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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ENVENUE À GATTACA

<가타카> 여덟 겹의 통로를 지나

by CHRIS
[Bienvenue à Gattaca] MOVIE POSTER

"나는 몸을 빌려주었지만, 너는 꿈을 빌려주었잖아."

"우리들은 저 행성들이 그러했듯 별에서 왔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싱싱한 꿈은 우주를 향해 날아가고 병든 몸은 불 속으로 사라진다. 유전형질은 계산할 수 있다 해도 타인과 부딪히며 산수를 발생시키는 삶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까? DNA의 염기서열을 형성하는 주요 네 가지 형질은 구아닌(guanine), 티민(thymine), 시토신(cytosine), 아데닌(adenine)이다. 구아닌(G)과 아데닌(A)은 퓨린(purine) 염기, 티민(T)과 시토신(C)은 피리미딘(pyrimidine) 염기이다. 구아닌은 시토신과 결합하고, 아데닌은 티민과 결합하여 이중 나선 구조를 형성한다. A, T, C, G 염기쌍으로 이루어진 수십억 개의 염기서열이 결합하여 유전정보를 암호화하고 인간의 성별을 구성하며 생물종을 우성과 열성으로 분리시킨다. "가타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열렬한 환희로 인식되지 않는 것은 꿈을 담은 미지의 세상에 대한 탐사가 계층을 나누는 분열의 디스토피아가 될지 모른다는 예감 때문일 것이다.


영화 가타카(GATTACA)는 앞서 언급했던 인간 DNA를 구성하는 네 가지 염기인 구아닌(G), 아데닌(A), 티민(T), 시토신(C)의 이니셜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인간의 운명은 유전자 조작이나 유전자 공학을 통해 변형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여덟 겹의 껍질 속 가타카에서 누락된 신의 아이들이 하찮게 취급되는 가까운 미래. 선택된 사람만이 우대받는 돌탑에서 승리자의 혈액을 터트린다. 심장도 약하고 눈도 흐릿한 열성인자나 조기 죽음을 예고받은 외톨이는 기계의 예측을 뒤로하고 시간의 혜택을 누리며 토성으로 향하는 꿈의 우주선에 탑승할 수 있을까?


가타카에 발을 내디딘 순간, 나는 두통과도 가까운 아픔을 느꼈다. 탄탄한 시나리오, 테크놀로지에서 인간으로의 회귀를 역설하는 영상, DNA 총체를 깔끔한 구성으로 설치한 무대미술, 저속의 배경음과 빈센트(Vincent), 제롬(Jerom), 모로(Morrow), 유진(Eugene), 후버(Hoover), 카시니(Cassini), 이 의미심장한 이름들의 함의와 기원까지, 복합적으로 미래의 심상을 조합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기술적인 진보가 감수할 생활의 제반 통제, 그 현상을 적나라하게 희화화한 <트루먼 쇼 The Truman Show>와 <시몬 S1m0ne>을 만나면서 알게 된 이름, 바로 앤드류 니콜(Andrew Niccol) 감독이었다. 먼저 서늘한 유머가 놀라웠다. 타인에 대한 숱한 관심조차 숫자나 이미지 광고로 도표화하고 그 형식에 길들여진다는 건 개인에 대해 다수가 행할 수 있는 무심하고 무서운 방조로 보였다. 타인을 응시하는 단순한 놀이에서 시작된 대중의 호기심이 기회조작과 희소선택에 귀중한 한 표를 줌으로써 수많은 낙오자들에게 한가닥 삶의 희망을 빼앗는 매체폭력을 탄생시킨 게 아닐까 하는 불유쾌한 인식에서 쉽게 탈출하기 힘들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행복까지 점지할 수 있는가? 그러나 행복의 조건보다 앞선 것은 변수를 내포한 인간의 주체적인 의지이다. 앤드류 니콜은 말한다. 대도시와 미디어박스, 사이버 세계가 가질 수 있는 내일의 희망이란 거짓 없는 사랑을 찾아서 먼 여행을 떠나는 거라고. 꿈이 판타지를 이뤄낸다면 위안의 포옹이 풋풋한 꽃다발을 들고 있을 것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재미없는 날들도 이겨낼 만한 것 같다. 눈을 뜨고도 살갗에 기록된 바코드만 갈아 끼우면 속은 이미 그 사람이 아닌데, 여전히 <그>라고 믿는 가련한 시각의 허물은 벗어야 한다. 별을 보며 꿈을 놓지 않고 싶다. 새벽의 별은 해를 마중 나간다. 빛과 어둠의 경계조차 사라진 지금처럼 언젠가는 일곱 색깔 무지개를 그리면서 살 수 있을지,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만은 믿음을 잃지 않는 자유로운 별이 되고 싶다.


2005. 9. 11. SUNDAY



영화에 미쳐 살던 게 언제인데, 지금은 섭취를 멈추었다.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새로운 화면을 토해내야 하니 계속 덧칠하는 것도 힘들다. 심박이 터질 것처럼 달린다면 살기 위해서 분명 멈춤도 필요하다. 항상적인 하이 레벨의 유지는 인간의 지구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바삐 걷다가도 망연히 벽 같이 높아 보이는 장애물에 부딪힐 때가 있다. 오랫동안 막혀 있었던 그날의 기억으로 회귀하면 바닥을 기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유를 향해 도약하고 싶으면 죽지 않을 만큼 실재를 알아보도록 대상에 아주 세게 부딪히거나 하늘 밑에는 드넓은 이 있음을 인지하기 위해 아래로 처박혀 봐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나는 연습을 하지 않아서 나는 방법조차 알지 못했던 시절을 넘어설 수 있다면 말이다. 미래는 누구에게나 불확실하다. 그리하여 인간의 운명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의미가 생기게 된다. 최고를 위한 유전자 조작이 전혀 의미가 없을 만큼 인간 본연의 성질에 대한 선택과 집중은 반전스럽게도 인간의 영역이 아닐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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