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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Mar 02. 2024

HAIRDRESSER

인간에 대한 예의

긴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면 기분이 좋다. 생각도 윤기 있게 흐른다. 길을 걸을 때 부드럽게 떨어지는 감촉은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바람 불면 어깨를 감싸는 기분이 든다. 잠잘 때도 등이 따뜻하다. 제일 좋은 점은 관리가 필요 없다는 거다. 자고 바로 일어나도 평균 이상의 모습은 관리에 게으른 사람에게 최적의 스타일이다.


매직 스트레이트를 하려면 보통 세네 시간은 기본이라 일 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의 거사를 치른다. 작년엔 한 번만 했고 오늘 하니까 일 년 못 되는 시간에 다시 한다. 나이 들면 젊을 때보다 더 관리를 해줘야 한다는데, 바쁘다는 말만 입에 달고 대충 살긴 한다.

 

재러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의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는 1997년에 쓰였고 한국에 소개된 지는 십구 년 됐지만, 소장 도서목록에 있지 않았다. 그다지 관심이 없었나 보다. 그런데 머리를 예약할 때 헤어드레서의 책장에서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Jpseph Goebells)》 외 일련의 리스트를 보고 말았다. '오호! 흥미롭다.' 이 사람한테는 머리를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를 생각나게 하는 이름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는 총기, 전염병, 철기의 태동과 우세, 역사적인 흐름에 대해 유전학, 분자생물학, 생태지리학, 과학문명사, 문자발생학 등을 대입하며 《총, 균, 쇠》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여 제시했다.


총기, 쇠무기, 말 등을 중심으로 한 군사기술의 발달, 수렵에서 벗어나 식량을 생산하고 가축을 키우면서 따라온 전염병과의 동행, 유럽의 해양기술의 발전 및 중앙집권적 정치조직의 탄생, 계층적인 사회제도의 수립 복잡한 경제구조의 변형 등의 여러 환경적인 요인들을 평이한 언어로 관찰하면서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런 다층적 변화 속에서 세계 반구의 위도와 경도로 나뉘는 지형적인 차이를 바탕으로 유산자(有産者)와 무산자(無産者)가 분리되었고, 질병의 진화 속에서 세균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한 가진 자들의 눈부신 발전은 현재의 시점까지 생명력을 연장시키며 현대 세계의 지도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저자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까레리나》의 유명한 문장을 인용해 행복해지기 위한 성공요소를 예를 들면서 인류사에서 중요한 동물의 가축화 성공과 실패요인을 끌고 왔다. 결혼 생활은 모든 것이 충족되었을 때 행복하고, 여러 요소들 중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았을 때 불행함을 예로 들었다. 즉, 결혼생활이 행복하려면 두 사람이 서로 성적 매력을 느끼고 돈, 사회적 성공, 자녀교육, 종교, 인척 등의 중요한 문제들을 합의할 있어야 하고, 중에서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나머지 요소가 성립되더라도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정말?'



난 여기서부터 막혔던 것 같다. 문장을 계속 읽으면서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에 대한 단어를 대입한 문장에서 뭔가 풀리지 않았다. '이것만은 아닐 텐데. 이리 단순해?' 멍하니 책을 쳐다보고 있는데, 헤어드레서가 물었다.


"책 재미있으세요?"

- 네. 나쁘진 않네요.

"이런 책 종류 좋아하시나 봐요."

- 예전엔 꽤 읽었는데, 오래간만에 읽어요.

"전 흥미롭게 읽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번역이 엉망이라고 하더라고요."

- 번역을 잘해도 사회과학서적은 재미있진 않죠.

"전 요즘 쇼펜하우어의 삶을 다룬 책을 보고 있어요."


우린 한 시간 반동안 아무 말 없다가 말문이 틔였다. 머리를 매만지던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 가지 언어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철학적으로도 뛰어났던 쇼펜하우어가 왜 여성 혐오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했어요. 병약한 아버지의 자살과 어머니의 끝없는 허영심, 동생과의 구분되는 편애. 삶을 읽다 보니 좀 이해는 갈 거 같더라고요."


-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르죠.


"전 예의를 가진 사람이 좋아요. 직업에 귀천을 따질 게 아니라 인성에게 귀천이 있는 거 같아요. 저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긴 하는데, 여기서 사람들을 보면 예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손님 중에 서울대 나오고 MBA 따고 사업체를 굴리는 분이 있는데, 인성은 정말 아니에요. 인사를 몇 번해도 그냥 가기에 못 봤나 보다 했더니, 직업 귀천을 따지더라고요. 너 따위가 나와 같은 레벨과 말을 섞냐 뭐 그런 거요. 그래서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저 사람 인성에 귀천이 있구나 싶었어요."


- 여긴 오래 하셨어요?


"여기요? 육 년째에요. 그전엔 길 건너에서 십 년 했고요. 이 동네에서만 십육 년 넘어가요. 건너편에서 여기로 올 때 일 년 못되게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 하고 왔어요. 그때 정말 좋았어요. 제가 알파벳으로 영어를 배운 세대잖아요. 요즘 애들처럼 원어민도 없고 그냥 선생님이 말씀해 주시는 거 듣고 따라 하던 세대요. 그래서 영어는 잘 못해요. 그동안 영어 배우고 싶었는데, 일하느라 바빴고. 더 늦기 전에 다녀오자 싶어서 육 년 전에 다녀왔어요. 자리도 한번 바꾸고 싶었고요. 여행도 하고 싶었죠. 제가 경력이 대학졸업하고부터 했으니까 인턴십까지 하면 이십 년이거든요. 그런데 어학연수 갔더니 제가 영어 제일 못하더라고요. 그때 룸메이트 친구들이 세 명 있었는데, 하나는 컬러리스트, 스타일리스트, 헤어드레서 저 이렇게 셋이었어요. 어느 날 컬러리스트 친구가 저보고 헤어경력 있으니 아르바이트해 보겠냐고 해서 면접을 본 적이 있어요. 한 곳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헤어숍이고, 다른 곳은 브라질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그녀는 머리를 부드럽게 당기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에 중국인이 운영하는 곳에 면접을 갔는데 간판 이름이 뭔 줄 아세요? '코리아나!' 웃기죠? 아일랜드에 일식집도, 중국집도, 한식집도 모두 사장이 중국사람인데, 코리아나라고 하면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줄 알 거 아니에요. 사장이 쓱 포트폴리오를 보더니 제가 경력이 십 년도 넘는데, 생짜 모르는 초보스텝 남자애를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스타일을 하나 짚더니 그 머리를 해보라는 거예요. 우리나라도 고급살롱이나 돼야지 그런 요구를 하는데. 거긴 허름한 곳이었는데 마담 같은 여자가 해보라니 웃겼지만, 그래도 그냥 했어요. 머리까지 감기고 드라이까지 해서. 그리곤 "됐어?" 이렇게 중국사장한테 이야기했더니 여자가 담배를 불더니 밖으로 부르더라고요. 밖에서 그녀가 제가 마음에 든다 그러데요. 언제 출근할 있냐고 해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고 그냥 나와버렸어요."


길게 펴지는 머리 사이로 그녀의 유학시절이 잘 스며들었다.


"거긴 아닌 거 같아서 그 다음엔 브라질 사람 헤어숍에 면접 보러 갔어요. 브라질 헤어숍은 그러니까! 제가 여중 여고를 나왔거든요. 아시지만 여자만 바글거리는 곳에 있다 보니 남자가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머리를 만지는 곳엔 여자가 확실히 많잖아요. 스텝도 여자, 손님도 여자. 그래서 제 로망이 남자가 많은 곳. 멋진 남자가 많은 그런 곳이었어요. 거기 갔더니 사장부터 헤어드레서 9명 모두가 남자인 거예요.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게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케어하는 토털샵이었는데 제가 커트부터 염색, 드라이, 펌 모두 하니까 거기 사장이 바로 잡더라고요. 거기서 바로 일하게 됐어요."


기기를 바꾸고 앞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전 한국에서 사장이었잖아요. 처음 가서 일하는데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는데 아무도 치우지 않는 거예요. 전 다른 아이들이 자른 머리카락도 쓸고, 손님이 추워하면 다들 차 먹고 수다 떠는데 손님한테 담요도 갖다 드리고, 샴푸 하는 손이 모자라면 도와주고, 손님들 밖에 나갈 때 문을 열어주면서 잘 가시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 사장이 절 부르더라고요. 다른 사람 거 하지 말라고요. 그래서 난 손님 생각해서 하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나선 며칠 뒤에 제 자리가 깨끗하게 치워져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커뮤니티에 손님들 보고 머리 자르러 오라고 알렸어요. 한국분들은 정도 많고 시간관념도 잘 지키잖아요. 머리자를 때도 음료 챙겨주시고 시간 딱딱 맞춰 오고. 브라질 친구네 쪽은 손님들이 한 시간도 늦고 매너도 그냥 그랬어요."


- 우리나라 사람들이 책임감도 있고 생활력이 강해요.


"그러게요. 프랑스에 있던 친구가 태풍이 왔을 때 가게에 갔더니 자기만 와 있더래요. 다들 태풍 온다고 집에 있는데 일하러 간 사람은 한국 사람이란 거죠. 근데 그거 아세요? 제 손님 중에 이탈리아 남자가 있었어요. 엄청 잘생기고 스타일도 간지 나는. 제가 눈썹도 다듬어주고 그랬거든요. 그 친구가 가고 나면 헤어드레서 친구들이 몰려와서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너무 멋지지 않아? 잘생겼다. 죽인다.' 근데 그 이야기를 하는 애들 속눈썹이 모두 길게 말려있는 거예요. 손톱에 색색의 매니큐어도 있고. 뭔가 불안해서 거기 친했던 친구한테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홉 명 중에 결혼한 한 명만 스트레이트고 나머진 모두 게이란 거예요. 참나, 그러니까 우린 모두 경쟁자 관계란 거죠! 어쩌면 운도 지지리 없는지. 나중에 클럽에 갈 때도 이성을 볼 때도 우린 같은 방향이었어요. 그래도 친구들은 얼마나 스타일에 관심 있는지, 좋은 애들이었어요. 나중에 제가 연수 끝내고 올 때 이별 파티만 이 개월하고 왔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머리가 끝나감과 동시에 거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거의 끝났는데, 육 분 뒤에 머리 헹구고 마무리해 드릴게요."


부지런히 바닥을 쓸고 정리하는 그녀 뒤로 시계가 다섯 시를 향하고 있었다. 두 시간 반이 정말 훌쩍 지나갔다. 가까운 곳에서 머리도 잘 만져주고 흥미로운 책장을 갖고 있는 헤어드레서와 함께 한 오후, 길게 펴진 머리 위로 햇살이 환하게 퍼졌다.  


      



"민족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것은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 사람마다 삶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은 각 인간의 태생적인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다.


헤어드레서가 말했던 인성의 귀천과 비슷한 해석인데, 사회 속에서 성장하면서 길들여진 인간은 각자 겪은 삶이 스스로의 성격과 본질을 구성한다는 말과 같겠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그리고 책 속에서 더 이상의 해석을 방해했던 《안나 까레리나의 운명론도 다시 규정하고 싶다.


- 행복한 사람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총체적 행복의 획득은 모든 것이 갖춰져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성공의 귀착점이 될 수 없는 시간의 분절 속 한 순간이며,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행복한 순간을 얻느냐 잃느냐로 나뉠 수 있겠다.


불행하다고 해서 실패로 규정하면 너무 섭섭하지 않은가? 불행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실패하지 않은 인생은 또 어디 있겠는가. 놓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시 잡으면 된다. 잡을 수 없다면 담백하게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다.


불행해도 행복으로 가는 길을 많다.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가 술술 읽히기에 쉽다고 생각했다. 퓰리처상을 탄 베스트셀러 작가의 백만 불짜리 책 보다 동네 헤어드레서의 인생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GUNS, GERMS and STEELS with a HAIRDRESSER] 2024. 3. CH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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