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광시곡> 셰익스피어를 향한 요정들의 리허설
“우리는 꿈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존재, 우리의 짧은 인생은 긴 잠으로 막을 내린다.”
<알 파치노, 뉴욕 광시곡 | Al pacino, in Looking for Richard>
배우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요정일까? 역할의 모자는 관객의 시선에 의해 벗겨지고, 의미를 잃은 말은 그들의 가벼운 입맞춤에 비틀린 경멸을 던진다. 감정이 살아있어 비밀스러운 정수리는 달빛에 반짝인다. 연극무대를 응시하고 있으면 배우를 생각하기보다 배역, 그러니까 인물에 먼저 빠져들게 된다. <뉴욕 광시곡 Looking for Richard>, 카메라를 매개로 하는 연극에 대한 고찰. 연극의 아버지 셰익스피어의 잔인한 배우, 리처드 III를 해부하는 알 파치노의 다큐멘터리. 플롯의 유혹이나 유명한 배우들의 집합 때문에 이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약강 오보식 발음을 하지 못해서 미국 배우들이 영국의 전통에 꿀리는 것도 아닐 것이고.
케네스 브레너(Sir Kenneth Branagh)의 극들을 몇 번 본 기억이 있는데, 그다지 명확하게 감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머릿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버렸나 보다. 나는 악당이라고! 셰익스피어가 주목받는 이유는 인물들의 개성이 현실 속의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처럼 다양성이 뚜렷하다는 점과 신화에 연결된 개인의 욕망과 악성, 배신과 음모, 그에 대한 현실과의 화해를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극적으로 훌륭하게 투영시켰기 때문이다. 어두운 막장을 열고 다른 시대, 다른 사람의 몸속에 안착한 느낌은 편안한 소파 위가 아니라 바늘방석에 앉은 듯 거북스럽고 따끔거림을 부른다. 셰익스피어는 어렵나?
《리어왕》, 《햄릿》, 《맥베스》, 《오셀로》,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밤의 꿈》, 《말괄량이 길들이기》 《베니스의 상인》. 혼자 있을 때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극이 주된 목록에 오를 것이다. 그는 단어 하나에 표현을 실을 때도 있고 문장에 뜻을 넣을 때도 있고 문맥에 예지를 함축할 때도 있다. 그래서 재탕이 지루하지 않은 작가 중에 하나이다. 까다로워도 요리의 이름을 다양하게 붙일 수 있는 레시피를 내장하고 있는 신선한 재료 같다.
알 파치노의 다큐멘터리 작업은 과거와 현재, 영국과 미국, 연극과 영화, 전문가와 대중, 리허설과 본극(本劇), 극장과 거리, 역할과 성격, 질료와 해석, 배우와 감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연극적 상상의 공간을 실험적으로 재단한다. 알 파치노가 말했듯이, 이 필름은 리처드 III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연극에 대한 진중한 스케치이다. 셰익스피어의 생각을 열어보고 인물들의 행동을 분석하며, 보이는 이미지를 배우로서 재고하는 연구서이다. 꼭, 사생아로 태어난 아들이 진짜 아버지의 족보를 비밀스럽게 훔쳐보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 세상은 우리의 말장난으로 상처받고, 다시 말장난에 의하여 치유되면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침묵이 오래되면 썩을 것도 없다는 사실만이 삶이라는 값어치의 영원함을 증명해 줄까. 인간의 랜덤한 영역은 의문의 가장자리에서 타오르고 미혹의 중심부에는 회한의 결정들이 단단하게 굳어진다.
2005. 9. 25. SUNDAY
타인들 앞에서 추구하고 있는 미래상이나 머릿속의 이야기를 설명하다 보면 오늘은 어떤 연극을 하고 있나 되묻게 된다. 시간과 공간의 한자리를 떠맡은 극 중의 배우처럼 무엇인가에 홀려서 가상의 세트 위에서 감정과 생각을 실어 나르며 미래를 투영하는 작업은 투명한 세계의 청사진을 펼치기보다 한바탕 장황한 연설을 하고 있는 기분에 휩싸이게 만들기도 한다. 행동하는 나는 삶의 한 소절을 적어 놓은 극본을 얼마나 진실하게 전하고 있는가? 판을 깔아놓고 늘어놓은 장기말의 진행을 스스로 설명할 수 없을 때나, 구상에 투여한 시간에 비해 스스로도 상상의 형상을 미진하게 펼쳐놓을 때 낯 뜨거워지기도 한다.
무엇이든 만들다 보면 시작의 단계에서 부족함은 기본으로 깔려있다. 그 허전함의 여백을 채우는 것은 대상을 바라보는 변치 않는 관심과 변화에 대한 뜨거운 애정일 것이다. 내 안의 불꽃이 사라지지 않았음에 안도하다가도 맥없이 지쳐갈 땐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의지를 지지하는 열정은 어디에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자유로운 형식과 강렬한 감정적 표현을 담고 있는 광시곡(狂詩曲)처럼 다채로운 삶의 주제를 결합하고 변주하고 가미하는 재능이 이 건조한 서울의 하늘에서 끝나지 않기를, 그리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더라도 자유인의 기질은 잃지 않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를 끝까지 흥얼거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긴 잠으로 짧은 인생의 모든 꿈이 막 내릴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