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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Leo Tolstoy). 그는 장편보단 단편에 더 힘이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것도 《바보 이반》이나 《대자 代子》, 《세 아들》이 등장하는 러시아 동화책에서 시작되었으니, 짧은 언어에 더 많은 애정을 두는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속에서 분출되는 자기 편애적인 의견보다는 사람들의 녹록한 체취가 묻은 지혜나 민간에서 전해오는 평민들의 설담(說談), 슬라브 전설을 바탕으로 구성한 이야기들은 악마들의 속닥거림조차 우매한 인간들의 환락과 이기심에 분장거리는 말투로 일침을 놓는다.
너무나 잘 알려진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는 책으로도 시도했고 영화로도 봤는데 주절거리게 긴 인생사는 지루하게 위엄만이 가득하여 수면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인간의 내면에 깃든 변질된 심리와 미묘한 심리적 갈등으로 빚어지는 비극적인 상황, 변혁의 소용돌이에 놓인 가난한 러시아 민중과 부패한 귀족계급에 대한 성찰도 돋보이지만 그 꼬리를 잡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렸을 때 EBS에서 본 《부활》은 정말 이해불가였다. 다들 심오하여 아무 말 못 했지만 작은 머릿속에 생각이 맴돌았다. '여자가 너무 성스럽게 묘사되어 있다!’ 형이상학적인 인간상을 추구하다 보니 현실적인 감각이 타락했는가? 세습적인 뿌리에 젖은 종교철학을 넘어선 포용적이고 우주적 세계관이 더 좋다.
거룩한 목소리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그에게 위대한 문호, 문학의 성자라는 칭호를 붙여주었지만, 가끔은 나 또한 수정처럼 빛나는 그의 통찰력에 일말의 찬사를 보내긴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톨스토이는 그다지 정이 가는 사람은 아니다. 이유? 너무 원초적인 거라. 물론 내밀한 남의 침실을 상관할 바 아니지만, 언젠가 그의 성생활과 비사(秘史)를 읽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 채식주의를 지키며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하던 톨스토이는 도박에 빠져 방탕하기 그지없고, 술주정뱅이에 간음을 저지르며, 끊이지 않는 성욕을 참지 못해 외도를 밥 먹듯이 하고, 사생아는 여럿 두고, 그토록 사랑했다고 고백한 부인을 못 살게 굴었다. 나와 동시대 인간이 아니라서 사실의 확인은 불가지만 정말이라면 이 사람은 이중적인 사이비 교주 아닌가. 더구나 자기 욕구를 채우는 그 즉시, 상대 위에서 코를 골며 엎드려 잤다는 비화를 보면서 겉면으로 보이는, 그리고 글 속에서 느껴지는 성스러움이 확 깨져 버렸다.
소크라테스나 톨스토이처럼 곁에 있는 악처가 성인을 만든다는 재미없는 이야기가 있지만 한쪽의 일방적인 행위로 발생하는 심드렁한 고난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슬피 대꾸하는 여인에게 희생과 이해로 감싸 안으라는 편협한 사고를 들이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 인간은 아직도 세상 도처에 즐비하다. 위대한 작가이면 뭐 하나? 겉보기엔 그럴싸한 인간처럼 보여도 자가당착에 뒹구는 오물 덩어리들. 그래서 허물을 벗긴 벌거숭이 톨스토이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꽤나 마음을 쏠리게 한다. 가난한 구두장이의 삶을 지켜보면 인피(人皮) 장화(長靴) 속에 우리는 어떤 인간을 넣고 돌아다니는지 지그시 묻게 만든다. 거짓말과 이기심에 하루종일 허탕 치고, 술기운에 의지한 채 고민을 저벅거리며 굶주린 가족에게 돌아가는 발길. 그 정신없는 와중에 길거리에 버려진 벌거숭이 거지를 외면할 수 없는 주변머리의 짧은 생각. 끼니걱정에 초조한 마음도 모르고 돈도 까먹고 염치도 홀랑 마신 그이에 대해 울분이 서렸다가 같은 처지에 놓인 인간을 보고 수프와 빵을 내주며 측은지심을 흘려내는 여편네. 그리고 초라한 저녁식사에 일말의 웃음으로 고마움에 표한 채 평범을 따라 묵묵히 일을 하는 알 수 없는 사내. 이들이 엮어내는 관용과 포용, 그리고 돌고 도는 인생의 법칙에 대한 이해는 잊을 수 없다.
하늘에 버려졌다가 모든 것을 깨닫고서 빛나는 아이가 말을 했다. 극한의 두려움과 배고픔을 피하게 하는 것은 인간 속에 품고 있는 본질인 사랑이라는 보살핌이다. 세월의 풍파에 끄떡없다고 생각하는 자만심을 지게 하는 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아는 지식이며 타인을 가엾이 여기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포용과 용서가 눈물 어린 신(神)의 그림자이다.
장난으로 켠 성냥불은 오줌을 지리게 하는 것뿐 아니라 서까래까지 홀랑 태워먹을 수 있다. 그래서 불길한 불은 애초에 꺼야 한다. 혹여 불! 영원히 타오르는 심장의 불이라면 이런 것은 꺼뜨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태우는 심지를 지피기보단 타인을 화상 입히는 불길만 불어댄다. 잡초를 뽑고 성개비를 얽어매며 곱게 자라는 풀잎을 걱정하던 푸념 섞인 한숨을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늙은이들은 쉽게 잊고 만다. 악(惡)은 악(惡)으로 다스리려 할수록 전이된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참으로 쉬우나 그 피는 자신의 영혼에 달라붙는다. 재난을 지고 그 위악까지 안는 건 도통 마음을 닦지 않고선 불가능한 경지가 아닐까?
이젠 영혼에 물 웅덩이를 괴게 하고 피투성이로 난장질하는 짓은 삼가고 싶다. 몰수당한 나의 심술도 다시 찾아 즐거이 웃고 싶어라. 골칫거리가 되는 교활한 돼지들. 이리의 야성과 별다를 것이 있는가. 보리가 춤을 추는 널찍한 초원에서 숨을 쉴 수 있다면 내 마음이 뜨겁게 타올라 물에 젖은 생나무도 활활 태우고 지치지 않는 환희의 쾌락이 온몸에서 터져 나올 텐데… 그날까지 불씨만을 안은 채 시원한 바람도 비켜야 하는가.
집에 돌아가는 길, 형이 뒤를 돌아보고선 그랬다.
"너 고생하는 거 말이다. 세상에 곧이 놔두면 사고가 분망해서 더 큰 재난이 닥칠 까봐 하늘에서 미리 막는 모양인가 보다."
그냥 씩 웃고 말았는데 그 말이 맴돈다. 나는 사랑으로 못난 그들을 감싸 안을 힘이 없단 말이다. 나도 사랑하기가 힘들어. 불씨를 안 꺼지게 하려고 품에 안고 있다 보니 매운 연기만 눈에 어리네. 다 놓아주면 안 되나? 불을 놓는 것도 터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2004. 11. 28. SUNDAY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도 있듯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의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몸체에서 갖춰지기 힘들다.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넣는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잊힐만하면 솟구치는 물음 앞에서 자성 없이 뛰쳐나오는 커다란 목소리는 깊숙하게 저문다. 사랑처럼 포괄적인 단어는 하루가 바쁠수록 흘러가는 시간에 매몰될수록 이해하기 힘들다. 나의 오늘은 생각에 가득 찼고, 실행의 종이 한 귀퉁이를 접으면서 잡다한질문은 수그러들었다. 정리할 것들이 늘어진 한쪽 손처럼 길기만 하다. 다시 무심한 사념의 도형 속으로 가벼이 머리를 넣어본다.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