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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 ALL YOU NEED IS LOVE

<레아>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 사랑이란?

by CHRIS
[LEA 1997]


풀잎만이 내게 묻네 왜 웃지 않냐고

풀잎만이 내게 묻네 왜 희망이 없냐고

풀잎만이 내게 묻네 왜 죽은 자와 춤을 추냐고

풀잎만이 내게 묻네 왜 사막에서 들장미를 심느냐고

풀잎만이 묻는다네

<영화, Lea 중에서 레아의 시>


안개 미소가 달무리로 퍼지는 밤이면 늪지인지 설원인지 축축한 대지가 품은 사랑을 그리게 된다. "진정한 사랑이 여자를 웃게 한다"는 슬로바키아의 속담을 초대한다. 그래, 우리는 노래할 거야.


고독한 우리에게는 웃음이 필요하네.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네.

서로의 사랑이 우리를 웃게 하지.


사랑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물 가득 검은 동굴에 아담과 이브 시절에 등장했던 방울뱀을 방사해 본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해독제를 갖고 태어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독과 해독제를 함께 내장한 뱀처럼 독과 해독제를 동시에 안은 사랑이 치명적임에도 사람들이 평생 절박하게 찾아 헤매는 건 자신의 독을 해독해 줄 용액을 자신과 한 몸이었으되 분리된 상대가 갖고 있어서일까? 누가 이토록 영리했을까, 쉬운 수수께끼를 내놓고 풀지 못하게 상대의 이름을 지워버린 것일까? 오묘한 것은, 내가 품었던 독만큼 상대방도 같은 양을 품고 있다면 서로에게 이롭겠지만 용량을 잘못 섞으면 둘 중 하나가 위험에 빠지는 결함이 생긴다는 것이다. 연인 간의 사랑이든 부모와의 애정이든 친구 간의 우정이든 종류를 막론하고 비슷한 어려움을 내장한 사랑. 아무래도 이 괴한 사랑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독성을 잘 이해하는 전능한 해독사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동화가 좋아진다. 스무 살이 넘어서 보는 동화, 어른들이 봐야 할 동화, 환상 동화집, 우리가 모르는 잔혹 동화. 요즘엔 어렸을 적 읽은 동화를 재편집한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물론 영화도 제외가 아니다. 비판만 할 수 없는 것이, 옛날부터 이야기는 동질의 뼈대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비슷하게 갖고 있는 기본적인 외형처럼 사랑, 미움, 슬픔, 증오, 고통, 분노, 쾌락을 담았던 우리의 삶은 구전으로 많은 비밀들을 전해왔다. 점점 종류가 갈려졌을 뿐이다. 여러 생각이 보태지고 경험이 축적되고 각종 언어들로 장식되면서 차이가 생겨났지만 내부를 파고들면 더 이상 새로움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들장미를 닮은 외로운 공주와 마법에 걸린 슬픈 왕자를 떠올리게 하는 잔혹동화, 레아(Lea)처럼.



나의 주인님, 사랑한다면 손을 묶지 마세요

불쌍한 엄마에게 시를 바쳐야 해요

하늘의 소리로 그녀를 울게 한 겨울을 달래야 해요

우리가 사랑한다면 손을 묶어서는 안 돼요

말을 버리고 먼 길을 떠난 엄마를 배웅합니다

눈보라가 일면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뜨거운 눈에는 가벼운 눈가루가 날리죠

차가운 설광은 나의 뼈에서 흩어진 걸까요?


나의 주인님, 사랑한다면 손을 묶지 마세요

외로운 그댈 위해 활을 켜야 해요

어항 속의 물고기가 된 당신의 비늘을 닦아야 해요

우리가 사랑한다면 손을 묶어서는 안 돼요

금을 메우고 분노를 삼킨 그대를 위로합니다

눈보라가 일면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사랑했던 눈에는 가벼운 진물이 흐르죠

붉은 꽃잎들은 나의 살에서 흩어진 걸까요?


나의 주인님, 제가 연주를 하면 일을 하세요

그대에게 말할 테니 우표를 사 주세요

미소 질 테니 들장미를 안겨 주세요

하얀 들판에서 당신께 향기로운 편지를 쓰겠어요

편지를 받으면 제 동굴에 들어와도 좋아요

엄마에게 피우던 하얀 초를 제게도 피워주세요

엄마의 사진 곁에다 제 사진도 놓아주세요

그땐 주인님도 나에게 편지를 쓰게 될까요?



난 음울한 사랑을 병적으로 좋아한다. 밝은 것에서 멀어진 이유는 모른다. 사악한 마녀처럼 얄팍한 손가락으로 당신의 사랑을 조물거리길 좋아해선가? 그대의 달콤한 목덜미를 힘차게 빠는 티티새가 되어 비밀한 언어를 읽는다면! 그대의 팍팍한 심장을 성난 발톱으로 후비는 사자가 되어 숨죽인 호흡을 듣는다면! 그대의 표류하는 혈관을 온몸으로 파헤치는 미꾸라지가 되어 잠겨진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면! 사막에서 외롭게 자란 나는 당신에겐 너무 거친가? 너무 어두운가? 너무 파괴적인가?


레아를 보면서 그녀와 스트레흐로우의 짧았던 인연에 눈을 감는다. 그들의 사랑이 잉태한 자식인 양, 어두운 지문이 섞인 그림자를 보았다. 곰 같은 남자 곁에서 웅크린 채 말을 잃어버린 작은 요정. 언어가 다르고 몸의 크기가 다르고 품었던 의식이 달랐던 곡절의 만남. 실패에서 풀린 연이 되어 멀리 달아났다가 얼음 녹이는 손길에 가까이 당겨지는 이들의 사랑은 슬픈 이야기로 시작되었던 아름다운 시어였지만 다시 슬프게 끝나버렸다. 음산한 꿈을 자주 안고 가는 나에겐 어떤 사랑이 자리하려는가? 그리고 나의 현재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둔 것처럼 보여도 구멍을 발견할 수 없는 무균질의 수세미 가슴에 바람이 분다. 상대보다 독을 너무 많이 품은 것이 아닐지,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당신 독으로 흐물거리는 붉은 혀가 달콤하게 그대 이름을 부를 수 있길 꿈꾸어본다. 눈을 감을 때 아쉬운 점은 눈뜨는 것이다. 함께 꿈을 꾸려고 눈을 뜨면 꿈은 사라진다고 하던데...


내가 없어도 웃어요

당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에요

난 언제나 당신 마음에 있죠

멀리 있지 않아요

매일 당신과 함께 웃어요

그러니 슬퍼 말아요

당신의 심장과 똑같이 뛰고 있어요

눈을 감고 들어보세요

그대 부르는 나의 노래를


2005. 4. 1. FRIDAY




한때 기억은 놀랄 만큼 선명했다. 하루동안 본 것과 경험했던 것, 접촉했던 것을 모두 기억의 서랍 한 구석에 쌓아두었다. 그랬지만, 어느 순간 알고 있다고 여겼던 지난 생각은 뜨거운 촛농처럼 흘러넘치고 기억을 떠올리면 부력의 원리처럼 실제로 큰 공간 안에 담았던 것만큼 가득 차 있지 않았다. 영화의 결말은 희미하다. 해결될 듯 보이는 인간의 관계는 결말에 다다를수록 행복을 기대하는 염원에 부응하지 못한다. 가끔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타인의 삶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곤 한다. 저렇게 부조리하고 엉망인 사람들도 사는데! 만들어진 이야기일지라도 어떠한가. 삶의 이유는 다양하다. 사랑이란 그 이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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