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대의 얼굴과 놓쳐버린 우리들의 초상
《우리 시대의 얼굴 Face of Our Time | Antlitz der Zeit》, 《20세기의 사람들 People of the Twentieth Century》, 《얼굴들, 이미지와 그들의 진실 Faces, Images and their Truth》. 거창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주제이다. 우리 시대의 얼굴은 그것을 조명하는 작가의 생명이 유한한 관계로, 창작자가 사는 시대의 얼굴로 한정되는 오점을 갖고 있지 않은가! 회화나 일러스트가 주도했던 표피의 감각은 빛과 어둠의 중개를 일임하는 사진이 등장함에 따라 추상의 영역에서 반복되는 원을 그리게 되었다. 사물을 그대로 보는 것이 어떤 면에선 진실일 수 있고, 사물에 숨겨진 미묘한 표정을 찾아내고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다른 면에선 조금 더 진실한 것일 수 있다. 단,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진실에 대한 의문과 검증은 첨단과 미개의 영역, 그 어디에서나 그 언제나 물음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의문은 풀리는 순간 날카로운 진실에서 일반적인 보편명제로서 출발을 달리하며, 그와 인접한 또 다른 물음들의 예시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를 대표할 수 있는 표제는 [See, Observe and Think]이다. 보고 관찰하고 생각하라. 잔더가 품었던 원대한 이상이었던 이십 세기의 얼굴은 그가 거닐던 베스터발트(Westerwald)의 젊은 농부들, 부르주아지, 물을 긷는 아낙들, 뛰노는 아이들, 푸줏간 주인, 노동자, 서커스 단원, 길을 걷는 노부부, 군인, 목수, 경찰, 대장장이, 벽돌공, 학생, 은행가, 택시운전수, 조각가, 댄서 등 무작위로 집어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의 다큐적인 성격의 보고서로 마감되었다. 어쩌면 잔더가 표현한 인물은 세상의 0.01%조차 채 되지 않는 인간 군상일 것이다. 그것을 보고 20세기의 사람을 진단한다는 것은 지구상의 일부분에 머리를 처박고 세상을 다 봤다고 떠드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계란으로 바위를 쳐보겠다는 그 행위가 심리학적인 해석을 동반하며 여타의 작가들에게 인간에 대한 무한창작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것을 상기해 보면, 삶은 인간 행위의 동체를 통해 자극을 받고 그 결정을 자신의 틀로 변형하여 재생산하는 무형의 에너지원이 혼합된 구체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내가 사랑하는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심폐관은 잔더와는 또 다른 생활의 얼굴에 주목했었다. Gitan, Gitana, Gypsy. 잔더가 잡아낸 인물들은 보면 볼수록 시간의 거울을 붙잡고 있는 것 같다. 이 집시도.
2005. 12. 14. WEDNESDAY
인간의 초상은 최첨단 휴대용 카메라의 등장으로 흘러가는 순간을 가치 없이 포착하고 낭비하기 시작하면서 관찰자나 관찰 대상 그 모두에게 신선하지 않게 되었다. 시대의 초상이라고 불릴 만한 대표적인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시대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단 한 인간으로 규정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조용한 시대를 거쳐 빠르고 정확한 데이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오감을 자극하는 대상들과 만날수록, 상대의 눈 코 입이 사라지고 계란 표면처럼 매끈한 얼굴이 흔들거리는 초현실주의적인 시각의 환시를 경험한다.
무엇을 잃어버렸을까. 무엇을 찾아야 할까. 과거의 한 소절이든, 현재에 놓인 맥락이든, 미래의 불특정한 기대이든 간에 일정의 시간과 조우하는 경험은 시대에 파묻혀있는 자신을 소환한다. 나는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시대의 얼굴을 찾아내는 작업이 지금에서 의미롭지 못하다면 초침까지 선명한 이 시간을, 흩어지는 매 순간을 또렷하게 직면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