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sche Landschaft Zur Kunstgeschichte Der Natur, Martin Warnke]
"풍경은 문명을 보상해 주던 과거의 역할을 버리고 문명을 증대시키는 상징적인 역할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인간은 자연을 전면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자연의 자립적인 생명력과 고유의 권위를 말살해 버렸다. 이물질을 잔뜩 삼킨 채 멸망의 각인이 찍힌 자연은 동정과 구조의 대상일 뿐, 더 이상 인간사에서 자연의 법칙을 증명하거나 정당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정치적 풍경, 자연의 예술사에 대하여, 마르틴 바른케, Politische Landschaft Zur Kunstgeschichte Der Natur, Martin Warnke》
대학 땐 그림을 보던 책을 읽던 영화를 보던 감상문을 곧잘 썼다. 리포트용으로, 토론용으로, 취미용으로, 자조적인 편지 형식으로 쓰던 습관은 질긴가 보다. 지금까지도 변치 않았다. 난 전문적으로 그림 보는 눈은 없다. 그냥 본 대로 말하는 것이 미사여구를 붙인 말보다 정직하다고 믿고 있다. 많이 본 사람은 많이 볼 것이고 적게 본 사람은 적게 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사, 역사, 독일 문학을 전공한 마르틴 바른케가 보는 풍경 관찰은 소박하고 단편적인 형상 하나에서도 정치적인 신호와 역사적인 상징을 발견하는 문학적이고 세밀한 자세를 보여준다. 그는 그림너머 도시전경에서 소시민이 품은 소망을 보며 손가락이 가리키는 지점에 지배자의 이념이 있다고 말한다. 인위적인 풍경이 가미됨으로 인해 정치화(畵)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신성시되어 왔는지,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당시 사회는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는지 학자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
어두운 욕망을 분출해 내는 그림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로선 풍경화는 성경 그림 같아서 지루하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자연을 그리며 권력에 압박받은 서러움과 정치적으로 유린된 정신을 삽입시켰던 작가들을 다시 바라보자고 되새겼다. 이 세상의 평범하고 무수한 산물들은 단발이 아닌 연발의 기관 장치를 품고 있으니까 말이다.
풍경(Landscape), 그 속에 담긴 요소들을 보며 몇 가지 주목한 점이 있다. 울타리와 철조망 같은 경계선은 신체적인 고통으로 인류에게 경계에 대한 기억을 전승시킨다. 도로는 빈번히 일어나는 보도블록 교체 사업처럼 통행에 관한 국가의 정치적인 과시용이다. 다리 위에 솟는 태양과 다리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기술을 통한 자연 극복이자 갈등이다. 가로수 길은 퍼레이드처럼 환영(歡迎)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유의 위협과 보존에서 갈림길에 선다. 기념물은 정치적 역학 관계나 의미에 따라 대중 앞에서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다. 성채처럼 키가 높은 건축물은 지대에서 올려다보는 눈길과 건물에서 내려보는 눈길과 대응한다. 즉, 분노와 은유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성채는 적대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을 그려내는 풍경화는 전술을 놀이처럼 인식하는 장기판과 유사하다. 전쟁터에서 전쟁풍경으로 변해간 그림들은 점차 묵시록적인 배경에서 극도의 경련에 빠져든다. 등등.
딱딱한 이 책에 대한 비렸던 추억은 잠시 접어두려 한다. 지식보다 한탄이 역시 머리에 오래 남는가 보다. 책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의 《돈 카를로스 Don Carlos》에서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궁정생활에 대해 따분함을 말한 왕비처럼, 한 곳에 머무르는 감금생활은 풍경을 볼 때마다 죽음을 연상하는 입에다 하품을 물게 한다.
나무들이 수행하는 두려운 의식(儀式)인가. 아름답게 가꾸어졌지만 뻣뻣하게 경직된 나무들은 궁정의 얼굴과 같네. 내 주변에서 마치 장례행렬처럼 늘어서서 하품하는 나무들.
잘 가꿔진 정원은 관상용이라도 되지만 손길을 잃은 정원은 얼마나 스산하던가. 풍경에 거인을 심고 군주의 초상을 만드는 행태는 삶의 도처에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나고 있다. 환상이 커지면 입상이 들고 있는 횃불조차 날 쫓아오는 도깨비불 같이 보이는데, 지배와 예속의 관계에서 마음을 자유롭게 발산하는 자는 누구인가. 물보라의 고함을 듣고 붉은 혁명을 부르짖은 클로드 샤틀레(Claude-Louis Châtelet)도 있지만 해방 앞의 바위는 굳건했다. 화강암을 끊임없이 쪼아대는 물줄기는 살아 있어도 패덕한 바위산이 그 물조차 잡아먹는다면 낙관적인 파노라마는 어느 지평에서 떠올라야 할 것인가.
풍경의 모티프(Landscape Motif). 주석 없이도 사물을 볼 수 있고 해석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만 강, 숲, 바다, 양치기, 벌, 꽃, 산, 건물… 이 모든 유형은 광포한 운명의 격류 앞에서
허물어지지 않고 저항을 할 수 있을까? 시간이 되면 형체들은 썰물처럼 물러가게 되는 것을.
마르틴은 정치적인 해석을 가미하며 책을 적었지만 굳이 자신과 같이 풍경을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 체험이 녹아든 산물을 풍요롭고 다층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각자의 개인경험은 똑같지 않으니까. 자연의 풍경은 점점 인간의 고통을 끌어안으며 힘겹게 바퀴를 돌리는 신음을 내고 있다. 나의 고통과도 대화할 만큼 그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래서 풍경을 쉽게 지나칠 수 없다.
2005. 2. 13. SUNDAY
현대 도시에서의 마천루 풍경은 유심히 볼 게 없다. 그림을 그린다 해도 사진을 찍는다 해도 별다를 게 없는 풍경. 건물만 전문적으로 찍는 작가도 있고 건물과 자연, 그 상대적인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는 고찰적인 영상 전시도 있지만 그것은 사색적인 풍경이라기보다 건축 조감도에 가깝다.시공한 뒤 얼마를 들여 디자인 설계를 했는지 의뢰인에게 브리핑하는 건축사처럼 도시 공학으로 풍경을 바라보면 모를까 도시 미술은 아닌 것이다. 콘크리트 건물 풍경으로 인간사의 상징을 이야기하기엔 그다지 개성이 없다. 각자의 생각과 감상을 적는 글의 풍경도 타자를 향한 보여줌의 형식만 맞춘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의미는 사라질 것이며, 더 나아가 생활의 주체인 인간도 삶의 모양새가 정형화된 외적 가치를 추구하는 타인과 동일하다면 우리가 그리던 풍경이 주는 여유는 오직 심상에만 머무를 듯하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간다 해도 노인들과 이방인들만이 지키는 동네에 한적한 개소리와 버려진 빈 땅과 빈 집 사이로 시골에서 살지 않았던 이들에게 어떤 향수가 존재하던가.
아무렇지 않게 그저 풍경을 풍경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 올까. 사람을 사람대로 보고 사물을 사물대로 보는 것이 쉽지 않다. 망부석이 되지 않고선 시선이 부드럽긴 어렵겠다. 멀찍이 떨어져 진지한 관찰자의 자세로 풍경을 바라봐야겠다. 내 마음의 풍경이 존재하기 위해선 넓은 시야가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