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Peste, Albert Camus] PHOTOSHOP EDITED IMAGE by CHRIS
페스트는 고독하면서도 고독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공범자로 삼는다. 이 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수십 년간 가구나 속옷들 사이에서 자면서 생존할 수 있다.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휴지 같은 것들 틈에서 참을성 있게 살아남아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고통을 주기 위해 또다시 쥐들을 흔들어 깨울 것이다. 어떤 행복한 도시라도 쥐들의 공격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La Peste, Albert Camus》
인류를 공포에 밀어 넣던 역병, 페스트는 지금은 그다지 경고성이 짙은 병원체가 아니다. 청결함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주변을 소독약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이 진득한 병균 집단으로부터 새롭고 강력한 병균 집단 속으로 인류를 밀어 넣지 않았던가.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인간사회에 공포를 드리운 페스트의 속성과 전파방식, 은폐과정, 죽음의 인결(因結)은 무섭도록 인간의 악성과 닮아 있다. 페스트가 창궐하는 도시는 SF(Science Fiction) 공상과학의 결합물인 배트맨이 등장해서 거리에 즐비한 쥐똥을 먹어치우지 않는다면, 영화에서 볼 법한 암울한 고담시티처럼 대지가 검은 고름을 짜고 내부에서 곪고 있던 응어리와 더러운 피를 내뿜을 것이다.
사회가 평온하면 사람들은 깊은 잠을 잔다. 이 고요함 속에 잠재된 악의적인 본질의 발현일지 모르는 숱한 징조들이 나타남에도 그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또 무엇일까? 중세의 멸망을 이끈 각종 전염성 질병이건 현대의 과학전이 부르는 미생물의 변종이건 간에 전쟁 중 죽음을 야기시키는 것은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 어느 나라든 어떤 기관이든 고위직은 한 사람의 죽음이나 잘못된 행동이 부르는 파장이 사회로 번져갈 때 자신들의 직급과 위치가 불안하게 됨을 두려워하여 사실을 알리지 않고 공개하기를 보류한다. 대중들을 아끼고 보호하겠다고 선언하는 권위적인 사람일수록 언제나 부관적인 자세일 수밖에 없다. 일이 나빠질 때 모순적인 비관론으로 급변하여 변명의 여지조차 남겨놓지 않는 그 비열함까지 관리들의 전형적인 보수성과 자리 고착의 지향, 탐욕과 위선, 혐오, 나태, 직무유기를 비롯해 여론의 비난을 무마시키기는 행태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유사한 점이 많다.
난세에 있어 대중적인 구제방식의 진행은 위가 아니라 아래부터임을 관찰해 왔는데, 하수구에 독가스를 주입하는 과학적인 구제역이라던지 물 공급의 경계나 청결의 고집은 누가 실천하는지 살펴보자. 이념적이고 관념적이던 형식주의자가 인간적인 진실의 허망함을 알게 되는 계기는 언제이던가. 바로 어린아이와 산모의 죽음을 겪고, 병자들을 돌보고, 미사를 드리는 실제적인 혼동이 만연한 뒤에서야 목구멍이 포도청이 된 일반인들이 그 탈출구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약간의 진실이란 개개인의 인간과 우리들의 삶이 부르는 행위는 굳게 믿고 있던 막연한 환상을 깬다는 사실이다.
집단적인 역사의 한 장으로 그려질 페스트는 공포와 반항의 기록이다. 책이나 영화, 음악, 그리고 한때 겪었던 지리한 경험 속에서 곤궁함이 공포보다 강함을 보았다. 이 비슷한 감상의 대리자인 페스트는 기억력을 존재시키지만 상상력은 갉아먹는 특이한 부작용을 몰고 온다. 과거는 남아 있지만 미래는 더 이상 없다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실천자들은 더 이상 떨어질 곳조차 상실한다. 기억과 희망이 없어지면서 현재만이 남는다. 냉정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막상 비판적인 감각의 외모는 상실하고 만다. 가치 판단이 봉쇄되고 눈을 찌르는 햇빛은 도시의 술렁거림 속에서 강렬히 빛을 내뿜는다. 살아야 한다는 맹목적인 집념으로 저녁마다 음울하고 충실하며 무딘 발소리를 전해주는 것은 숨 막히게 하루를 발 굴렀던 자신의 목소리일 뿐이다.
구제역 방역 차원에서 개인들은 매일 스스로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오늘이라는 시간이 거룩해 보일 것이다. 병원체는 스스로 경계해야지 자칫 방심하다간 숙주전이가 되어 남의 얼굴에 입김을 뿜어 넣고 지독한 병독을 옮겨버리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누구의 몸이든 자연스럽게 안착하는 병균일 것이며 그 외의 것들인 건강, 완전함, 순결성은 늦춰서는 안 될 소지의 소산이다. 역사를 통해 뿌려진 일 억의 시체는 흔적도 없이 상상 속의 한줄기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시체가 썩었던 연무의 영향은 강하다. 항상 비슷한 얼굴로 도처에 고개를 든다.
페스트가 퍼지면 많은 이들이 귀양살이를 한다. 공허함이 감돌고 시간의 걸음을 재촉하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어리석은 욕망이 뻗치고 고독에 잠긴 이들은 추억에 불타는 자살을 감행한다. 페스트와 그 소름 돋는 진행 형태까지 닮은 걸 악(惡)이라고 불러본다. 한 인간이 악과 대처하는 감정 변화를 살펴보면 이렇다. 정열 – 의욕 – 희망 – 노력 – 좌절 – 고뇌 – 숙고 – 절망 – 무심 – 회상 – 평온... 타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결국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잡다한 허풍 속에서 어느 시간까지 소급되는 기억들이 불려지고 현재의 자신으로 반원을 그리며 씁쓸한 미소만 입가에 남긴다. 그래서일까. 추상적인 것과 싸우기 위해선 다소 추상을 닮을 필요가 있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시린 푸른 하늘의 머나먼 빛깔과 뜨겁게 호흡하는 흙 내음의 자각처럼 비릿한 현실 속에서 페스트의 향기에 너무 취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04. 11. 1. MONDAY
심리적 자각을 일으키는 사회 고발성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밖으로 향하던 눈길이 내부로 쏟아져 내린다. 스스로 현재를 정리하기 힘들 때마다 복잡함을 정리해 줄 기억들을 소환한다. 한때 지구를 뒤덮은 흑사병(Bubonic Plague)에 관한 진지한 성찰은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존을 지킬 수 있는지, 또한 어떤 고난이 닥쳐도 타인에 대한 진심 어린 관찰을 지속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잃어가는 와중에도 굳건히 과거를 돌아볼 의지를 가질 수 있는지, 앞이 캄캄해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의지와 철학을 묻는다. 수습하기 어려운 절망적이고 고립적인 상황은 모든 순간이 종료되기 전까지 비정기적으로 몸체를 엄습한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삶에서 목표하는 것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그것은 생의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하루를 살아가면서 아무리 뒤집어봐도 내일의 패가 보이지 않을 땐 잠시 멈춰본다. 굉장히 고독했던 날들엔 결벽했던 죄들과 부대끼며 힘겹게 생존하였다. 이젠 가볍게 고독해야겠다. 피부를 감싸는 공포의 무거움을 떨구고 다리 밑을 몰래 기어 다니는 냄새나는 쥐들의 눈길을 무시한다. 그대의 입에서 부서지는 부조리한 몽상의 단어에서 일어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