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Oct 27. 2024

EVIL VIOLENCE

평범한 악에 관하여. 억제와 균형

[Die Nürnberger Prozesse,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Germany 1945-1946]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요즘 이 말을 너무 공감한다. 그녀의 말에서 현재는 딱 이 말만. 정기적으로 한두 번 가는 법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별다른 얼굴들이 아니다. 아버지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고 후배이기도 했던 그런 가까운 사람들이니까. 한참 철학이건 심리학이건 역사건 미학이건 그 모든 것에 빠졌던 대학교 때 만났던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와 더부살이하며 그의 지식을 흡수했는지 많은 이들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높이 사지만, 하이데거보다는 삶의 설명이나 이해도 면에서 나아 보였다. 가끔 타인들의 이야기가 어려울 땐 그들의 삶에 나의 현재를 대조해 보곤 한다.

 인간의 조건이라, 일하고 생각하는 것이 조화된다니, 현대사회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와서 생각을 처바른다는 게 쉬운 일일까? 일하는 것만 하거나, 쳐다보는 것만 하거나 잠만 자거나 하나씩 빠지게 되는 삶에서는 전혀 완전한 인간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내가 완벽한 인간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전체주의 의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전체주의 용어는 꽤 어렵다. 하긴 맞다. 나는 전체라고 불리는 군중더미는 싫어한다. 우르르 몰려가며 사진 찍는 거나 우르르 달려와서 경악할 욕설을 퍼붓는 짓거리는 안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볼 뿐이다.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 폭력이 난무하는 거리. 어려운 것은 모르겠고 나를 미치게 하는 군중들은 생각난다. 한나 아렌트를 겁나게 했던 히틀러와 나치들의 만행. 나를 겁나게 했던 탐욕스러운 사람들과 그들의 어리석은 폭력.

 그래서 잠시 생각해 본다. 히틀러의 뜻대로를 외치며 사람들을 뜨거운 용광로로 몰아갔던 것은 무엇일까? 반유태계 가정파탄 마더 콤플렉스 정신착란 이중분열 섹스중독 말더듬이 패러독스 성도착자 히틀러. 부족한 것들 다 갖고 있는 그를 보며 열광하는 심리는 어디에 있을까? 그가 말하는 것마다 다 모순인데 그 모든 모순들에 빠져버린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씩 갖고 있고 버려버리고 싶고 싫어하는 이 모든 것을 갖고 있어서 그에게 하나를 버리고 그들의 모든 것을 주면서 충성한 것일까? 허물어지고 말 튼튼한 성벽의 위안 아래서 하나가 빠져버린 그 구석을 다시 채우려고 이제는 무감해진 그 하나가 저지르는 것들을 보지 못한 채 다른 이에게 칼을 들이댄 것인가?

 가까운 거리를 점거한 사람들. 같이 웃고 떠들고 좋았던 시간을 보냈는데 그들이 저지른 일들기억하고 싶지 않다. 보다 보면 무서울 때가 있다. 아기들도. 어른들도. 늙은 이들도. 주변 사람들도. 그리고 나도. 아기의 눈망울을 보면 너무 순수해? 먹기만 먹고 자기도 못 가누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만 보고 꼭 쥐고서 안 놓는 아기들을 보는 순간은 예쁘고 좋긴 한데 가끔 그 모습을 보면 꼭 껴안아 줄 수 없는 이 무감함이 무섭다. 스스로의 탐욕에 갇혀 창구도 열지 않는 사람들. 가끔 평범한 삶에 무심할 수 없는 나도 무섭고 그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는 것도 무섭다. 순수하고 아름답다는 말을 쓰기가 힘들어진다.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믿게 된 하나를 채우기 위해

 딱딱하게 굳어진 그 하나를 파괴하기 위해

 가차 없이 다른 사람을 찔러대는 행위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살인들.

 신념이라는 굴레에서 이뤄지는 참혹극.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

 뉘른베르의 재판에서 보듯이 무정하고 극악한 범죄자들은 별다른 이상징후는 없다. 사람을 쪄서 죽이든 총 쏴 죽이든 패 죽이든 굶겨 죽이든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좋은 자리를 하나씩 걸터 차고 잘 산다. 그런 사람들이 노쇠하고 나약해져서 법정을 걸어 들어올 때 그저 그들이 저지른 살인을 믿기 어려울 뿐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재판에서도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를 현실들은 떨어지지 않는 악귀가 되어 흘러간다. 부족한 인간들, 나약한 인간들. 나와 웃고 마시고 놀던 사람들도 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동생, 연인, 너, 나, 친구, 선생님, 아기, 이웃. 뭐와 별반 다르지?

 무심하게 보게 되는 이라크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일들? 전체주의 사상? 세계 곳곳에서 평화를 외치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살인이 난무하는 곳에 떨어지지 않은 이들이 그 느낌을 얼마나 느낄 수 있는 걸까? 폭탄이 떨어지지만 그곳에서 정신을 놓아버린 채 몸만 다치고 있는 사람을 알까? 정말 평화나 반전이나 사랑이나 인류수호나 그 의미를 알고 외치는 걸까? 그 구호를 외치고 집에 들어가 자기가 나온 얼굴이나 외침만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아플까? 난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느끼지도 못하겠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은 아는데 그걸 바꿀 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군중 속에서 살기를 느낄 때, 그리고 그 군중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에게서도 살기를 느낄 때, 참을 수 없긴 하다. 그냥 종잇장에서 풀풀 날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일 때, 눈앞에서 너무 이상한 모습으로 펼쳐질 때 정말 역겹다. 몰랐던 베일이 벗겨지고 그게 아름답게 보이지만 않을 때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말로 풀어내는 정치 나부랭이들이나 사회 수호자들이그들이 보는 정확한 직관력이나 통찰력은 좋지만 정말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삶을 그들이 입발린 말로 하듯 관조하며 바라보는 걸까?


 갑자기 열받는다. 난 악한 이들을 본다. 옛날보다 자주 본다. 매일 본다. 왜 깨닫지 못할까? 왜 알지 못할까? 남의 불행을 보고 웃음이 나올까? 자신의 행복만 채우면 좋을까? 돈으로? 이름으로? 명예로? 정의로? 사랑으로? 질서로? 세상 구석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덤벼드는 걸까? 무엇 때문에? 남의 가슴 찢어놓고 알지도 못하고 왜 계속하는 걸까? 그게 뭐가 좋은 걸까?

 가끔은 그 모든 게 머리만 꽉 채우고 몸은 벗어날 수 없고 다 봐야 하는 것은 정말 무섭다. 꾹 눌러앉아 보고 있는 것도 무섭다. 그냥 놀러도 갈 수 없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들 무섭다. 언제나 자리 지키고 앉아있는 것도 무섭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무감한 것도 쓰러지는 것도 아파하는 것도 다 거짓부렁 같고 씨부렁거리는 것만 같아서 믿을 수도 없다. 정말 미치겠다. 이거 맨날 아무거나 적다가도 나로 돌아오고 마는 이야기다.

 하지만 더 해야겠다. 미칠 수 없는 것 놀러 갈 수 없는 것 이야기해도 또 계속되는 것 그걸 보면서 또 아무렇지 않게 보이기만 하는 것 미치겠다. 왜 이렇게 도돌임표인지 모르겠다. 놀아도 웃어도 슬퍼도 그게 진실인지도 모르겠다. 믿기도 싫다. 어쩔까. 이 놈의 현실. 너무 평범한 현실. 그리고 바깥세상. 그리고 사람들. 거기엔 뭐가 조화롭고 뭐가 다른 게 있는 거지? 거기엔 어떤 인간이 있는 걸까. 악한 이들은 끔찍하다. 보기 싫다. 너무 평범하고 너무 어리석고 너무 순수하고 너무 착하고, 그들이 당한다는 고통도 보기 싫다. 그런 사람이 저지르는 바보 같은 짓 밉다. 그 미운 짓이 너무 싫어서 무섭다. 증오해 버리게 밉도록.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떨칠 수 없게 무섭다. 언제나 달라붙어 있어서 무섭다.

 현실, 그 현실, 평범하도록 지루한 현실, 그곳에 자리한 악? 악이란 어려운 단어도 모르겠다. 그냥 무섭다. 무서워서 돌고 싶다. 그렇다고 돌 수도 없어서 또 제자리표. 그 긴긴 종이들. 단단하게 돌덩이로 젖어든 책들. 이젠 보지도 않을 머릿속의 단어를 떠올리며 느껴지지 않는 단어를 보며 내 주위를 봐야 하는 것, 날 돌아봐야 하는 것. 무감했다 또 무섭고 무감했다 또 무섭고 그냥 내 주위를 돌아보며 한기만 느끼는 이 순간도 무섭다. 내가 느끼는 악은 너무 평범한 얼굴이다. 그냥 무서워하기만 하는 평범한 얼굴. 내 얼굴 찢고 마음도 찢고 싶어 하는 평범한 얼굴. 내 눈에 비친 살기가! 그리고 그걸 놓아버리고 싶은 살기도 무섭다. 무섭다. 정말.


 군중 속의 악을 한나 아렌트보다 더 잘 표현한 사람은 아마 안네가 아닐까. 한 곳에 눌러서 그냥 세월만 보냈던 변치 않던 현실에서 《안네의 일기 Het Achterhuis : The Diary of a Young Girl, The Diary of Anne Frank》 속에 그녀가 모두 적어내진 못했지만 작은 다락방에서 보냈던 수년의 시간들. 그 안에 있던 가족들과 이웃들. 창밖에서 벌어지는 극악한 행동 때문에 한 곳에 뭉쳤겠지만 그녀가 어려서 말로 적어내진 못했던 모순된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이상한 얼굴을 가진 이들은 자잘한 일들로 시기하고 질투했던 그 공간 속의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 공간 밖의 일은 더욱 참혹했지만. 언제나 알 수 없는 이야기는 말해지지 않는 법이다.


2004. 8. 27. FRIDAY



 영화 <뉘른베르크 재판 Judgment at Nuremberg 1961>을 보고서 노쇠하고 늙은 평범한 악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에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담론에 공감한 이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과 《전체주의의 기원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을 열독했던 시절이었다. 폭력을 일상화한 사람들이 탐욕스러운 권력의 지배와 복종에 얽매이지 않으려면 두려움이 고착된 절대화의 고리를 스스로 끊는 수밖에 없다. 현명한 단절이란 존재하지 않겠지만 인내와 용기를 수반하는 억제와 균형은 필요하다.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 한바탕 헤집고 나니 목도 아프도 눈도 아프고 발도 아팠다. 미쳐버리는 알았다. 제어장치가 가까이 있음에도 한번 돌아버리면 눈앞이 보이지가 않는다. 언젠가는 나를 휘몰아친 말도 안 되는 삶에 대해 쓸 일이 있을 것이다. 가라앉은 줄 알았던 목소리가 갈라져 터져 나왔다. 묵직하고 울림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생은 평범하긴 글렀다는 생각이 들 때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온다. 언젠가는 벗어나긴 하겠지만 날카로운 본성을 마주할 때면 혼란스럽다.


 변하지 않는 것에서 가장 단단한 벽은 인간이며 바로 자신이다. 특히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고치는 것은 어렵다. 스스로도 고쳐지지 않는데 타인이야 하물며 더할까. 내부에서 인지하지만 스스로 변하지 않을 땐 그것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관성의 고집 때문일 수도 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약속했던 시간들이 열리고 있다. 변화를 주기로 약속했고 스스로도 변하기로 다짐했는데 단선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하나의 형태에 비해 뭉쳐진 형상은 쉽게 변하기 힘들다. 방향성은 변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말로 표현되는 단어가 다르구나 싶다. 모든 것이 다가오는 순간에서 하나를 미루고 또 다른 것을 미루는 행위가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손에 쥔 부질없는 생각들을 놓아버리면 해결되겠지만 놓아버리는 것은 또 그리 쉽지 않다. 스스로 알아서 떠나가길 바라며 미련을 두고 바라보고 있는 이 쉽지 않은 마음을 볼 때면 참 어리석구나 싶다.


작가의 이전글 LOUIS ARAGON, WORD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