와 살을 내어주는 선택은 무슨 연유인지, 손안에 삶의 실들을 쥐고서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할 때면 무엇이 옳다고 말하기 어려운 기분에 의식의 수표면은 수직적 기압 강하로 돌입한다. 사상적 의식은 서구적인데 비해 껍질의 태생이 한국적이었던 나에게 육체의 배반을 거스르는 지각적 독립은 어린 시절부터 큰 괴리감을 선사하곤 했다. 정신적 목소리는 남자인데 사회적 외모는 여자인 그런 어긋난 배합이랄까. 도린과 앙드레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도린은 생의 마지막을 앙드레의 선택으로 마무리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현실적일 때가 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죽은 자를 냉동시켜 부활을 꿈꾼다거나 이미 시간을 달리 한, 사람을 계속 그리워하는 것은 진정으로 타인을 놓아주거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은 아니다. 글을 읽다 보니 인생의 동반자가 명석하고 유명해도 누군가의 보조 역할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강해진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 타인에 빗대어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살고 살아가며 보고 느끼는 생의 태도를 서술해야 할 필요성이 떠올랐다. 한번 더 껍질을 벗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 누구를 위함이 아닌,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갈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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