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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Oct 29. 2024

ALL FOR LOVE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2005>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제목부터 이상하게 들렸다.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어떤 것인가? ‘가장’이라는 단어가 최대치를 뽑아내라고 강요한다. 글쎄... 버릴 수 없이 아련한 지난날은 있어도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아직까지 피어나지 않은 것 같다. 무릇 기억이란 짧아서 아픔과 고통조차도 산뜻하게 포장해버리곤 한다. 가슴이 뭉그러져 도저히 살 수 없다며 취하고 말았던 밤. 하지만 빛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먼지 묻은 무릎을 털고 거리를 쏘다니곤 했다. 죽자고 생각한 숨 막힌 시간을 곱게 빗질하고선 전혀 상처 입은 적이 없다는 얼굴로 사람들과 마주하였고 한 번도 못 보던 생그런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속으론 부끄러워했다. 암전의 터널을 빠져나와 해를 맞으며 슬퍼했던 나를 찾아본다. 그러나 붉은빛으로 인해 눈물은 부서졌다. 하나의 사건으로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삶은 늘어지고, 빛바래고, 누구의 수첩 속에 고이 묻어서 당신의 신발끈에 질질 매여서 일주한다. 일주일이 아름답다는 표현은 역설 같다. 평이하기 그지없고 반복적인 프레임으로 뒤엉킨 일주일. 일 년 삼백육십오일을 7로 나누면 일정하게 떨어질 거라 생각하지만, 52.142857142857142857… 계속해서 반복된다. 52주 저 아래로 떨구어진 미진한 잔여 세월, 빛의 조각보는 윤년과 윤달을 안긴다. 그것은 덤으로 얻은 생인가? 아니, 독주로 지워버린 화요일일 수도 그와 이별한 수요일일 수도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월요일일 수도 중요한 약속이 잡힌 내일일 수도 평범하게 보낸 어제일 수도 희망으로 오롯한 오늘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오늘을 그저 오늘일 뿐이라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숫자는 숫자일 뿐일까?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든 인생을 보도록 세상은 어긋난 시차와 공백을 뿌려내고 있지 않을까.



 일주일에 대한 단위로 프레임을 나누어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인간관계를 교차시키는 것은 서양 장기와 크로스워드 게임에서 발견하게 되는 기호규칙과 닮아있다. 흑백의 다중그물이 얽혀 진을 치고 방어의 사슬을 뚫는 바둑과는 조금은 다른 형상이다. 이 법칙을 특기로 삼는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은 <내쉬빌 Nashville 1975>, <숏컷 Short Cuts 1993>, <플레이어 The Player 1992>, <고스포드 파크 Gosford Park 2001> 등에서 보이듯 개성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주목할 만한 사건을 만들어서 고립된 상자 속의 사람들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만든다. ‘영화가 종료될 때’라는 정해진 시간에서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고 간극의 화해를 유도함으로써 관객의 뇌리에 각 인물들의 이름조차 불분명한 사람들이 주축일 수밖에 없는 산만한 현실구도를 드러낸다. 그는 이야기의 말미에 내일에 대한 여운을 남긴다. 이에 대한 추측이 여러 갈래인 이유는 길 위의 인생들을 불러왔기 때문인데,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은 로버트 알트만처럼 인물의 행로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 영화를 혹자는 단어 프레임을 삽입하고 사랑을 주제 삼은 면에서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 2003>, 인물의 갈등이 징그럽다는 점에서 <매그놀리아 Magnolia 1999>와 비슷하다고들 말한다. 한국식의 짬뽕국물은 건더기가 뭔지도 모르게 푸짐해서 영 이색적인 맛이다. 영화가 풀어갈 숙제는 행복한 가면을 쓴 인생과 주름진 사랑. 여기엔 원초적 관계, 닭살 커플, 키다리 연상연하, 허공에 뜬 소년소녀, 오드리 곽 씨, 가정의 동반자 불독, 비주얼 없이도 건전한 상상력이 필요한 금지된 장난의 모습들이 숨어있다. 이들의 월요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침의 고요함에 묻혔다가, 만나고 얽히고설키고 문제가 발생하는 화요일로 그 적을 두고, 수요일의 곪아터진 반성에서 지독한 화농이 끓어오르는 목요일로, 염화기가 분출되는 금요일로,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여 상처 입은 서로를 보듬고 믿고 따르는 즐거운 토요일과 평안한 안식의 일요일로 접어든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색깔의 필터가 겹쳐있다. 하나는 제작사용, 다른 하나는 감독용. 필터는 형태를 묘사하기엔 그리 큰 차이를 주지는 않지만 주제의 톤과 맛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코미디색깔이 짙은 두사부 필름에서 드라마 성격이 강한 민규동 감독이 영화를 한다는 게 의외의 선택처럼 들렸던 것처럼 코미디와 드라마, 이 양극의 세기가 구름 같은 인간관계를 교차시키는 와중 물과 기름처럼 전 후반을 가른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건 극의 심도를 약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을지… 코미디라고도 할 수도 없고 드라마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코미디드라마도 어울리지 않는 모호한 경계. 두 가지 성격이 충돌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지만 장난기가 유난한 유쾌 발랄 전반부에서 사람들이 웃는데도 난 좀처럼 동조하지 못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핸드폰을 자꾸 켜는 바람에 신경질이 나서 그랬는지 모른다. 인물의 배경이 조사장을 빼놓고 일반인의 전형이라는 점에선 공통되지만 현재에 대한 설명이 뭉뚱그려있고, 매사 커플로 동반되는 지점을 만들어 놓아서 마치 가을운동회에서 엄마와 아이의 발을 묶는 끈처럼 재미있는 기법이었던 반편에, 한 사람을 떼놓고는 상상하기 불편했다. 또한, 여섯 커플을 하나로 모아주는 것은 공통으로 해결할 과제가 아닌 각자의 문제이며 이들을 마주치게 하는 구심점이 약간은 작위적으로도 보일 수 있는 '서울의 어느 한 거리’였다는 면에서 전체적인 연결고리가 위성을 안고 있는 분방한 블랙홀처럼 보였다. 단편이었으면 섬세하고 즐거울 이야기였으나, 세심한 표현력이 처음부터 과도하게 조명을 비춘 얼굴과 달라서 어디에다가 초점을 맞출지 당혹스러웠다. 드라마라는 한 가지 톤으로 나갔다면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영향력이 더 잘 발휘되지 않았을까? 아웃포커스를 심하게 사용한 초반화면이 머리를 뒤죽박죽 만든 것 같다.


 일전에 친구와 <여고괴담> 이야기를 하다가 두 번째 이야기가 제일 괜찮은 구성 같다고 합의를 본 적이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네." 소재의 독특함, 구성의 기획력, 시도의 참신성. 민규동 감독은 흑백 톤에서 무채색의 음영이 풍부하게 갈라지는 것 같다. 초반의 밝은 모습을 들뜨게 느낀 것은 환시가 아니겠지. 조사장과 남자 가정부, 예비수녀와 좌절한 가수의 관계와 같이 심리를 긁는 소재와 인생이 비통해지는 순간부터 농도 짙은 감각이 동공을 휘젓는다. 그때부터 화면이 제자리를 잡는다. 술과 땀이 흔들리는 숱한 피로감과 질금 속에서 살아나는 구질구질한 인간군상이 저런 것이 맞는 거라고, 한참은 슬퍼도 괜찮다고 말하게 했다. 일주일의 끝. 순한 양처럼 좁은 우리로 기어들어가는 인생. 거친 바람에서는 부르트지 않을 수 없는 살결. 순전히 연상 때문이겠지만 곽씨네하우스에서 곽사장이 오들희 여사에게 편집한 [문 리버 Moon River]를 들려줄 때 왜 그리 슬펐던지. <시네마천국>, <티파니에서의 아침을> 그 교차식인가.


 인생은 계산하기 쉽지 않다. 한두 스텝씩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 속에서 생명이 숨 쉬고 있다. 비틀거리는 두 다리를 감싼 고역의 쇠사슬이 즐거움에 취한 당신의 귓가를 거슬리게 할 것이다. 너는 아파하면서 기뻐하리라. 삶은 서로의 거리를 지키며, 한 번은 부딪히고 한 번은 멀어지면서 주물형태를 맞춰나간다. 너와 나의 인생이 상관없을 것 같아도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마음먹는다면 내가 그리는 그 사람을 몇 개의 인간 징검다리를 건너서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가 멀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마음이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혹은 너의 마음이 내게서 빠져나갔거나. 씨줄과 날줄, 너와 나의 격자무늬. 풀어지는 건 순간이어도 짜는 건 어려워서 신경을 쏟지 않으면 삽시간에 엉망으로 우그러들 인생카펫.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윤회를 믿으시나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수녀님에게 불상 레이저설치를 보며 묻고 싶었다. 장난스럽게 들릴까 봐 입을 다물었지만, 꼭 한번 물어봐야겠다. 어느 교단에선 우리의 삶이 일회용이라고 하고 어느 불단에선 재활용이라고 한다. 타이어로 쓰였다가 수족관에다 넣고, 허리띠로 달다가 머리띠로 올리고, 김치만두로 만들었다가 개밥으로 주는 사물만의 활용이 아니라 인간의 행적도 레일을 달리하며 타인들의 영역에 잠시 인사를 건네고 있다. 영원히 자신의 쓰임이 다해 세상에 안녕을 고할 때까지 나의 인생도 조물조물 돌려볼까 하얀 상상에 헤엄쳐본다.


2005. 10. 20. THURSDAY



 예전에는 영화를 열심히 봤다. 이 심심할수록 보이는 것에 힘을 실었다. 눈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서 감각을 동원하고 있으면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감상이 잊혀지지 않도록 머리에 떠오르는 이야기와 생각들을 하나의 물레 위에 격렬히 돌렸다. 연습의 시간이 끝나고, 혼자서 무대 위에 남아 모두가 떠나버린 자리에 앉아서 정적의 공간을 살펴본다. 고요함과 어둠이 가득한 밤에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이전 글들을 읽다 보면 생경한 감상으로 들린다. 꼭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흡사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듯이, 그렇게 다른 성격의 이야기 주머니를 풀어놓듯이 시간의 매듭이 달라지면 말들의 잔치는 어느덧 다른 맥락의 언어들에 익숙해진다. 무엇이든 시도하는 것은 좋다. 해봐야 알지 안 하면 알 수 없는 세상이다. 한주가 흐르고 한주의 어느 날에 서서 산발하는 불빛을 바라본다. 시간 속에 걸터앉은 느낌이 몽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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