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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01. 2024

RADAR

미용실에서의 궁상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는데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헤어스타일이라고 한다. 어떤 연구에서는 90%까지 간다고 한다. 인간을 볼 때 중요 기관인 눈이나 코, 입이 세트로 들어있는 얼굴이 아니라 얼굴을 감싸는 머리카락의 모양이라니! 그럼 스님은? 그래, 모든 번뇌의 시작은 머리카락인 것이다.


머리카락은 중요하다. 얼굴은 볼만하게 생겼는데 어느 날 뽀글뽀글 파마를 하고 온 A를 보고 자동적으로 손발이 앞으로 나갔다.


"미친 거야? 얼굴이 이게 뭐야!"

"관리가 귀찮아서."

"뭐?"

"파마하면 그냥 머리가 둥그렇게 떠 있잖아. 시간도 절약하고. 풍성해 보이고."

"양배추 볶아먹는 소리 하고 있네. 당장 풀어!"

"왜? 방금 했는데 아깝잖아."

 


중학교 때는 단발, 고등학교 때는 커트. 학창 시절 주야장천 짧은 머리를 하다 보니 침대에 누워 공상을 하고 나면 머리가 항상 삐쳐있었다. 강인하게 흩날리는 말총머리에 물 묻히는 것으로는 모자라서 하늘 위로 떠 있는 머리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곤 했다. 조금만 자라면 더벅머리라 걸리면 죽는다는 '에이즈' 학생 주임한테 바리깡으로 고속도로로 밀리느니 선머슴처럼 귀밑머리까지 파고 다녔다. 당시 인기 주말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한석규가 처음 나왔을 때 학교 친구들이 치근댔다.


"내 이름 좀 불러줘. 다정하고 그윽하게. 뒤에 씨 좀 붙여서."

"얘가 뭘 잘 못 먹었나."

"목소리 엄청 좋던데. 후남 씨~"

"그게 너 이름 부르는 것과 뭔 상관이야?"

"너 석호 닮았어."


그리고 2년 뒤 <서울의 달>에서 한석규가 다시 나왔을 때 역시 반 친구들이 책상으로 다가와 웅성거렸다.


"서울의 달에 홍식이 알아?"

"그건 왜?"

"너하고 똑같이 생겼어."

"뭔 소리야, 얘가?"

"능청스러운 거 봐.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홍식이는 완전 제비잖아"

"아니, 네가 제비란 소린 아니야."

"그럼?"

"닮았다는 거지."

"말이냐 똥이냐."


남장여자가 나오는 은태경의 남자고등학교》라는 로맨스 소설도 있지만 여자고등학교에는 남자를 대신할 여자가 인기 있었다. 나는 중성이었다. 남자를 대신할만한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여자, 뭐 그런 애들의 책상 속에는 맛있는 간식이 넘쳐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남자를 대신할 우상의 여자 아이들 눈에는 내가 좋아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을 동경한 간식은 나에게 몰래 전해지기도 했다. 난 여자 같은 여자와도 잘 지냈고 남자 같은 여자와도 잘 지냈다. 여자끼리도 썸을 탄다는 개념이 없던 때에 갇힌 곳에선 얼마든지 생물적 본능이 다양하게 발현되는지 직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누군가 멋대로 머리를 건들면 기분부터 저혈압이다. 머리카락을 잡고 끌어당기는 싸움질은 엿같이 끈적하다. 대학 가면 쓸데없는 터치가 없는 세상에서 머리를 마음대로 기르겠다고 생각한 뒤로 지금까지 나의 머리는 길고 긴 머리다. 긴 머리를 한 이후론 한석규 배우는 스크린에서 더 잘 나갔지만, 닮았다는 이야기는 나온 적이 없다. 그냥 갇힌 곳에서의 이미지였나 보다.

 

난 삼손(Samson)처럼 머리카락에서 생각하는 힘이 나온다고 믿고 있다. 머리카락이 바로 세상을 향해 감각의 전지를 단 싱크탱크 레이더(THINK TANK RADAR)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 봤다. 아마 세월의 바람을 맞은 데릴라(Delilah)가 와서 유혹하면 한 번쯤 잘라볼 요량이지만 자고 나서 바로 일어나도 스타일을 바꿀 필요가 없는 긴 머리는 백발마녀가 될 때까지는 잠시 동행할 생각이다.


간만에 마음먹고 머리를 생각이다. 그전에 십구 년 전 미용실에서 궁상맞았던 어느 날을 끌어오고자 한다. 나는 밑바닥에 가라앉아도 다시 있는 엉뚱함이 좋다. 그게 나의 매력이었으니까.





일 년 만에 머리를 했다. 동네서 머리를 한 건 두 번째이다. 기술력을 믿지 못한다는 점도 있지만 팔 년 전인가 가까운 데서 해결하자는 마음도 무색해지게 말도 듣지 않는 성질 나쁜 말총머리를 미용사가 태워먹어서 발길을 끊었다. 오늘은 뭔 바람이 불었는지 머리에 변화를 주고 싶었지만 매번 하는 데로 가기엔 몸도 귀찮고 시간도 아까워서 집 근처에서 눈여겨보았던 미용실로 갔다. 미용실이 사랑방이 되어있었다. 누군지는 모르면서 남이 머리 하는 것을 그리 유심히 쳐다보다니 동네는 동네인가 보다.


“먼저 가니, 잘하고 가요.”


처음엔 나한테 하는 줄 몰랐는데 머리 손질을 다한 아줌마가 손을 흔들어서 알게 됐다. 손님이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가다니, 가까운 인심은 오지랖도 넓다.



김밥 먹겠냐, 우유를 마시겠느냐, 사이드 메뉴도 커피와 오렌지 주스라는 식상한 서비스가 아니다. 배불리 점심을 먹은 고로 아니, 언제 머리손질이 끝날지 몰라 화장실에 가기 싫다는 핑계로 결국 거절하고 말았지만 녹차 한잔은 허용했다.


후후. 


녹차를 열심히 식히느라 입을 쫑긋 불고 있는데 미용실 주인장이 청국장 다이어트 & 건강법을 보라고 건네줬다. '바실러스균이 우리 인체에 미치는 영향, 청국장 내 균들의 명칭, 청국장 제조 및 요리비법, 다이어트와 건강회복의 성공사례 비교분석.' 머리에 캡을 씌운 채로 자기엔 심심하고 할 일 없어 자연스레 읽다 보니 청국장 도사가 될 판이었다. 주절주절 희미해지는 눈을 비비는 와중에 띄는 구절이 있었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중 저자가 자연과 하나가 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했던 말들이 유독 눈 안으로 들어왔다.



사디즘은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고 상대방의 힘을 최소화함으로써 하나가 되려는 심리기제이며 마조히즘은 상대의 힘을 극대화하고 자신의 힘을 최소화함으로써 하나가 되려는 심리기제이다. 사디즘은 히틀러와 같은 무력적인 파쇼정권에서 자주 볼 수 있으며 마조히즘은 창조주에 전권을 기대려는 신자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에리히 프롬(Erich Fromm)



반복해서 읽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청국장과 관련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러다 '자유'와 '도피'라는 단어를 보고 눈알은 빠르게 퍼덕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머리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나기 시작했다. 독한 파마약이 머리칼의 단백질 성분에 투입됨으로써 빗자루처럼 건강한 머리칼을 연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머리칼의 관점에서 마조히즘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파마약은 투압력을 강하게 사용하면서 머리칼의 기운을 패대기치는 거지. 말총 빗자루가 잠시 기절할 때 적극적인 사디즘의 주체이자 행동파 요원인 아줌마는 기구를 들고 머리칼을 쓸어내리는 거야. 내외부에서 힘이 주어지고 반대로 신자인 머리칼은 힘을 빼면 대신 파마약, 기구, 아줌마 그리고 방조자이자 원인을 만들어낸 파쇼적인 내가 직간접적으로 꾸글꾸글한 머리칼의 상태를 변하게 만드는 건가.'


정신을 팔며 거울을 보고 중얼대는데 글래머러스한 몸매에서 찰랑이는 금빛 장신구들이 다시 현실로 나를 끌었다. 기다란 목, 또한 기다란 허리. 살집 있는 풍만한 상체에 비해 쭉 내려간 다리, 우아하게 컬이 진 커트. 바람 불면 날아갈 가느다란 몸매의 아줌마보다 미용사의 형상은 한마디로 화끈하고 후덕했다. 마흔 후반에서 오십 초입에 들어선 장년의 걸쭉한 목소리는 도란도란 이야기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천장을 울리는 웃음도 장부처럼 호방하고 낭랑했다. 기분이 좋아져서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에는 언제 미용실을 여셨나요? 혼자 하시면 힘든 일은 없으신가요?”


그녀는 곧 손사래를 쳤다.


“한 이년 되었나. 이 일이야 그냥 소일거리로 시작한 거요. 이것도 정말 갇힌 인생이지. 그래도 아까 봤지라? 그이는 내가 여기서 글랑 가만히 머리 말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오. 매일 요 몇 평 되지 않는 곳에서 손님을 죽치고 기다려 보쇼. 손님이 안 오는 날은 안 와서 손님이 많이 오는 날은 와서 바쁘기도 하지만 한없이 느려 터진 일이어라. 예전에야 저 밑 삼거리에서 디자이너 둘 두고 했는데 인건비 빠지고 나면 용돈 벌기밖에 더 하겠소. 한 번은 안 해야지 하고 그만뒀는데 그것도 지금까지 네 번째요."


"네 번째요?"


"글쎄 말이요. 원래 가던 길이 쉬운 법이제. 여기 말고 딴 거 할 것도 없고. 그런데 이제는 나도 이곳을 벗어나면 불안해진다요. 간판이라도 보이고 창문이라도 비치는 요 앞에 잠시 가는 것은 괜찮은데 뭔 일이 생겨서 잠시 나가 있으면 마음이 어째 불편한 것인제. 사람이란 이상한 동물이요. 아저씨랑 여행도 많이 당겼지요. 중국출장 갈 때 따라 껴서 가보고 우린 바깥 음식이 입에 맞아선지 밖에서 먹고 들어간다 하다가 멀리 차 싣고 가기도 하고. 쉴 땐 번 돈 많이 썼수다. 근디 일할 때는 거참 희안케도 돈을 못쓰겠써라. 하루종일 다리 붓게 서서 손을 펴지도 못하게 힘주고 나면 그 돈을 허티 쓴다는 게 얼마나 아까운지. 그리고 말이여라. 며칠 전엔…”


머리에 눈을 고정시킨 채 화학약품을 머리카락에 발라가며 열심히 감았다 펴는 두둑한 손을 보았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딸랑딸랑 금방울처럼 퍼져가고 당겨지는 머리에 앞으로 쏠렸다 뒤로 넘어갔다 정신이 홀딱 빠졌지만, 그 순간에 가운 밖으로 손을 내밀어 접었다 폈다 해봤다. 무심하게 잘린 손톱과 살짝 매끄럽지 않은 손. 머리가 다 되고 나서 가벼운 마음으로 쓸어봤지만 머리카락은 가볍되, 쓸던 손은 시계추보다 더 무거웠다. 하여간 머리를 하는 건, 머리 쓰는 일보다 더 궁상맞은 일이다.





[MENDING TIME] 2024. 3. PHOTOSHOP by CHRIS


이번에도 동네 미용실행이다. 다만 시공간이 이동한 빛나는 반지하의 헤어숍. 올해는 작년 칠 월에 하고 지금 하니 팔 개월 만인가 보다. 여기 미용사는 헤어드레서로 불러줘야 할 거 같다. 확실히 센스가 있다. 예약할 때 보니 문 앞 서적코너에는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가 있다. 기다림이 스릴 넘치겠다. 머리 하는 동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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