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융 《기억, 꿈, 사상》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 Erinnerungen, Träume, Gedanken》은 융의 분석심리학에 동조했던 청소년기 시절을 상기해보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다. 나를 서술하기로 생각한 이래 흩어진 기억을 소환하여 살아왔던 순간을 말한다는 것은 시간 속에 묻힌 스스로를 알아내는 작업이자 개성적으로 삶을 경험한 자아를 드러내는 동시에 세상을 향해 감춰진 생각을 펼쳐내는 가치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인생은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외적인 상황은 내적 체험을 대신할 수 없다. 공허하게 여겨지는 삶의 빈약함이나 풍부하게 느껴지는 부유함 또한 진실이나 거짓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지점에 있다.
나의 첫 기억은 한 살 미만 육 개월 정도가 된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기찻길에서 파릇하게 올라온 풀이 가득 찬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란 개나리가 봄바람에 화사하게 흔들리고 하얀 꽃가루가 공기 중에서 날아올랐다. 뿌옇게 보이는 세상은 몽환적이었다. 흰 옷을 입고 높은 시선에서 바라보던 세상은 그저 포근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보통 어린아이의 기억은 뇌의 인지가 시작되는 다섯 살부터라고 한다. 그보다 이르렀던 기억으로 돌아간다. 감정이 솜털처럼 민감했던 시절에는 시간의 나이테를 그은 듯이 장면과 온기, 감각에 집중하였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놓고 인생 장터에서 살아가기 위한 생활에 몰두하면서 기억은 점차 퇴색하기 시작했다. 검은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은 밤을 좋아했던 어둡고 파괴적인 페르소나 때문이지만 의식의 첫 외상(Trauma)은 상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의식적인 출발점을 향해 당겨진다. 어둠의 통과의례는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놓인 아름다움이 춘화와 음화로 구분되지 않듯이 비밀을 형상화하려는 시도와 함께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으로 귀결된다.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나는 궁핍한 시절을 굳이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러한 시절에는 하찮은 물건까지도 아끼는 법을 배우게 된다.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없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융이 학창 시절 보이던 내적인 반항은 목사였던 부모의 가계와 정신적 사상을 형성한 기독교 세계관에서 영향을 받았다. 종교적인 대화나 신학적인 토론 또한 엄격하고 상징적인 세계에서 자란 성장의 기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청소년기에 바라보았던 융과 현재 시점에서 해석되는 융은 읽히는 느낌이 다르다. 태어나 불과 십 수년의 경험이 전부였던 시절엔 정신분석학이나 분석심리학이 칼을 대지 않아도 충분히 자아를 내밀하게 분석할 수 있다는 면에서 시각적인 안전성과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했다. 삶에 부딪히며 생활에 매진하는 지금은 과거에 비해 내적 심리를 이해하는 작업에서 멀어져 있다.
일상의 현실적인 세계관에서 접하는 인간들의 태도는 욕망의 음험함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삶을 옥죄기 시작한다. 표면적인 제1의 인격과 수동적인 제2의 인격, 사회적인 세계와 개인적인 세계, 신과 철학, 칸트와 쇼펜하우어, 분열과 혼란, 성장기의 아름다운 시간들, 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부모가 인생에 미친 영향, 길게 살 것인지 짧게 살 것인지의 트라우마, 회상과 추억, 니체의 파우스트인 자라투스트라처럼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 철학자들의 괴변이나 사상적인 태도보다 각자의 경험을 가지고 삶을 풀이하는 경험주의자들의 논리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책을 붙들고서 글을 읽어나감에 진척이 없어서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을 정신적인 분석에 투영하던 시절과 결별했나 보다 싶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묻어버린 일상의 기억들처럼 살갗에 칼을 대거나 피를 보지 않고서도 인간 내부를 파헤칠 수 있다는 사실은 정신분석학이 정신적인 우주를 바라봄에 있어 신적인 종교와의 연관성을 지니며 연금술의 마법을 제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신병에는 보편적인 인간심리학이 감추어져 있고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 정신과 의사들이 흔히 진행하는 환자와의 깊은 대화 속에서는 개인적 심리의 비극적 붕괴 이외에 다른 측면의 삶이 드러나게 되며 내적체험의 의미 있는 현상들이 뭉쳐지고 한 인간의 삶이 분할되어 도출된다. 체면의 페르소나(Persona)를 벗고 자신을 여행하는 순간 우리의 꿈은 의식적인 태도에 대한 보상으로 마무리된다. 프로이트의 성욕이론은 신성한 힘과 동일시되는 누미노숨(Numinosum)으로 작용하여 자기 억압기제에 연결된다. 프로이트와 니체, 아버지와 아들, 암시와 후계, 집단무의식으로 총칭되는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의 집필을 통해 융은 프로이트와 결별을 선언한다.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연 프로이트와 같은 분야를 연구하지만 성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다양한 심리 해석의 길을 만들어낸 융은 이후 자신의 여인 아나마를 찾아 나선다.
"삶을 대체할 만한 완전한 언어는 없다."
신화와 환상이 결합된 꿈의 이미지를 살펴보면 사회에서 스스로 고립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상을 원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융은 그의 무의식 속에서 돌과 모래로 집과 성, 마을을 만들었던 어린 시절을 창조적인 삶이라고 분석한다. 타인의 상상을 파헤치고 그에 대한 정리의 글을 쓰는 그는 직접 손으로 형상을 만드는 것에서 멀어진 분석가이다. 요가가 융에게 이미지의 상기를 가져온다면 인도인에게는 이미지를 제거하는 대조적인 목적성을 지닌다. 타인의 열망과 추구는 현실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감정배후의 숨은 이미지를 의식화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된 융은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형상을 그의 아니마(Anima)로 인식하면서 그녀에게 성실한 글쓰기를 잊지 않는다. 무의식의 전제적인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고 윤리적인 의무를 가져야 한다. 융의 저술은 스스로 평가하듯이 생애의 정류장이며 내적 발달의 표현이자 정신의 작업이 된다.
"우리의 마음은 신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이미 존재해 온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 '새로운 것'이란 아득한 옛날의 구성요소들이 끝없이 변화하여 재결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체나 마음은 현저하게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새로운 것, 즉 방금 생겨난 것 속에서는 알맞은 자리를 찾지 못한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좋은 것이 나쁜 것들의 대가로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열정의 지옥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융이 회상하는 여행의 회중시계를 따라 아랍풍의 열정적 시간, 유럽인의 가속화된 시간, 아프리카의 고독한 시간, 한국인의 고속적인 시간을 상상했다. 내부에 축적되는 환상은 여행에서 발견하는 이질적인 상대성을 통해 증명된다. 인도에서 부처와 그리스도의 차이를 그려본 융은 역사적 인격체에 신적인 자기가 들어가면 세계의 역사적인 뿌리는 혼재될 수밖에 없는 공통의 상징적 의미가 됨을 파악해 낸다. 존재에 대한 긍정은 자기를 정립함에 있어 가장 난관이 되는 관문이다.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거기서 하나의 객관적 전체성으로 통합된다. 아무것도 더 이상 시간으로 쪼개질 수 없고 시간개념에 따라 측정될 수도 없다. 그 체험은 우선 하나의 상태, 즉 사람들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감정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다른 것은 너무도 분명한 현재이며,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이미 끝난 일이었으나 그 모든 것이 하나였다. 감정이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시작하는 일에 대한 기대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놀라움, 그리고 지나간 일의 결과에 대한 만족이나 실망이 모두 포함된 하나의 총체, 다채로운 전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들어 있으면서도 완전한 객관성을 가지고 지각하게 되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였다. 자신의 숙명을 긍정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도 자아는 굴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참아내며 진리를 견디며 세계와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패배에서도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아무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연속성이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잠재의식의 이야기를 짓는 융은 신화를 의식적 인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단계로, 사후와 지금의 생을 이어주는 촉매제로 본다. 과거 꿈이 산만했던 나는 카르마를 신비롭게 인식했다. 어두운 꿈이 의식을 지배하는 밤이면 불길한 삶을 미리 보았던 것에 가슴을 졸이거나 영특한 영매를 끄집어내 꿈의 단서를 이해하려고 무의식에 집중하였다.
재생의 카르마에 대한 현재의 관점은 지금의 업보는 과거에서 이어진 것이며 내세에 업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바로 지금 여기에서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재생에 대한 관념과 표상을 짊어지고 자유로운 빈마음을 가지는 오늘에서야 자기(Selbst)와 자아(Ich)는 육체와 마음처럼 한 몸이되 같이 할 수도 따로 지낼 수도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 고된 시간이 선사한 선물임을 발견한다.
세속적인 명상은 현실에서 날카로운 매무새를 가진 얼굴에게는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나는 융을 태동시킨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귀의하는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지으며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선과 악, 잠재의식과 본성, 신화와 현실까지도 융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기에 풍랑이 거칠었던 내 안의 삶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현재의 인간들이 낭만적으로 포기한 사실을 천천히 상기해보려고 한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리하여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치유를 가져오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화롯가에 앉아 파이프담배를 피우며 유쾌하게 유령이야기를 나누는 것과도 같다."
《기억, 꿈, 사상 Erinnerungen, Träume, Gedanken by Carl Gustav Jung》