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세계, 끝이 없는 피안. 지루한 삶의 위안이자, 죽음과 아픔의 고통까지 사라지는 희망의 땅. 어른이든, 아이든 상상을 믿는 자들이 떠나는 환상의 놀이터. 그곳에 이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네버랜드를 찾아서(Finding Neverland)>
바람 신령이 어느 예쁜 처녀와 연애질 하는 재미에 푹 빠졌나 보다. 북풍을 담아 논 풍선 주둥이를 잘못 간수한 것인지 날씨가 얼마나 스산한지 모르겠다. 귀에 한껏 휘파람만 불고 지나가는 겨울의 발꿈치에서 지금쯤이면 낌새를 알려야 될 봄의 치맛자락을 꽉 붙잡고 있다. 이거 나라도 한마디 해야지.
“여봐, 그만 놀고 봄 아가씨를 놓아주지 그래?”
추웠다. 집에 쓸쓸한 발걸음을 끌고 들어가기는 허전해서 뜨끈한 어묵국물을 사 먹는 대신 극장에서 몸을 녹이기로 했다. 갈 곳 없는 나는 ‘네버랜드를 찾아서’ 행복하고 온화한 방석에 푹 파묻혔다.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을 돌린 곳에서 어린 시절 책갈피마다 새겨두었던 왕성했던 열정과 끝없던 호기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높고 푸른 하늘을 날고 싶었던 꼬마가 농장에 숨어 오리궁둥짝 깃털을 뽑아 머리에 꽂곤 하던, 팅커벨과 피터팬은 뒷집 강아지가 잠들면 창문을 넘어 찾아올 거라며 기대감에 잠 못 이루던, 갈고리로 콧구멍까지 채어갈까 챙 모자 쓴 아저씨가 보이기만 하면 코를 한껏 막고 다니던, 악어가 삼킨 시계는 아직까지 뱃속에서 째깍거릴까 동물원 구석에 웅크리며 귀 기울이던, 처음 태어난 아기 웃음에 어느 요정이 반짝거릴지 어느 산부인과 조리원을 서성거리던, 그랬던 그 어느 날이 뭉글뭉글 구름이 되어 커다란 화면 위를 떠 다녔다.
다 큰 처녀가 꼬까신에 담은 믿음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난 아주 많이 그렇다. 더 늙기 싫어선지 아니면 이 까칠한 세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선지 괜히 사는 게 벅찰 때마다 해를 반사한 거울을 살짝 훔쳐보곤 속삭인다.
‘야! 거기 있니? 적당한 시기에 네가 사는 멋진 세계로 초대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겠지.’
‘그래, 오늘만. 아니, 내일만 참아 볼게.’
너무 숨죽여 이야기한 걸까? 덕분에 시간만 많이 흘렀다. 틱탁. 틱탁. 틱 탁탁. 악어의 컴컴한 동굴에서 끊임없이 흐르던 시계 소리만 골방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진다.
소리가 약해. 다시 눈을 감아볼까? 아, 이런! 많은 이가 간직했던 네버랜드가 있다. 꿈이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펼쳐지는 놀라운 서커스. 현실이 초대한 상상.
'그렇구나, 극은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제임스 매슈 베리(James Matthew Barrie). 사실 나는 그가 《피터팬(Peter Pan)》을 쓴 사람인 줄 몰랐다. 평도 보지 않고 간단한 소개도 읽지 않고 영화를 보는 게 너무 익숙해졌나 보다.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 어렸을 적 사랑했던 책의 저자조차 기억하는 못하는 머리로 퇴색해 버린 지난날을 그린다는 게 슬프기만 하다.
‘난 너무 커버린 걸까? 넌 기억하는 게 뭐니?’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기억의 부재가 못내 아쉬웠던 것인지 집에 오자마자 무거운 고개를 떨구며 잠이 들었다. 꿈에선 많은 이들이 등장했다. 현재 나를 내리누르는 짐들이겠지. 기차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 다들 편한 얼굴이었는데 떠나가는 그들을 지켜보며 왜 나만 찡그린 표정으로 발을 굴렸을까? 극을 보고서도 쉽게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인지 잠에서 깨고서도 머릿속이 텁텁하다. 사라질 모든 것에 조각난 삶이라도 묻고 싶어 조급증에 빠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극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노는 것. 문자 그대로 ‘Play’. 즐기는 게 아닐까요.” “그래. 그냥 즐기면 되는 거지. 평론가들, 그들이 변질시킨 거야. 너무 심각하게 만들었어.”
극 중, 제작자이자 극장주인 찰스와 극작가 베리의 대사다. 맞는 말이다. 어느 순간 비평(評)이 등장했고 제작자와 관객, 극(劇)은 평론(Critic)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별거 아닌 작품도, 보지 않은 자들도, 모두 한 마디씩 말하게 만든 비평. 과연 누가 조종되는 것일까? 하지만 나에게 꿈을 주는 극을 보고 그 감상을 적는 건 일종의 취미가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하겠어.
“일기를 써 본 적 있니? 연극작품은?” “전혀요. 전 글 쓰는데 재능이 없어요.” “써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 “자, 가죽공책과 멋진 제목이다.” “이건 왜요?” “명작을 쓰기 위해선 필수란다. 너의 이야기를 한번 써보렴.”
제임스 베리가 피터에게 말했던 이 이야기는 실제로 그들이 나눈 대화였을까? 글쎄? 전부 다는 아니었겠지.
‘이 영화는 사실에 근간하여 지어졌으나 사건과 인물의 성격은 일부 변조되었음을 알립니다.’
모든 크레디트가 거둬지고 타이틀을 접기 전에 살짝 등장하는 이 자막처럼 영화가 피터를 위해 쓴 것일지, 아닐지조차 시간 외 사람들인 우리는 알 수 없다. 사실 극은 모두 진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공상의 세계는 존재한다. 뜬구름 잡는 깃털임에도 그걸 믿게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또한 허상이라 생각한 것이 현실에 진짜로 나타나는 것은 어떤 연유인가? 보고 있는 순간만은 그리고 모든 게 끝난 후에 감도는 여운까지도 보고 있는 자나 극을 행하는 자나 극을 썼고 극을 만들었던 자 그 모두가 저 안에 존재하는 건 진짜일 거라고 자신만의 상상을 불어넣었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달에 착륙하고 싶다는 기대도, 우주에 집을 짓겠다는 포부도, 블랙홀을 탐험하겠다는 의지도, 혹시 닥칠 외계인과의 우주전쟁을 대비하여 공학을 최첨단화하려는 비밀스러운 계획까지 상상을 하는 순간 절반은 현실의 검은 방에서 이루어지고 절반은 미래의 푸른 방에서 그물을 친다.
그제 녀석과 통화를 하면서 부은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괜히 툴툴거렸다.
“... 난 쉽게 죽진 않을 거다.” “네가 그럴 놈이냐. 물감 대줄 테니 그림을 그리던, 읽어줄 테니 글이나 써보는 게 어떻겠냐?” “그럴까?”
그럴까? 그럴까. 시간도 내 것이 아닌 지금, 이 시점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상상을 굴리는 것 밖에 없다. 자꾸 쳐지는 마음이 스스로 민망스럽다. 이렇게 병든 닭처럼 비실비실거릴 줄이야. 정말 충격이야! 하지만 뭔가 하려면 대형사건이 연발로 터지니 열만 받고 움츠려 들기만 할 수밖에. 가죽공책과 멋진 제목은 없어도 뭐라도 적어봐야겠다. 누군가의 말처럼 거창하게 써 본 적은 없지만 사실 써보지 않고 어떻게 알아. 근데 뭘 쓴담? 그래. 일기를 빠득빠득 쓰던지 상상을 날리던지 오래전에 묻어둔 네버랜드를 찾아보자. 난 꼭 저 하늘을 날아가고 말 테니까.
2005년 2월 말에 적은 일기를 본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난날고 싶었다. 날개가 잘렸다면 달리고 싶었다. 다리가 잘렸다면 기어가고 싶었다. 팔이 잘렸다면 너무 아플 거 같았다. 글도 쓸 수 없고 그림도 그릴 수 없으니까. 누가 욕을 해도 살고 싶었다. 난 나를 낳아준 심장을 여기에 버려둔 채 눈을 질끈 감고 탈출을 했다. 나를 찾아서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리고 정리가 필요해서 다시 돌아왔다. 변함없는현실과 그대로인 사람들 속으로. 나와 너를 그리기 위해서 지긋지긋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솥단지 안에 심장을 넣어두고 그냥 불을 놓아버렸는데, 그 안에서 반짝이던 심장이 상처만 받은 채 녹지 않았다면 말이다.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뜨겁다고. 힘들다고. 꺼내달라고. 내 안을 뒤집다가 속이 긁는 느낌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왜 뒤집었을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지 않다는 걸 보고 싶어서였을까? 잊지 않았다는 걸 듣고 싶어서?
내가 '정리'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패션을 그만두는줄 안다. 밥은 먹고살아야 하니까 계속 하긴 할 건데, 어쩌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의 패션은 종식될 수 있다. 오늘 패션에 대해 생각하다가 '왜 껍질만 패션이겠어?' 그런 물음을 던져봤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세상에다 펼쳐보면 좀 시원하지 않을까? 재잘거리던 아이들을 풀어놓으면 그 웃음소리에 덩달아 웃고 있지 않을까?
나는 항상 그렸던 지난날의 상상을 펼치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아마 심장 속의 나와 머릿속 너의 알 수 없는 그 중간 정도가 아닐까? 블랙홀처럼 펼쳐지는 시공간의 세계. 그래서 지금 난 '패션(FASHION)과 열정(PASSION) 그 사이'에 서 있다.
[FINDING MYSELF] The Forbidden City. 2007.12. SELF-PORTRAIT by CH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